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를 위한 증명 ♬
2008년 05월 25일 글들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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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성가대를 섬길 당시 주보에 실었던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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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추리소설을 보면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알리바이’입니다. 이는 라틴어인 alius ibi(다른 장소에)에서 유래하는데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현장부재증명’이라고 하여, 어떤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범죄가 일어난 시간에 범죄현장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범죄발생시 현장부재증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소설에서는 범인이 이를 조작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위증을 하게 만들거나 증거자료들을 위조 ․ 변조하여 어떻게든 증명을 하려하고 탐정이나 경찰들은 이 수수깨끼를 풀어가는 재미를 그려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범죄가 일어난 현장에 없었다면 그는 범죄를 저지를 수 없다’는 명제가 성립할 때에만 알리바이 증명이 필요하며, 만약 현장에서 시간을 조작할 수 있는 물증들(예를 들어 시한폭탄 같은)이 나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요.
그런데 가끔 회사나 학교에서 퇴근할 때 평소와는 달리 문득 사람들이 많지 않은 한적한 공원을 산책한다거나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걸어갈 때 “내가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있다는 사실을 누가 증명해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범죄가 일어났을 때 피해자에게 나쁜 감정을 갖거나 가질 수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먼저 용의선상에 오릅니다. 범인이 아니더라도 의심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피곤하며 겉으로는 참고인 자격으로 신문을 당하거나 임의동행 형식으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기도 하게 되지만, 아무튼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리 유쾌한 것이 아니고, 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고까지 합니다.
이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무래도 증인들의 증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예컨대 서울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사건 발생 추정시간이 오후 6~8시인데, 바로 그 시간에 피의자가 부산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혐의를 벗게 됩니다. 물증 중에서는 날짜와 시간 그리고 장소 등을 입증해주는 물건들인데 가장 확실한 것은 가게 영수증 같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증인’이나 ‘증거’가 항상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범행장소에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 또 다른 증인, 즉 목격자가 나타나면 무죄인 자신은 겉잡을 수 없는 공경에 처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증인’으로서의 모습을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세상에 대한 심판을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할 때처럼 하시고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하고 축복하셨으며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시며 저주를 내립니다.
여기서 보면 축복을 받은 오른편에 있던 자나, 저주를 받은 왼편에 있던 자 모두 그 사실을 본인들은 모른다고 주장하지만 언제 어느 때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증인 중의 증인이 되시며 모든 심판을 공의롭게 내리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의로운 것이 있어서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오른편에 설 수 있을까요. 어느 누가 그 순간에 자신은 의롭다고, 아무런 죄가 없다고 하나님께 주장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매우 의롭고 선하게 하여 치장하고 꾸밀 수는 있으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우리는 마치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지적하신 것과 같이 “회 칠한 무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세상 재판에서는 자기 자신이나 그것도 부족하면 변호사를 선입하여 자신의 주장이 옳고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다릅니다.
누가복음 18장 10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갔는데 바리새인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 치장하여 본인의 의로움을 자랑하지만, 세리는 주님의 제단 앞에까지 차마 가지도, 눈을 들어 차마 하늘도 보지 못한 채 그저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다고 하는데, 바리새인보다도 세리가 더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예수 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보지 못한 곳에 있을 때 우리는 모든 사실을 숨기려 하기도 하고, 또한 죄를 짓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변론해주어야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 습니다. 그러나 구차한 변명이 아니라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과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넘치는 은혜와 한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모든 죄 에서 건져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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