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2015년 12월 13일 설교

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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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 1절~6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입니다만, 그 목사님도 다음 주 설교를 시편 23편으로 하고 제목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인쇄소에 전화를 하셨습니다. 거기는 큰 교회였기 때문에 주보를 인쇄소에 맡겨서 매 주일마다 교인에게 배포하는 것이었습니다만, 그 날도 목사님이 전화를 걸어서 주일 찬송과 성경구절, 그리고 설교제목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설교제목을 말씀하실 때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그 인쇄소 주인이 하는 말이, “설교 제목이 그게 다예요?” 그러더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게 다예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아침에 주보를 받아들어보시고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설교 제목에 뭐라고 적혀 있었겠어요? 제목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게 다예요.’라고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이게 분명 잘못 찍힌 것이긴 합니다만, 이 목사님이 그 제목을 보고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성경이 신구약 합쳐서 66권. 1,189장 31,102절 모두 다 통틀어서 이 세상을 어떤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이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보다 더욱 명쾌한 답은 없을 것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다윗이 어떨 때 이런 시를 지었을까요. 우리도 기쁜 일이 있을 때,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할렐루야 소리를 높이 외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어디가 아프거나 아니면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기대했던 일이 잘 안풀리거나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실망하고 때로는 원망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 시편 23편을 지을 때는 어땠을까요. 배부르고 등 따습고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행복에 충만했을 때였을까요? 많은 신학자들에 의하면 다윗이 이 시편을 지을 때에는 그와 반대로 오히려 매우 힘든 경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 시기는 바로 자기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다윗이 모래바람 부는 광야로 쫓겨갔을 때였다고 합니다. 이 시편 23편은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하지만, 인간적으로 볼 때는 어땠어요? 보좌에서 쫓겨나서,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들한테 쫓겨나서 모진 광야로 처량하게 도망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럴 때도 다윗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 보면,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それから、彼を退けて、ダビデを立 てて王とされましたが、このダビデについてあかしして、こう言われました。『わたしはエッサイの子ダビデを見いだした。彼はわたしの心にかなった者で、わたしのこころを余すところなく実行する。』”

개역한글에는 마음에 합한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다윗을 보고 하나님 마음에 맞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한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점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기쁘고 좋은 일이 있다면 기쁘고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 집 벤도 맛이 있는 것을 주면 좋아할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 좋은 것을 주면 헤헤 하고 좋아하다가도, 조금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삐지고 화 내고 실망하고 그런다면 그야말로 믿지 않는 사람과 아무 것도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정말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살펴볼까 합니다.

창세기 11장 31절에서 32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テラは、その息子アブラムと、ハランの子で自分の孫のロトと、息子のアブラムの妻である嫁のサライとを伴い、彼らはカナンの地に行くために、カルデヤ人のウルからいっしょに出かけた。しかし、彼らはカランまで 来て、そこに住みついた。テラの一生は二百五年であった。テラはカランで死んだ。”

우리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큰 복을 받았습니까.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その後、主はアブラムに仰せら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生まれ故郷、あなたの父の家を出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しよう。あなたの名は祝福となる。”

참 어마어마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약에 이런 말을 하셨다고 생각해보세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 조건이 뭐죠? 그렇습니다.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갈 것”을 하나님께서 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 혼자 그냥 가라고 하시나요?

창세기 17장 4절에 보면,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わたしは、この、わたしの契約をあなたと結ぶ。あなたは多くの国民の父となる。”

여기서 언약, 즉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절대로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어기지 않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도 뭐라고 하셨나요?

요한복음 14장 18절에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捨てて孤児にはしません。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戻って来るのです。”


마태복음 28장 20절에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また、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命じておいたすべてのことを守るように、彼らを教えなさい。見よ。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ます。」”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든지 우리를 혼자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 점을 성경은 신구약 통털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창세기 11장 31절에서 32절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テラは、その息子アブラムと、ハランの子で自分の孫のロトと、息子のアブラムの妻である嫁のサライとを伴い、彼らはカナンの地に行くために、カルデヤ人のウルからいっしょに出かけた。しかし、彼らはカランまで 来て、そこに住みついた。テラの一生は二百五年であった。テラはカランで死ん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셨고, 아브라함은 이에 순종함으로써 축복을 받았습니다만, 그 아버지인 데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 아버지도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라고 기록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우르에 살다가 가나안 땅에 가려고 했는데, 도중에 하란 땅에 정착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데라가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신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시기 전에 데라한테 먼저 “가나안으로 가라”라고 명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그런데, 데라는, 그 말씀에 순종해서 처음에는 떠나기는 했지만, 가나안까지는 안 가고 도중에 하란 땅에 머물게 되었기 때문에 예정되었던 축복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부분은 성경에 나오는 말씀은 아닙니다만, 보기에 따라서는 그럴 듯한 주장입니다. 아버지도 아들도 가나안 땅으로 향했지만 아브라함은 결국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는 크나큰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가나안 땅을 향하던 아버지 데라는 이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 차이가 무엇일까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지막까지 우리의 믿음을 지키느냐에 대한 부분입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갑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일입니까. 그러나 요셉은 약관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강국인 애굽의 2인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 자리에 앉게 됩니다.
다윗은 또 어떤가요. 어린 나이에 갑자기 사무엘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고생길이 시작됩니다. 골리앗을 무찌른 것까지는 좋았으나 당시 이스라엘 왕이었던 사울의 눈밖에 나서 결국 약 1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사울에게 쫓기게 됩니다. 이것도 또한 무슨 날벼락입니까.
이런 과정에서 만약에 도중에, 요셉이 “아휴, 됐어요. 축복은 무슨 축복. 그냥 가늘고 길게 그저그렇게 살다가 죽을래요. 고생하기 싫어요.”라고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요셉이 있었을까요?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언제 자기 왕 시켜달라고, 왕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 있어요? 그래서 도중에 다윗이, 아이고, 됐습니다. 왕은 무슨……축복이고 뭐고 그냥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으면 좋아요.”라고 했었더라면 역시 이스라엘과 유대를 40년 동안 다스렸던 다윗 왕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봤더니 그 창고에는 너무나도 많은 축복들이 가득 차 있었더랍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천사한테,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미처 받지 못한 축복들이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가진 것이 없어서 우리에게 축복을 안 주시겠어요? 아니면 하나님이 구두쇠라서 우리에게 축복 주시기를 아까워하시겠어요?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고, 요셉을 총리 자리에 앉게 하고 다윗을 왕이 되게 해서 큰 축복을 내리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도 큰 축복을 내리시기를 원하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가나안 땅으로 가야만 했고, 요셉이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다윗이 왕이 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고난과 역경을 거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중에 포기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조류학자가 새가 알에서 나오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새가 알에서 태어나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과정을 보면 아주 열심히 온 힘을 다해서 껍질을 깨고 나옵니다. 그런데 어미새는 그것을 도와주지 않고 보고만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은 그 조류학자가 알에서 나오는 새를 돕기 위해서 손으로 그 껍질을 깨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새가 고맙다고 하던가요? 아니요. 껍질을 깨주니까 오히려 나와서 죽어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는 태어나고 알에서 나오는 과정에서 껍질을 깨면서 근육에 힘이 붙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도와준다면 근육에 힘이 붙지 않고 흐물흐물해져서 결국 죽고 마는 것입니다. 어미새가 알에서 나오는 새끼를 도와주지 않는 것은 새끼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견뎌야 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기를 보면 우리는 많은 위로를 얻습니다. 욥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대요?

욥기 1장 1절에 의하면,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ウツの地にヨブという名の人がいた。この人は潔白で正しく、神を恐れ、悪から遠ざかっていた。”

세상에 이처럼 찬사를 받을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어마어마한 고난을 겪습니다.
욥기 1장 13절에서 22절을 보면,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ある日、彼の息子、娘たちが、一番上の兄の家で食事をしたり、ぶどう酒を飲んだりしていたとき、使いがヨブのところに来 て言った。「牛が耕し、そのそばで、ろばが草を食べていましたが、シェバ人(じん)が襲 いかかり、これを奪い、若い者たちを剣(つるぎ)の刃(は)で打ち殺しました。私ひとりだけがのがれて、お知らせするのです。」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他のひとりが来 て言った。「神の火が天から下(くだ)り、羊と若い者たちを焼き尽くしました。私ひとりだけがのがれて、お知らせするのです。」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また他のひとりが来て言った。「カルデヤ人が三組になって、らくだを襲 い、これを奪い、若い者たちを剣の刃で打ち殺しました。私ひとりだけがのがれて、お知らせするのです。」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また他のひとりが来て言った。「あなたのご子息や娘 さんたちは一番上のお兄さんの家で、食事をしたりぶどう酒を飲んだりしておられました。
そこへ荒野(あらの)のほうから大風(おおかぜ)が吹 いて来て、家の四隅(よすみ)を打ち、それがお若い方々の上に倒れたので、みなさまは死なれました。私ひとりだけがのがれて、あなたにお知らせするのです。」
このとき、ヨブは立ち上がり、その上着を引き裂き、頭をそり、地にひれ伏して礼拝し、そして言った。「私は裸で母の胎(たい)から出て来 た。また、裸で私はかしこに帰ろう。主は与え、主は取られる。主の御名はほむべきかな。」ヨブはこのようになっても罪を犯さず、神に愚痴をこぼさなかった。

이건 무슨 엎친 데 덮친 격도 아니고, 설상 가상도 아니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고난이 순식간에 닥쳐옵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요. 하지만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범죄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 질병까지 앓게 됩니다.

욥기 2장 7절에서 8절을 보면,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サタンは主の前から出て行き、ヨブの足の裏から頭の頂(いただき)まで、悪性(あくせい)の腫物(しゅもつ)で彼を打った。ヨブは土器のかけらを取 って自分の身をかき、また灰の中にすわった。”

이 모습을 본 욥의 처가 뭐라고 하나요?
다음 절에 보면,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すると彼の妻が彼に言った。「それでもなお、あなたは自分の誠実を堅く保つのですか。神をのろって死になさい。」”

누구는 이 말씀을 보고, 욥의 아내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것은 욥이 겪은 또하나의 저주라고 말합니다. ^^; 그렇다고 이 세상 모든 아내가 나쁘다고 하면 그것은 지나친 비약이죠.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사탄은 항상 우리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너 이 지경 이 꼴이 됐는데도 아직까지 하나님을 믿어? 아니야, 꿈 깨. 하나님은 너를 버렸어. 니가 어떻게 되든 하나님은 상관 안 해.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면 네가 이 지경이 되도록 놔두시겠니?” 이것이 바로 마귀 사탄의 술수입니다. 이 마귀는 분명히 아브라함의 귀에도 속삭였을 것이고, 요셉의 귀에도 속삭였을 것이고, 그리고 다윗의 귀에도 속삭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시편 23편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이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내 영혼을 보살피시고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해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내가 환난을 겪을 때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뭔지 알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야.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신다. 내 원수 앞에 나한테 상을 차려 주시고 나를 축복하여 주신단말이야. 나는 절대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살 것이다! 아멘!”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되신다고 합니다. 목자의 최대 임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목자가 관리하고 양을 보살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의 목자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의 목자, 나의 목자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나음을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목자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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