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하나님의 용사 ♬
2008년 06월 08일 글들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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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성가대를 섬길 당시 주보에 실었던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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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여성차별의 근원을 보면 동양은 유교에서 왔고 서양은 기독교에서 왔다.”
어느 믿음이 없는 친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유교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더라도 과연 이 말이 사실일까 하고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기록할 때를 비롯하여 구약 역대상 1장부터 나오는 계보나 신약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등에서 나오는 계보는 모두 남성 중심이며, 예컨대 모세의 지도 하에 애굽을 탈출한 사람들을 기록할 때에도 출애굽기 12장 37절을 보면 개정개역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장정(壯丁)’은 곧 성인 남성들(men)을 가리킵니다. 또한 산상수훈을 하실 때에도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눅 9:14)” 등 역시 신약에서도 인구에 여성이나 아이들을 포함시키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여기서 남성 성인만을 계수하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에덴동산에서 의 아담과 하와 문제도 있겠으나 보다 실리적인 측면에서 접근해가는 모습을 민수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애굽을 탈출하고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민족들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가올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 대비하여 모세를 통해 인구조사 명령을 내리십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민 1:2~3)
당시 그 민족의 힘은 곧 전쟁에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의 수였기에 물리적인 힘이 남성보다 약했던 여성이나 미성년자들의 수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할 때의 기록을 보면 상세하기 나와 있는데 역대상 11장 10절에서 12장에 이르기까지 그를 도왔던 용사들의 이름이 상세하게 나와 있으며, 교만에 빠진 다윗이 요압 장군에게 인구조사를 명령했을 때에도 역시 ‘칼을 뺄 만한 자’만을 보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다릅니다. 지금은 한 개인의 능력이 물리적인 힘으로 평가되는 원시 문명사회가 아니며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구약 사사 시대에도 여성인 드보라가 유대민족을 다스렸으며 에스더나 룻,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도 여성이 다섯(다말, 라합, 룻, 밧세바(우리야의 아내), 마리아)이나 등장하고 예수님을 따랐던 막달라 마리아,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 침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사도 바울의 부탁을 받아 신약성경의 핵심이라고 일컬어지는 로마서를 전달하는 중요한 사명을 완수한 뵈뵈 등 수많은 여성들이 성경에서 활약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계수하라고 하실까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관심 있는 사람은 ‘용사’였으며 현대사회에서는 바로 기도의 용사를 찾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John Knox)는 “기도하는 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는 말씀처럼 기도에는 성별과 나이와 귀천이 없으며 기도로 무장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용사일 것입니다.
옛날에도 단순히 힘이 세거나 근육이 많은 사람이라고 모두 용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비싸거나 성능이 좋은 장비라고 하더라도 실제 전투에 나가서 싸울 수 없다면 무용지 물이듯, 용사라면 실제로 전쟁터에 출전하여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과 싸워야 할까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9)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요 7: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성경에서는 신•구약에 걸쳐서 “하나님의 논리와 세상 논리는 다르다”는 점을 일관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이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도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수 천명을 먹일 수도 있고 병자를 치료할 수도 있으며 죽음에서 부활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세상과 싸워 이기셨으므로 우리도 또한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으며 이는 십자가 보혈의 권세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4~6)
세상과 싸워 이긴다는 것이 어떤 사람과 물리적으로 싸워 이기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 논리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용사입니다. 아무리 현실적으로 논리적으로 경제적으로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난이 다가오더라도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의지하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이기는 용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용사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주님이 나 같은 죄인까지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면서까지 용서해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용서하는 것 또한 주님께서 원하시는 용사의 모습일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칠 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연약함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며 성령님을 의지하여 세상과 싸워 이길 힘을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크고 은밀한 것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우리의 길을 열어주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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