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주님이 주시는 평안
2016년 5월 29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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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주시는 평안’ 主が与えて下さる平安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5월 10일부터 21일까지 12일간의 방문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제 발걸음을 인도해주신 우리 주님과 그리고 그 동안 기도해주신 여러분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축복이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에 살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한국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에는 한창 이른바 배낭여행의 유행이 시작할 쯤이었습니다만, 저는 다른 외국에 대한 흥미보다도 국내여행이 더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런 생각도 있었습니다. 내가 한국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고 외국을 먼저 보면, 아무래도 외국을 기준으로 한국을 판단하게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건 좀 옳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에, 먼저 한국을 돌아보자……라는 생각 때문에 열심히 한국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학교에 다닐 때에는 방학때, 그리고 회사생활을 할 때에는 휴가 때가 되면 정말 배낭 하나를 매고 우리나라를 한 바퀴 돌곤 했었습니다.
이번에 한국 방문 기간 동안 서울에서 시작해서 천안, 대구, 경주, 부산, 광주, 나주 등을 돌고 왔습니다만, 참 오랜만에 여기저기를 방문하니, 이것저것 힘든 일도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참 즐거웠습니다. 나라 크기는 여느 나라들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작습니다만, 아주 오밀조밀합니다.
단순히 놀러갔다 온 것이라도 힘이 들겠습니다만, 이번 방문이 놀러갔던 것이 아니고 이런저런 볼 일이 있어 갔다온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 지난 며칠간 매우 피곤했습니다. 더구나 걸어다닐 때에도 대부분 정장차림이고 구두를 신고 다녔기 때문에 발바닥이 매우 아프더군요. 그래서 온천에도 가고 거기서 사우나도 하고 땀도 빼고 해서 그래도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이것도 참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피곤하고 지치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물론 이 세상을 살면서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끔 보면 너무나 힘들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어제 인터넷으로 한국 신문을 보는데, 5월 28일자 신문에 보니 참으로 안타까운 기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제목은 “"영업사원 심정" 목숨 끊은 초임 검사가 남긴 유서”라는 글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지난 5월 19일 서울 남부지방검찰청 33세의 젊은 검사가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그 원인에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만 그가 남긴 두 장짜리 유서에는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 중압감에 대해서 적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신문기사에 적혀 있던 유서 내용이라고 합니다.
일이 너무 많다. 쉬고 싶다
업무,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고 밀리기만 한다
돌아오는 장기(長期) 사건들이 목을 조인다. 해결책은 보이지 않고 하루 종일 앉아서 보고 있어도 사건은 늘어만 간다. 물건을 팔지 못하는 영업 사원들의 심정이 이렇겠지.
그만둔다고 하면 영원히 실패자로 낙인찍혀 살아야겠지. 병원에 가고 싶은데 병원 갈 시간도 없다. 탈출구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는 마지막에,
한 번이라도 편한 마음으로 잠들고 싶다. 스트레스 안 받고 편안하게…
라는 내용으로 맺었다고 합니다.
신문기사에 의하면 이 젊은 검사는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2009년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법무관을 마치고 작년 4월에 서울남부지검 형사부로 부임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살아온 길, 그리고 남긴 유서만을 보고는 100% 확신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 짐작은 갈 수 있습니다.
이 젊은 검사. 어렸을 때부터 대단히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보냈었겠지요. 공부도 열심히 했을 것입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서도 사법시험이라는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저도 법대를 나오기는 했습니다만 사법시험을 본격적으로 공부해보지는 않았습니다. 1차는 객관식으로 하루만에 끝나지만 2차는 무려 4일동안 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합격하면 이제 3차 면접시험을 보게 되고, 이 과정을 모두 통과해야지만 최종합격이 됩니다. 그리고 합격한 다음에는 2년 동안 사법연수원에 들어가게 되는데, 단순히 2년 과정을 수료하면 변호사 자격이 부여됩니다만, 판사나 검사로 임용되기 위해서는 이 연수원에서도 성적이 좋아야 합니다. 지금은 로스쿨제도가 도입되면서 그 수는 줄었습니다만, 그 전에는 사법시험 합격자 수가 1년에 1,000명 정도였습니다. 그 중에서 판사로 임용되려면 최상위권에 들어야 하고, 검사로 임용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200등 정도에는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판사나 검사 임용을 목표로 하고 있는 연수원생이라면 사법시험에 합격한 다음에도 연수원에 들어가서 열심히 2년 동안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이 33세, 학창시절에는 아마도 과제를 밀려본 적도, 선생님한테 싫은 소리 한 번 안 들어보고, 그야말로 모범생으로 자라왔을 것입니다. 그가 걸어온 과정에 남긴 훌륭한 성과는 단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피나는 노력의 결과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력의 연장선상에 서울지검 검사라고 하는, 누구나가 부러워할 지위가 주어졌습니다만, 그 자리는 너무나도 그에게 힘겨웠던 것 같습니다.
이른바 법조인이라고 하면 선망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제 동기들이나 선후배들만을 보아도 대단히 바쁩니다. 이건 제 솔직한 고백입니다만, 만약에 제가 어쩌다가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법조계로 나갔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해볼 때가 가끔 있어왔습니다만, 그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아, 저는 정말 못할 것 같더라구요.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분은 “아이, 그건 젊었을 때나 그렇지, 위로 올라가면 좀 편해지고 그러는 거야…” 라고 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학교 다닐 때 어떤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가끔 노동자들이 업무환경을 개선하라고 데모도 하고 파업도 하는데, 정말로 업무환경개선이 필요한 건 판사들, 그 중에서도 대법관, 그 중에서도 대법원장이라는 거예요. 제 후배 판사 말에 의하면 판사 한 명당 안고 있는 사건이 지방인 경우에는 한 달에 200~300건, 서울인 경우에는 500~600건이라고 합니다. 1년에요? 아니요, 한 달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작년 4월 25일자 신문기사에 보니, 최고법원에서 다룬 사건 수를 보니, 미국은 9명인 연방대법원 판사가 다루는 사건은 1년에 대략 80건 정도. 독일은 128명의 판사가 총 5000여 건 정도. 일본은 최고재판소 판사 15명이 한 해에 대략 5000여 건 정도의 사건을 다룬다고 하는데, 한국 같은 경우에는 지난 2013년에 12명의 대법관이 다룬 사건이 무려 37,652건이라고 합니다.
참 힘든 일입니다. 그렇게 일이 힘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되요? 방법이 없어요? 아니요, 왜 없겠어요. 좀 한가한 곳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고, 그토록 몸이 안 좋으면 잠시 휴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도저히 안 된다면 어떻게 해요? 예, 옷 벗고 나오면 됩니다. 판사나 검사는 이미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원도 마친 사람들이기 때문에, 법원이나 검찰을 나와도 언제든지 변호사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이 젊은 검사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유서에는,
그만둔다고 하면 영원히 실패자로 낙인찍혀 살아야겠지.
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래요? 좋은 학교 나와서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서 서울지검 검사까지 하다가 나온 사람한테 영원히 실패자로 낙인을 찍을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습니까. 이와 비슷한 사건이 2011년에는 대전지방검찰청에서 당시 35살이라고 하는 역시 젊은 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 원인도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그랬나요? 이 문제는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분들도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분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내 힘과 노력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그 첫번째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고, 그리고 사람에게는 안식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두번째 모르고 있었던 점이고, 마지막으로 우리 인간은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 그 세 번째 모르고 있었던 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살아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 힘만으로 하다하다 안 되면 그 때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신명기 30장 20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あなたの神、主を愛し、御声 に聞き従い、主にすがるためだ。確かに主はあなたのいのちであり、あなたは主が、あなたの先祖、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に与えると誓われた地で、長く生きて住む。

시편 115편 9절~11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イスラエルよ。主に信頼せよ。この方こそ、彼らの助け、また盾である。
アロンの家よ。主に信頼せよ。この方こそ、彼らの助け、また盾である。
主を恐れる者たちよ。主に信頼せよ。この方こそ、彼らの助け、また盾である。

라고 하십니다.
전쟁에 나갈 때 내 힘으로 싸우다 안 되면 그 때가서 슬그머니 방패를 꺼냅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전쟁에 나가는데 총만 들고 나갔다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을 때 철모를 꺼내서 쓰나요? 아니요. 방패와 철모는 전쟁에 나가기 전에 이미 준비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내 힘으로 하다가 안 되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앞서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에 둘째로, 우리에게는 안식이 필요합니다. 그 사실을 제일 잘 아시는 분이 누구시겠어요? 그렇죠. 바로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우리더러 맨날 쉬기만 하라고 하시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20장 9절~10절에는,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六日間、働いて、あなたのすべての仕事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
しかし七日目は、あなたの神、主の安息である。あなたはどんな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娘、それにあなたの男奴隷 や女奴隷、家畜、また、あなたの町囲みの中にいる在留異国人も。―

라고 하십니다. 엿새 동안은 일심히 일하되 일곱째 날은 안식하라는 것입니다. 쉬라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 좋으라고요? 우리가 쉬면 하나님한테 득이 됩니까?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과거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일요일이 없었습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죠. 왜요? 그것은 바로 농경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일요일이라고 잡초가 안 자라나요? 비료를 안 주나요? 그냥 아침에 해가 뜨면 밭에 나아고 밤에 해가 지면 돌아오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이는 비단 농민들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관직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되나요? 수명이 짧아집니다. 60세가 되면 환갑잔치를 합니다만, 그 이유는 뭐냐하면 과거에 60세라고 하면 정말로 장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40세 쯤이면 이제 서서히 은퇴준비를 하고 50세가 넘으면 완전히 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60세까지 살게 되니 얼마나 장수한 거예요. 그렇게 평균수명이 짧았습니다. 하지만 물론 의학의 발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서양문물이 들어오고 기독교 사상에서 유래된 일요일이라는 제도가 들어오게 되면서 평균수명이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베드로를 보세요. 그가 얼마나 충성되게 예수님을 따랐습니까. 예수님께서 이제 잡혀갈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뭐라고 하죠?

마태복음 26장 33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すると、ペテロがイエスに答えて言った。「たとい全部の者があなたのゆえにつまずいても、私は決してつまずきません。」

하지만 그는 결국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면서 부인을 하고 맙니다. 그 뿐인가요?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구약을 대표하는 선지자인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자들과의 대결에서 850대 1로 싸움을 버립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를 거둔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 850명의 선지자들을 모두 처형시키는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왕이었던 아합의 부인인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인다고 하는 소식을 듣습니다. 본래 엘리야 정도의 선지자면 어떻게 해야 마땅하겠어요? 그 말을 듣는 즉시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세력들을 무찔렀다……이래야 자연스럽고, 과연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답다……이렇게 되어야 할텐데, 성경에는 어떻게 되어 있죠?

열왕기상 19장 3절~4절에 보면,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彼は恐れて立ち、自分のいのちを救うため立ち去った。ユダのベエル・シェバに来たとき、若い者をそこに残し、
自分は荒野へ一日の道のりをはいって行った。彼は、えにしだの木の陰にすわり、自分の死を願って言った。「主よ。もう十分です。私のいのちを取 ってください。私は先祖たちにまさっていませんから。」

이게 웬 일입니까.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겠다는 말을 듣고는 대선지자 엘리야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쳤대요. 그리고 하나님께 기껏 기도하는 소리가, “하나님, 지금 내 생명을 거두어주세요.”라고 합니다. 정말 이 사람이 엘리야였나 하는 정도로 나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인간이 나약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천하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도 이런데, 우리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세요? “네 이놈. 네가 그래도 선지자야? 부끄럽지도 않아? 어서 빨리 되돌아가지 못해!?” 라고 혼을 내시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후 열왕기상 19장 5절~8절을 보면,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彼がえにしだの木の下で横になって眠っていると、ひとりの御使いが彼にさわって、「起きて、食べなさい。」と言った。
彼は見た。すると、彼の頭のところに、焼け石で焼いたパン菓子一つと、水のはいったつぼがあった。彼はそれを食べ、そして飲んで、また横になった。
それから、主の使いがもう一度戻って来て、彼にさわり、「起きて、食べなさい。旅はまだ遠いのだから。」と言った。
そこで、彼は起きて、食べ、そして飲み、この食べ物に力を得て、四十日四十夜、歩いて神の山ホレブに着いた。

기진맥진해서 누워 자는 엘리야를 천사가 어루만지면서 먹을 것을 갖다주더랩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집니까. 그리고 먹고 마시고 또 잡니다. 그랬더니 또 와서 어루 만지고 먹으리고 하면서 힘을 주십니다. 이것을 두고 엘리야의 우울증이라고 하는데, 어떤 목사님이 이 구절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자, 엘리야도 우울증에 걸렸을 때 그냥 먹고 마시고 그리고 자고, 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리고 자고…했으니까, 우리 주변에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있어도 절대로 금식하라고 하거나 철야 하라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생각해보세요. 기운이 빠지고 힘들고 지친 사람을 다그치고 혼낸다고 기운이 나겠습니까. 육체적 정신적으로 기진맥진 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육체적 정신적인 안식과 위로와 충전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平安を残しま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わたしの平安を与えます。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与えるのは、世が与えるのとは違います。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してはなりません。恐れてはなりません。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언제 하셨냐 하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은혜가 넘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잡혀가기 바로 전날에 하신 말씀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수님께서 만약에, “내가 이제 너희들을 위해서 고통과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게 될 텐데, 하나님의 아들인 나도 이만큼 하는데, 너희들도 나만큼은 해야되지 않겠어?” 뭐, 이랬다면 우리는 어쩔뻔했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에 사랑이 넘치십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니 예수님의 유언이라고도 합니다. 죽는 사람은 그 재산을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엇을 주셨나요? 바로 평안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세상이 주는 한낱 돈이나 재산이 아닌, 그리고 싸구려 평안이 아닌 진정한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세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사야 53장 4절에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まことに、彼は私たちの病を負い、私たちの痛みをになった。だが、私たちは思った。彼は罰せられ、神に打たれ、苦しめられたのだと。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근심하고 두려워할 그 근본적인 원인을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를 통해서 해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고생하기를 바라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통받기를 원하고 계시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고통을 평안으로 바꾸어 주셨고,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의 구원에 거하는 우리에게는 근심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첫 번째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내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나약합니다. 강한 척 하지 마시고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말미암아 모든 근심과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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