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실상과 증거
2016년 2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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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실상과 증거’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시골에 부랑자 소년이 있었습니다. 부랑자 홈리스가 대부분 그렇듯이 그 소년도 역시 학교에도 다니지 않고, 배가 고프면 간혹 길가에서 구걸을 하거나 거리를 의미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만이 그의 일과였습니다. 그에게는 인생의 꿈도 목표도 없었습니다. 꿈이나 목표라는 말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하루하루 그저 무의미하게 흘러가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살고 있는 동네의 강가에 가봤더니, 어느 한 청년이 강 풍경을 캔버스에 담고 있었습니다. 이 부랑자 소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뭘 하는 건지 궁금해하면서 다가가봤더니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 참 신기하네…… 하고 저 멀리서 멍하니 보고 있었더니, 낌새를 알아쳐렸는지 그림을 그리던 청년이 그 부랑자 소년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보고 싶으면 여기 가끼이 와서 봐.” 라고 말을 해주었습니다. 이 말에 부랑자 소년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붓끌이 캔버스 위에 그려내는 광경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그림을 그리던 청년이 부랑자 소년한테 “내가 너를 한 번 그려줄까?”라고 말을 하더랩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기뻐했겠어요. 저기 저 풍경을 아무 것도 없는 흰 캠퍼스에 이토록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신기한데, 그 사람이 자기를 그려준다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니까, 이 청년이, “괜찮으니까 그냥 거기 편안하게 서 있어봐.” 라고 말하고는 가방에서 연필과 스케치북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리고 부랑자 소년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묵묵히 그림을 그리던 청년의 손이 멈추고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합니다. “다 됐다. 자 봐봐.” 청년은 도화지를 뜯어서 소년한테 보여줍니다. 그랬더니 이 부랑자 소년이 그 그림을 보고 놀랐어요. 거기에는 누추한 부랑자 소년의 모습이 아니라, 멋지게 양복을 차려입은 늘씬한 신사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랑자 소년이 그림을 그려준 청년한테 말합니다. “이게 뭐예요? 이게 나라구요? 이건 내가 아니에요.” 그러자 이 청년이 소년한테 말합니다. “아냐. 너 맞아. 이건 너의 미래 모습이야.”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랑자 소년은 기뻐합니다. 어? 이게 내 미래 모습이야?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한테 “이거 나 가져도 돼요?” 라고 하니까 “물론이지. 너 줄게.” 라고 아주 흔쾌히 대답해 주었습니다.
이 소년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자기 잠자리가 있는 동네 다리 밑에 가서, 그 벽에 이 그림을 붙여놨습니다. 그리고는 이 소년은 하루 종일 아침에 일어나면 밤에 잠이 들 때까지 시간만 나면 이 그림만 보고 있는 거예요. 하루는 주변 부랑자 친구들이 지나가면서 이 소년을 보고 물었습니다. “야, 너 뭐하냐? 벽에 붙여 놓은 게 뭔데? 그걸 하루 종일 보고 있어?” 라고 하니까, 이 소년은 “이거? 이게 나야.” “뭐? 야 그게 어떻게 너야?” “이게 바로 미래의 내 모습이래.” 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합니다. 그랬더니 이 친구 부랑자들이 뭐랬겠어요? “야, 정신차려. 넌 거지야 임마”라면서 곧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하겠죠. 그 소년은 정말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부랑자, 쉬운 말로는 말 그대로 거지였으니까요. 하지만 이 소년은 누가 뭐라든 상관하지 않아요. 히죽히죽 웃으면서 이 그림을 바라봅니다. 이 그림만 바라보면 너무나 기분이 좋아져요. “하하 이게 나야. 이게 바로 미래의 내 모습이야…….”
그러던 중에 소년은 문득 “이런 신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자기가 지금 이대로 있다가는 절대로 미래에 그런 신사가 될 것 같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년은 고심 끝에 부랑자 생활을 청산하고,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에 다니기 시작해서, 결국 그로부터 20년 후에는 옛날에 그 청년이 그려주었던 그림 속에 있던 인물 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신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먼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라는 것은 무슨 뜻인지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이 ‘실상’이라는 단어가 이해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만, 다른 번역에 의하면, 새번역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현대인의 성경에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물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을 말할 때에는 눈앞에 실제로 보이는 상황을 두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내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당신이 내 뒤에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믿는 게 아니면 뭐예요? 그렇죠. 아는 거죠. 나는 당신이 내 뒤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믿는다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 불확실한 것을 두고 믿는다고 말을 합니다. 나는 당신이 약속을 지킬 것을 믿는다, 라고 할 때에는, 아직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약속을 지킬 수도 있겠지만 어길 수도 있다는 그런 불확실한 상황에 있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이른바 증거라고 하는 것은 물증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또는 귀로 들을 수 있는 또는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탁월한 말솜씨를 자랑한다고 해도, 아무리 감명 깊은 웅변을 뽐낸다 하더라도 증거나 증인이 없다면 재판에서 내 주장을 입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증거가 뭐라고 하시죠? 그런데 오늘 성경은 무엇이 증거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믿음이 증거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기를 바라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의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요한복음 20장 29절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어떤 분은 이 말씀을 좀 독특하게 해석하는 분이 계십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으면서 뭘 봐서 믿으면 그건 믿음이 작은 것이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믿어야 좋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해서 무슨 응답을 받고 믿으면 작은 믿음이고,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지 못하고 성령도 받지 못하고 예수님도 만나지 못해도 믿는 믿음이 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오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을 그 문맥에 따라 이해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다른 제자들 앞에는 나타나셨는데 도마는 마침 그 때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마가 말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5절에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라고, 보기에 따라서는 망언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보지 못했다면 이 정도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어, 내가 분명히 봤어. 그런데 너희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말하자면 그런 식이겠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나요? 예수님이 혼내시면서 저주하셨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는 도마 앞에 나타나 주셨어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20장 27절에서,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러자 도마가 대답합니다.
20장 28절에서,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가 이 말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 아까 살펴보았던 말씀,

요한복음 20장 29절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성령님이 강림하신 후에 믿기 시작한 자들, 이것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은 2000년 전,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고 믿음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복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지, 응답도 받지 못하고 성령님을 받지 못하고 믿는 믿음이 크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크기는커녕, 나는 교회에 오래 다녔는데도 아무리 기도를 해도 지금까지 응답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라고 하는 분이 계시다면 저한테 오시거나, 주변에 그런 분이 계시다면 저한테 모셔오시기 바랍니다. 그건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뭔가가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안 보여주고 믿으라고 한 적이 있으신가요?
성경을 살펴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라고 하시면서 “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3장 14절에서 15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라고 하시면서 역시 “바라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기를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여년을 헤맬 때에 믿음을 끝까지 붙잡고 가나안 땅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은 매일매일 하늘에서 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군해갔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1절에서 3절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낙심 가운데에 있을 때라도, 우리가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을 때라도, 마치 부랑자 소년이 그림 한 장을 바라보면서 소망의 끈을 놓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구주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무엇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에 비로소 오늘 말씀처럼 우리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어서 보이지 않는 것에도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믿음 없는 자가 아닌 믿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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