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회 그 길이 정답입니다
2018년 4월 29일 설교

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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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6장 22절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 길이 정답입니다” その道が正解です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의 인생은 어땠습니까.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까. 여기서 여한이 있냐 없냐 하는 것은 몇 살까지 살았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인생을 마치고 예수님 앞에 서게 된다면, 예수님으로부터 마태복음 25장 21절에 있는 말씀을 들을 자신이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25장 21절이 궁금하신가요?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その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あなた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私はあなたにたくさん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 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우리가 이 생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정말 잘했다. 너는 정말 착하고 충성된 종이었다. 내가 너한테 맡긴 일을 얼마나 잘 감당했는지 모른다. 자, 어서 와서 천국 잔치에 참여하자……라는 말씀을 들을 자신이 있느냐 하는 것이죠.

아니면 또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야, 너는 어떻게 내가 맡긴 일을 하나도 감당하지 못했니. 내가 너를 위해서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지 않았니. 그것도 모자라서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내 목숨까지 바쳤는데, 너는 어쩌면 너만 생각하고, 너 좋은 일만 하고는, 내가 시키는 것과 반대 일만 하다가 왔니.”

이런 말씀을 들으면 어쩔까 하는 불안감, 혹시 안 가져보셨습니까.

그런 불안감이 있으면 잘 해야 할 텐데, 이게 참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정말 모세나 다윗처럼 항상 하나님께 물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해주시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인생은 그런 경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게 좋은 것인지 저게 옳은 것인지, 가끔가다 보면 어떤 게 하나님의 뜻인지 분간이 잘 안 갈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17번 국도를 달리면서 제 머리 속에는, 아, 정말 이 길이 맞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자동차로 달리고 있는 길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나비를 찍어보면 나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 있어서는 나비처럼 명확하게 보이지 않을 때가 많지요.

그래서,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길이 맞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백 번 다시 생각을 해보아도, 아무리 기도를 해보아도 내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틀린 길 같지가 않아요. 하나님 앞에서 잘못 가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요.

그런데 현실은 어때요? 나 자신이 놓여있는 여건이 그리 좋지만은 않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이라면, 그 길을 간다고 한다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여건이 갖춰져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벌써 일본에 온지도 3년이 되어 가는데, 적어도 눈으로 본다면 교회도 성장한 것 같지 않습니다. 성도 수가 늘어난 것 같지도 않아요. 넓은 주차장은 텅 비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부흥을 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문닫지 않고 이카호중앙교회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보면, 어쩌면 다른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그야말로 군마현의 7대 불가사의가 아닐까 합니다.

반면에 다른 곳은 어떻습니까. 일본 여기저기에는 큰 절들이 있고, 바로 옆에는, 이 또한 아무리 생각해도 성경대로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그 곳이 있는데, 거기는 주일마다 차를 세울 곳이 없을 정도로 미여 터집니다. 인터넷을 보면 이단이다 삼단이다 하는 교회만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 저런 문제가 있다고 하는 교회들도 보면 다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걸 보면 참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예전에는 집안 살림에 보탬이 좀 되어보려고 다른 직장도 다녀보기도 했습니다만, 이것이 하나님 마음에 안 드셨는지, 그 길을 완전히 막아버리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는 아르바이트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즘은 정말이지 운전을 하고 가다 보면 <이랏샤이마세!>하고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젊은 학생들을 보면, 참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그 친구들은 그래도 돈을 벌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길조차 막히니까 참 답답합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또 뭐겠어요? 아, 이 길이 정말 맞는 것일까.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정말 옳은 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일까……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 아니, 그렇다면 돈은 그렇다 치더라도 비자문제나 이런 건 좀 착착 해결해주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하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합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주님, 이 길이 맞습니까. 주님, 내가 지금 나도 모르는 무슨 잘못 때문에,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서 전혀 엉뚱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그런 기도를 드려보았더니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길,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얼마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갔던 길일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구약에서 노아를 한 번 봅시다. 그는 적어도 하나님의 명을 따라 몇 십 년 동안이나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배의 크기는 지금 단위로 본다면 길이가 135미터, 폭이 22.5미터, 높이가 13.5미터나 되는 큰 배를 완전히 수작업으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래요.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방주를 어디에 만들어야 했을까요. 만약에 낮은 곳에 만들었다면, 아무리 물이 차서 방주가 떠오를 정도가 되었다 하더라도 전후좌우에 가로막힌 장애물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겠지요.

그리고 또 배에 대해서 조금 지식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아시겠습니다만, 배들에 있어서 무서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암초입니다. 암초라는 것은 물속에 있는 돌이나 바위 같은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 배가 부딪히거나 걸리거나 한다면 배가 파손이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배는 얕은 곳에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물이 차 올라서 방주가 떠다녀도 주변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을 정도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방주를 상당히 높은 곳에서 지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조선소를 짓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짓겠습니까. 그렇죠. 바닷가에 지어야죠. 산꼭대기에 짓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있는 군마현은 바다가 없습니다. 이런 곳에 조선소를 지어요? 그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런데 바다가 없을 뿐만 아니라 높은 산 위에 산을 짓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오늘 밤에 잠을 잤더니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어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이 바다도 인접해 있지 않은 군마현 어느 산꼭대기에 길이 130미터가 넘는 배를 지으래요. 그러면 순종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처음에는 시작할 수 있겠지요. 아니, 분명히 하나님께서 나한테 말씀하셨는데요. 그래도 내가 교회에 다닌 게 몇 년인데, 하나님께서 직접 나한테 말씀해주셨는데, 이런 영광이 어디 있어요. 아멘! 할렐루야!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시작할지도 모르겠지요. 그런데 그게 기간이 얼마요? 무슨 1~2미터짜리 보트를 만드는 것도 아닌 130미터 이상이나 되는 배를 손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도 수 십 년 동안 말입니다.

노아가 배를 짓는 동안 하나님이 매일같이 옆에 서서 깃발 흔들면서 응원하셨대요? 나무토막 하나라도 가져다 주셨답니까? 아니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시고는, 그 다음에 말씀하신 것은 방주가 완성된 다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를 성경은 어떻게 기록할까요?

참, 이럴 때보면 매정합니다. 적어도 수 십 년 동안의 세월을 성경은 단 한 구절로 묘사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창세기 6장 22절입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ノアは、すべて神が命じられたとおりにし、そのように行った。

이 한 구절. 속에 그 동안의 모든 노아의 믿음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동안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1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1년에 한 번 오셔서, 오, 그래, 잘하고 있구나……이런 말씀을 해주신 것도 아니에요.

그렇다면 노아는 이 세월 동안 어땠을까요. 어려움이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명하신 길이니 방주를 짓기 위해서 나무를 자르는 것도 쉽게 할 수 있었을까요? 수 십 그루, 수 백 그루를 운반하는 일도 힘들지 않았을까요? 아니요. 육체적으로도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노아가 하루 이틀도 아닌, 최소한 수 십 년 동안 배를 지으면서 주변의 친척이나 이웃이 뭐라고 했겠어요. 이봐, 자네 지금 뭘 하는 거야. 배를 지으려면 바다에 짓든지 해야지, 산꼭대기에 배를 짓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그러면 노아는 뭐라고 그랬을까요. 아니야. 이제 조금 있으면 비가 내려서 이 세상이 모두 잠기고 말 거야. 그러니까 자네도 어서 함께 배를 짓고, 마지막 날에 살아남읍시다.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그것도 한 두 번도 아닌 수 십 번, 수 백 번 그랬을 것입니다.

당시 노아의 심정이 어땠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천국 가서 한 번 물어보려고 해요. 그 때 심정이 어땠는지 말이에요. 하지만 대충 짐작은 갑니다. 이는 제 상상이 아니라 성경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昔、ノアの時代に、箱舟が造られていた間、神が忍耐して待っておられたときに、従わなかった霊 たちのことです。わずか八人の人々が、この箱舟の中で、水を通って救われたのです。

수 십 년 동안 노아가 방주를 지으면서 이웃 친척들에게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저와 함께 배를 지읍시다. 그리고 이 배가 완성되면 이 배 안에 들어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아니면 죽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노아가 오랜 세월 동안 전했을 복음의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어요. 마지막 날에는 동물 짐승들까지도 노아의 말에 따랐으나, 그 이웃들을 보면 아무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없었고, 방주에 탄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 뿐이었습니다.

그렇죠. 물론 노아의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 노아의 방주 문이 닫히기 전에 비가 좀 부슬부슬 내리기라도 했으면, 어쩌면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성경에 의하면 우리가 요즘 익히 경험하는 듯한 비는 당시까지만 해도 한 번도 내린 적이 없었습니다.


창세기 2장 5절~6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地には、まだ一本の野の灌木もなく、まだ一本の野の草も芽を出していなかった。それは、神である主が地上に雨を降らせず、土地を耕す人もい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ただ、水が地から湧き出て、土地の全面を潤していた。

이 상태가 아마도 노아 때까지 이어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그 사람들은, 뭐? 비? 하늘에서 그 많은 물이 땅에 떨어진단 말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죠.

그러면 노아는 어땠을까요. 허허어! 아닐세!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니까! 라고 하면서도, 어쩌면 몇 년이 지나고,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면서 가끔은 햇빛이 쨍쨍 비치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물이 하늘에서 쏟아져서 온 지면을 다 덮는다고 하셨는데……그게 정말일까……산꼭대기에 이 큰 배를 짓고 있는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짓일까…….” 그런 생각이 안 들었을까요. 아니요. 몇 번이고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방주가 완성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가족들이 모두 방주 안으로 들어가자, 하나님께서는 방주 문을 닫으시고, 그 전에는 가랑비조차 내리지 않았으나 하늘의 샘들이 터지더니 사십 일 동안 억수 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지만 우리 눈에는 안 보여요. 아뇨. 보이긴 하죠. 하지만 그게 잘못 보일 때도 많다는 것이 흠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서 번창하고 평화롭게 잘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 하나님이 친히 명해서 간 땅인데, 그러면 거기서 어려움이 없이 축복이 넘치고 부족한 것이 없는 곳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을 살펴보기 전에 한 가지 묻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땅이 있었어요. 거기에 순종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발생했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거기에 있어야겠습니까, 아니면 내 생각대로 더 좋은 대로 이동해야겠습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렇죠. 좋은 곳으로 가야죠. 장사가 안 되요? 더 목이 좋은 곳으로 옮겨야죠. 교회가 안 되요? 더 사람이 많은 곳으로 옮겨야죠.

아브라함도 역시 그랬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봅니다. 창세기 12장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さて、この地にはききんがあったので、アブラムはエジプトのほうにしばらく滞在するために、下って行った。この地のききんは激しかったからである。

성경 특히 구약에서 등장하는 애굽은 <세상> 또는 <세상적인 방법>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조금 어려운 일이 생겼다고 하나님의 명이 아니라 세상을 의지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이랬다가 어떻게 됩니까. 자칫 자기 부인까지도 빼앗길 뻔하는 수치를 당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떠났던 조카 롯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이 결별을 하기 위해서 말합니다. 롯한테 말합니다.

창세기 13장 9절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全地はあなたの前にあるではないか。私から別れてくれないか。もしあなたが左に行けば、私は右に行こう。もしあなたが右に行けば、私は左に行こう。」

우리가 이제 헤어져야 할 텐데 그 선택권을 너한테 주겠다. 네가 이쪽으로 가면 내가 저쪽으로 가고, 네가 저쪽으로 가겠다고 한다면 나는 이쪽으로 가겠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롯한테 제안을 합니다.

그러자 롯이 눈은 들어 앞을 바라봅니다. 그랬더니 어땠대요?

창세기 13장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ロトが目を上げて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見渡すと、主がソドムとゴモラを滅 ぼされる以前であったので、その地はツォアルのほうに至るまで、主の園のように、またエジプトの地のように、どこもよく潤っていた。

그래서 결국 롯은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좋아 보이는 대로 소돔과 고모라를 택합니다. 하지만 거기가 어떤 땅입니까. 예, 우리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죄악으로 물들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을 받게 되는 땅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아브라함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은 건지지만, 당시까지 그가 모아두었던 모든 재산들을 다 날려버리게 되고 말지요.

더 심한 경우를 볼까요? 룻기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룻기 1장 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さばきつかさが治めていたころ、この地にききんがあった。それで、ユダのベツレヘムの人が妻とふたりの息子を連 れてモアブの野へ行き、そこに滞在することにした。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각 지파에 따라 분깃을 나누어가진 상황에서는 그 땅을 다른 지파 사람이나 이방인들에게 매매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시적으로는 대여할 수는 있었지만 희년이 되면 또다시 되돌려주어야 하는 것, 그러니까 영원히 지켜야 할 하나님께서 주신 재산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흉년이 들었다고 포기하고는 이방인의 땅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잘못한 사람 이름 적어놨어요.

룻기 1장 2절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その人の名はエリメレク。妻の名はナオミ。ふたりの息子の名はマフロンとキルヨン。彼らはユダのベツレヘムの出のエフラテ人であった。彼らがモアブの野へ行き、そこにとどまっているとき、

하나님께서 주신 길에서 떠나고는 어디 잘 살게 되었나요? 아니요, 가장이었던 엘리멜렉이 죽고, 그의 두 아들마저도 죽게 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라, 어디로 가라……라고만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에 보면,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彼らといっしょにいるとき、イエスは彼らにこう命じられた。「エルサレムを離れないで、わたしから聞いた父の約束を待ちなさい。

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때로는 이처럼 기다리는 것도 하나님의 뜻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잠시 들었던 기근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다면 자신의 부인을 빼앗기는 수치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요, 그의 조카 롯도 자기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다면 멸망의 땅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지도 않았을 것이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흉년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았더라면 자신과 자신의 두 아들이 목숨을 잃는다고 하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그렇다고 꼭 지리적인 것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지킨다는 것이 세상적으로는 손해를 입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고, 어리석게 보일 때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지요.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그렇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가고 있는 믿음의 길이 불안하십니까. 분명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가는 길인데, 외로우십니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길이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이라면, 그 길이 믿음의 길이라면 그 길이 정답입니다. 그 길은 노아나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갔던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나 세상적인 지식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준행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마침내 노아가 받은 축복,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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