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친히 듣고 친히 보는 믿음
2015년 12월 20일 설교

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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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39절~42절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친히 듣고 친히 보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보면 한 지역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 라는 성읍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아닌 다른 지역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배척했었는데, 여러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해서 이 사마리아인들도 이방인으로 취급해서 아주 멸시해서 서로 말도 섞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 3절에서 8절까지 보면,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ヨハネの福音書 4章3節~8節
主はユダヤを去って、またガリラヤへ行かれた。しかし、サマリヤを通っ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それで主は、ヤコブがその子ヨセフに与えた地所に近いスカルというサマリヤの町に 来られた。そこにはヤコブの井戸があった。イエスは旅の疲れで、井戸のかたわらに腰をおろしておられた。時は六時 ごろであった。ひとりのサマリヤの女が水をくみに来た。イエスは「わたしに水を飲ませてください。」と言われた。弟子たちは食物を買いに、町へ出かけていた。


당시 유대 땅은 남쪽에 있고 갈릴리는 북쪽에 있었는데, 그 사이에 있는 지역이 바로 사마리아였습니다. 하지만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갈이 당시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인들을 기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에서 갈릴리 지역으로 갈 때에는 동쪽 요단강 쪽으로 빙 돌아서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사마리아를 지나서 갈릴리로 가는 코스를 택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조금 더 살펴보면 예수님이 그러셨던 이유는 단순히 귀찮아서, 아니면 무슨 시간에 쫓겨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도 분명히 구원 받을 영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이 사마리아 지역에 들어서셔서 수가라고 하는 성읍에 이르셨을 때 예수님께서 피곤하시니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더니 시간이 오후 여섯 시쯤이었다고 하고, 그 때 마침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왔을 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을 걸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구절인데 여기서도 은혜를 받을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에 예수님이 피곤하셨대요. 예수님이 누구신가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원리가 뭐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는 세 인격이 존재하지만 이 모두가 하나의 본질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도 하나님이요,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이요, 성령님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예수님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장 2절과 3절에서,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ヨハネの福音書 1章2節~3節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い。

라고 기록합니다. 그와 같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피곤함을 느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부분을 시사해줍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ピリピ人への手紙2章6節から8節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方なのに、神のあり方を捨てることができないとは考えないで、ご自分を無にして、仕える者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たのです。キリストは人としての性質をもって現われ、自分を卑しくし、死にまで従い、実に十字架の死にまでも従われたのです。

그리스도는 분명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인간이라고 하는 종의 형체로 오셔서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고난을 모두 겪으셨습니다. 진정으로 고난을 당하지 못한 사람은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어떤 심정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프랑스 루이 16세 당시에 그의 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어 굶주림에 허덕이는 민중들을 가리켜,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 본인이 사악했다기 보다는, 직접 어려움을 겪지 못했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겪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세요?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을 직접 겪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아실 수 있는 것이죠.

히브리서 2장 18절에는,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ヘブル人への手紙 2章18節
主は、ご自身が試みを受けて苦しまれたので、試みられている者たちを助け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のです。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마치 무슨 관광하듯이 정말 편안하게 이 세상에 오셔서 즐겁게 놀다만 가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고난과 시험을 당하셨는지 모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똑같이 시험을 받아가며 어려움을 겪는 우리들의 마음을 헤아리실 수가 있는 것이요,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것이라고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4장 6절 후반부에서 8절까지 보면,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ヨハネの福音書4章6節の後半から8節
そこにはヤコブの井戸があった。イエスは旅の疲れで、井戸のかたわらに腰をおろしておられた。時は六時ごろであった。ひとりのサマリヤの女が水をくみに来 た。イエスは「わたしに水を飲ませてください。」と言われた。弟子たちは食物を買いに、町へ出かけていた。

이것은 좀 여담입니다만, 이 구절을 두고 어떤 주석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여인이 예수가 있는 우물에 나온 시간이 유대시간으로 제 육시인데 우리의 시간으로 하면 낮 열두시이다. 이때는 햇볕이 가장 뜨거운 때여서 다니는 사람이 없다. 이 여인은 도덕적인 면에서 떳떳하지 못한 생활을 하는 신분이기 때문에 남의 눈을 피해서 정오경에 우물에 왔다.

저도 예전에 이런 내용의 설교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한국 주석에만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어로 된 홈페이지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이미 널리 퍼진 논리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유대시간대로 적혀 있어서 삼 시는 9시, 육 시는 12시, 구 시는 3시가 됩니다만, 요한복음은 로마식 시간대를 사용했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 여섯 시라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 시간 대와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온 시간은 대낮이 아니라 저녁 시간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이 퍼진 이유는, 무슨 나쁜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성경을 좀 더 드라마틱하게 해석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만, 그런 건 불필요한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 드라마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여인이 온 시간이 낮 12시가 아니라 오후 6시로 믿어야지만 구원이 있다든지 그런 것은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에 대한 말씀, 이 여인의 개인사에 대한 말씀, 예배에 대한 말씀, 그리고 4장 26절까지 많은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랬더니 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에 은혜를 받은 여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4장 28절에서 30절을 보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4章28節~30節
女は、自分の水がめを置いて町へ行き、人々に言った。「来 て、見てください。私のしたこと全部を私に言った人がいるのです。この方がキリストなのでしょうか。」そこで、彼らは町を出て、イエスのほうへやって来た。

자신이 받은 은혜가 넘치면 이것을 전하지 않고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대낮에 나왔든 저녁 때 나왔든 우물가로 나온 이유는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그 말씀을 들은 후에 어떻게 변했나요? 이제 여자는 물동이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니까,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스도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놀랍게도 그 이방 땅, 당시 유대인들은 상종하지도 않았던 사마리아 땅에서 무려 이틀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시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두 구절이 인상적입니다.

먼저, 4장 39절입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さて、その町のサマリヤ人のうち多くの者が、「あの方は、私がしたこと全部を私に言った。」と証言したその女のことばによってイエスを信じた。

그리고 4장 42절입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そして彼らはその女に言った。「もう私たちは、あなたが話したことによって信じ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自分で聞いて、この方がほんとうに世の救い主だと知っているのです。」
이 여인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예수를 믿었다고 했지만, 이틀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은 이제 그냥 믿는 게 아니라,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가 간접적으로 듣는 것과 직접적으로 듣는 것에는 차이가 많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것은 아담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에서 17절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て仰せ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取って食べてはならない。それを取 って食べるその時、あなたは必ず死ぬ。」

여기서의 ‘그 사람’은 아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다리 건너서 들은 것이 누군가 하면 바로 하와입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누구를 노리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와입니다. 사탄은 반드시 가장 약한 곳에서부터 공격해오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에게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점 중에서 가장 약한 부분을 치고 들어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방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로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혹하는 사탄에 대해 하와가 뭐라고 대답하죠?

창세기 3장 3절에 의하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しかし、園の中央にある木の実について、神は、『あなたがたは、それを食べてはならない。それに触れてもいけない。あなたがたが死ぬといけないからだ。』と仰せになりました。」

여기서 “죽을까 하노라” 라는 것은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더라도 “죽을 수도 있고, 안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던가요? 아까 17절에서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아담이 듣고 이를 하와에게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변질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명령을 어기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하와는 이를 ‘어쩌면 안 죽을 수도 있어’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타락하고 에덴에서 쫓겨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지난 주에 잠시 살펴보았습니다만, 욥은 어땠을까요. 고난을 겪고 수모를 당하고 이를 모두 인내한 후에 욥이 하나님께 뭐라고 고백합니까.

욥기 42장 5절에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이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런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이 고백이 아닐까 합니다. 이 욥의 말을 들으면 어떤 분은 “어? 귀로 듣기만 하면 부족해?” 좀 이상하게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되어 있잖아? 그러면 되는 것 아냐?” 성경을 열심히 읽으신 분이시라면 또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욥기 42장 5절의 다른 번역을 보면 조금 납득이 가실 것입니다.

한글 공동번역에 의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일본어 신개역판에서는 “私はあなたのうわさを耳で聞いていました。しかし、今、この目であなたを見ました。”
욥기 1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던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 당시까지 욥은 그저 소문으로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다, 누가 하는 말을 듣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겠구나 라고 짐작하는 데에 머물렀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여인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언젠가는 와서 자신을 구원해줄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자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사마리아 여인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땠습니까. 유대교에 있을 때에 청년 사울은 믿음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에 의하면 그는 당시 명문이라고 여겨진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엘리트였습니다. 청년 사울은 말하자면 책으로 들은 하나님은 알고 있었으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 결과 어땠습니까.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 다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전하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의 삶은 완전히 180도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듣기만 했던 믿음에서 벗어나, 이제 예수님을 보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믿음으로 성장해간 것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듣는 것입니다. 목사님으로부터 들을 수도 있고 성경을 통해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조금씩 배워가는 것입니다만, 그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그저 지식에 불과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디어디 사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 너를 정말 사랑한대…남자분이라면 어디어디 사는 아름다운 여성이, 여자분이라면 어디어디 사는 멋진 남자가 너를 정말정말 사랑한대…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보세요.
이 소식을 듣고 “아…그래?”로 끝난다면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역사가 일어나겠어요? 그렇습니다. 직접 만나야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대…아…그래? 이렇게 되면 거기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죠. 직접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옛날에 있었던 일들을 그저 단순하게 기록해 놓은 역사책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홍해가 갈라졌다는데 우리의 삶 속에서 갈라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성경에서 질병이 낫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데 우리의 삶 속에서 질병이 낫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야지, 그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끌나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어제도 살아계시고 지금도 살아계시고,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어제와 오늘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성경에서 일어난 일들은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そむきの罪のために刺し通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彼の打ち傷によって、私たちはいやされた。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읽고, 아 그렇구나…예수님 참 아프셨겠네…이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찔리고 징계를 받은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고,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것이요,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사실이에요, 아니에요? 예,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나음을 입지도 못하고 평화를 누리지도 못한다면, 그건 왜인가요? 성경이 거짓말이에요? 아니요.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보약, 만병통치의 명약이 내 눈앞에 놓여 있으면 뭐하겠어요? 그것을 먹고 내 몸 안에 넣어야지만 약효과 발휘되는 것처럼, 성경을 단지 하나의 책, 하나의 지식으로만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삶 속에 들어와서 나와 함께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見よ。わたしは、戸の外に立 ってたたく。だれでも、わたしの声を聞いて戸をあけるなら、わたしは、彼のところにはいって、彼とともに食事をし、彼もわたしとともに食事をする。

지금 이 순간도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누구한테 들은, 어디서 읽은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동행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してみると、あなたがたも、悪い者では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には良い物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とすれば、なおのこと、天の父が、求める人たちに、どうして聖霊を下さらないことがありましょう。」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는 믿음을 갖고,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성령 충만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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