제95회 인애와 자비
2017년 9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7절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지난 9월 7일부터 14일까지 1주일 동안의 한국방문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정했던 일들도 모두 잘 된 것 같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모두가 우리 앞길을 인도해주신 주님 덕분이고, 그리고 기도해주신 여러분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고, 이제부터 또 내년까지 여러 일들이 예정되어 있습니다만, 계속해서 기도를 좀 당부 드립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인애와 자비” 慈しみと憐れみ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한국에 가기 전부터 한국 뉴스를 보니 참 여러 소식이 들어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안타까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중생 폭행사건이었습니다. 부산에서 여고생 4명이 여중생 한 명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집단폭행을 했다는 것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사진들은 모자이크처리를 한 것이었습니다만, 그 모습만 보더라도 얼마나 처참한 폭행이었는지를 충분히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우리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웃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나요? 아니면 멀어졌나요? 사실 거리는 대단히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한국이나 일본 등 웬만한 나라에서는 핸드폰, 스마트폰이 당연시 되고 있는 사회입니다. 그러고 보면 옛날에는 참 불편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친구네 집에 전화를 건다고 하면, 너무 늦게 걸어도 실례가 되겠지요. 적당한 시간을 봐서 전화를 겁니다. 전화를 걸었는데 본인이 받는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보통 부모님이 받으세요. 그러면 “저 누구누구네 집이죠? 저 누구누구 친구 누구누구라고 하는데 누구누구 있어요?” 그 때 마침 있어서 통화를 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없다거나 하면 참 골치입니다. 간단한 용건이라면 그냥 전해달라고 하면 되겠습니다만, 내용이 좀 길어지거나 하면, 전해달라고 하기도 좀 어려워요. 그럼 다시 걸겠다고 하거나, 아니면 들어오면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을 해야 합니다.


그건 그래도 괜찮아요. 예를 들어서 누구랑 밖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되도 안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 집에 전화를 걸어요. 그러면 당연히 본인은 이미 나갔으니까 없죠. 그런데 마침 가족이 있거나 하면 그나마 다행이에요. “저 오늘 누구누구랑 만나기로 한 누구누군데요. 몇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안 나와서 연락을 드렸는데요……” 라고 해서 아직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연락이 온 게 있느냐, 혹시 연락이 오면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달라는 둥 뭐 이러면서 끊습니다. 그리고 마냥 기다릴 수 밖에 없어요. 그리고 서울이 또 차가 보통 밀리나요. 그래서 뭐 사람을 30분, 1시간 기다리는 것도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학가 앞 사회과학서점에 보면 그날 모임이 있다고 하면 그 약속 메모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어요. 신림동에는 당시 대표적인 서점이 <전야> <열린글방> <그날이오면> 세 군데 있었는데, 지금은 그 중 ‘그날이오면’이라는 서점만 남아있습니다. 연세대 앞에는 ‘오늘의책’이라는 책방이 있었지요. 그래서 좀 늦게 오는 사람들은 다들 모여서 그 메모를 보고 찾아가곤 했었습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이런저런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로는 <롯데백화점 지하 분수대>에서 분명 만나기로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그날 그 두 사람은 못 만났다고 하는데, 문제는 두 사람이 모두 약속 시간에 분명히 <롯데백화점 지하 분수대> 앞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두 사람은 못 만났을까요? 사람이 많아서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답은 서울에 롯데백화점이 두 곳이 있었다는 거예요. 한 곳은 명동이고 또 하나는 잠실입니다. 지금도 그대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에는 명동과 잠실에 있는 롯데백화점에는 똑같이 지하에 분수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이라면 이런 문제는 안 생기지요. 5분만 늦더라도 곧바로 전화를 걸거나, 아니면 카톡으로 확인하면 될 일입니다.

이렇게 되니 누가 받을지 긴장하면서 친구 집에 전화를 걸 필요도 없습니다. 모임 장소를 알기 위해서 일일이 메모를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시간을 넘어, 그리고 지역과 국경을 넘어서 인터넷을 통해 24시간 동안 연결이 되어 있고, 원한다면 언제든지 말을 주고 받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울 것도 아닌, 이제는 완전히 상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른바 메신저와 SNS라고 하지요? 메신저는 카카오톡이나 라인, SNS,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라고 하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서 우리들은 365일 24시간 동안 원하는 지인과 연락을 취할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역사상 이처럼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가 긴밀하게 가까웠던 시기는 없었지 않았나 합니다. 참으로 과학이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가까워졌나요? 사실 가깝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잘 위하고 서로 도와주기도 하고 힘이 되어 주기도 하고……그것이 가까운 것 아니겠습니까. 상대방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해주고,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슬퍼해주고 위로해주기도 하는 것이 가까운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서로가 멀리 있다고 해도 이처럼 365일 24시간 언제든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면 예전에 비해서 더욱 강한 유대감이 생겨나야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페이스북에 보면 수백 명, 수천 명이 이른바 <친구>라는 이름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만, 서로에 있어서 정말로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어제 저도 이렇게 페이스북으로 연결되어 있는 <친구 목록>을 좀 봤습니다. 저는 그렇게 많은 편에 속하지 않습니다만, 진정으로 내 친구, 내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이와 같은 거리는 개념적인 거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아무리 떨어져 있더라도 인터넷을 통해서 언제든지 연결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과거에 비해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개념적인 거리가 가까워졌습니다만, 서로간의 관계는 오히려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념적인 거리가 그렇다고 한다면, 반면이 그러면 물리적 거리는 어떨까요? 예, 물론 그렇습니다. 물리적 거리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옛말에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고 했습니다. 이는 물리적 거리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웃들과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졌나요?


예, 가까워졌습니다. 특히 큰 도시일수록 과거에 비해 물리적으로는 너무나도 가까워졌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무엇입니까. 바로 아파트입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이 아파트를 선호하는 경향이 대단히 큽니다. 제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뉴스를 보니까 서울 강남의 신축 아파트 분양 경쟁률이 최고 510대 1이었다고 합니다.

510대 1……이건 정말이지 경쟁률이라기보다는 로또에 가깝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몰리겠습니까. 물론 그만큼 그 아파트에서 살고 싶기 때문도 있겠습니다만, 그 외에도 그것은 그야말로 로또. 분양 받기만 하면 가격이 몇 배나 뛸 것이다……라고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너도나도 몰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 갈 때를 보면 비행기에서 이렇게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아파트 단지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아……이제 한국이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일본에도 아파트 단지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곳곳에 몰려있는 모습은 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살고 있을 시기에 한 때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아파트만큼 이웃과의 거리가 적어도 물리적으로 가까운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웃과 벽 하나차이입니다. 그것도 좌우뿐인가요? 위층과 아래층도 역시 바닥 하나 차이입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가까운 이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요? 가깝나요? 아니요. 가깝기는요. 그 이웃간의 거리는 대단히 멉니다. 이름은 고사하고 어떤 사람이 사는지 모릅니다. 아니, 알 필요도 없어요. 물론 알게 될 때도 있습니다. 어떨 때냐 하면, 좋은 일이 있을 때요? 아니요,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알게 됩니다. 옆집에서 복도 통로에 무슨 어떤 물건을 갖다 놔서 통행에 불편을 겪는다거나, 밤새 무슨 음악을 틀어놓고 잠 못 자게 군다거나 하면, 서로의 얼굴을 알 수 있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다면 서로 누가 누군지, 누가 언제 이사 오고, 누가 언제 이사 갔는지, 심한 경우에는 옆집에 사는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을 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아파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만나 뵌 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 분은 부동상 관련 사업을 하시는 분이신데, 이 분은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아파트에 사는지 단독주택에 사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 아파트라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의 정신을 이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아파트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느낀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웃과의 단절, 교제의 단절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악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옛날에도 이웃간의 다툼이야 있었지요. 싸우고 코피도 터지고 그랬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처참하게 집단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그것도 동년배들끼리 1대1로 싸우거나 한 것이 아닌, 여고생 여럿이 여중생 하나를 그렇게 피범벅이 되도록 두드려 패고 했던 것은 익히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웃이겠습니까.

이는 안타깝게도 비단 교회 밖에서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은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도 수가 늘어나면 교회 안에서도 이웃이 늘어갑니다. 구역 식구들이 늘어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성도 안의 교제가 늘어가고, 그야말로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나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내 이웃이 늘어가면 늘어갈수록, 물리적으로나 개념적인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하물며 주님을 믿는다는 우리조차도 이웃간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교회에 보면 믿음 좋다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간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어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저는 이 원인은 어쩌면 성경말씀의 오해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떤 성경말씀을 오해하였느냐 하면, 바로 마태복음 22장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5절~4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そして、彼らのうちのひとりの律法の専門家が、イエスをためそうとして、尋ねた。「先生。律法 の中で、たいせつな戒めはどれですか。」そこで、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心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知力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せよ。』これがたいせつな第一の戒めです。『あなたの 隣人をあなた自身のように愛せよ。』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たいせつです。律法全体と預言者とが、この二つの戒め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 구절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이를 쉽게 말하자면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그렇게 이해를 한다면, 그렇다면 이 구절은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마태복음 5장을 봅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2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여기서 예물을 제단에 드린다는 것은 예배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우리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면, 이 말씀은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있을 것 같다면, 일단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형제와의 관계를 해결하라고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잖아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 이웃 간의 문제가 생각났다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세요? 예물을 드리다가 말고, 어서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난 다음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뭐예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언제는 이랬다가 언제는 저랬다가 하고 말을 바꾸셨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바로 마태복음 22장 39절 전반부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9절 전반부를 다시 한 번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たいせつです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 앞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고, 이 말씀 다음에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는 말씀은 이 두 가지 계명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과연 뭐가 같다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공동번역성경이 참 친절하게 번역되었습니다. 공동번역판에서는 마태복음 22장 39절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즉,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둘째 계명도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첫째 계명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사랑은 필수이고 이웃 사랑은 무슨 선택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계명을 두고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강령이라는 말씀은 즉,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바로 이 두 가지 계명,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 주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너무나도 두꺼워요.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십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계명도 많아요. 그러면 어떡해 해요?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을 또 봅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에는 다음과 같기 기록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律法全体を守っても、一つの点でつまずくなら、その人はすべてを犯した者となったのです。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찬송을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는 것,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주일예배도 드립니다. 새벽기도 수요예배도 드립니다. 철야예배도 드립니다.

하지만 그런데 뭐가 빠졌냐 하면 이웃 사랑이 빠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는 율법의 절반만 지킨 것이 되나요? 아니요.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라고 하면 믿음이 좋기로 소문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믿음을 지키려고 힘썼습니다. 예, 그렇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사랑은 있었는지 모르나 이웃 사랑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안식일에 질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안식일에 허기를 달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손가락질을 해댑니다.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행동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무슨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는 것도 유분수지, 감히 하나님의 독생자, 성자 하나님한테 지금 믿음이 부족하다고 가르치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2장 7절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わたしはあわれみは好むが、いけにえは好まない。』ということがどういう意味かを知っていたら、あなたがたは、罪のない者たちを罪に定めはしなかったでしょう。

이 말씀은 호세아서의 구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호세아 6장 6절을 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わたしは誠実を喜ぶが、いけにえは喜ばない。全焼のいけにえより、むしろ神を知ることを喜ぶ。

이 인애와 자비의 마음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병자와 죄인들을 보시고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우리가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믿기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나를 사랑하라. 그러면 내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던가요?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을 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しょう。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もし互いの間に愛があるなら、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すべての人が認め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비난합니까. 우리가 이웃을 비판합니까. 그것은 오늘 바리새인들이 했던 것처럼 어쩌면 예수님을 비난하고 예수님한테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목회자나 교인들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나요? 저 사람들은 참 믿음이 좋다고 칭찬하던가요? 아니요, 오히려 기독교가 아니라 <개독교>라고 욕합니다.

하나님 사랑도 중요하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렇잖아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인애와 자비를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바라본다면 미워하는 마음, 증오의 마음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은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모셔드린다는 것이요,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모셔드린다는 것은, 우리 마음 안에 천국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인애와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96회 다윗의 신앙고백 →

← 제94회 주님이 주시는 짐

 

이카호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