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회 살아있는 믿음
2016년 8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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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6절~24절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나무늘보라는 동물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어로는 ナマケモノ라고 하지요.

이 사진이 바로 나무늘보입니다만, 이 나무늘보는 주로 중남미 지역에 서식하는, 크기는 40센티에서 70센티 정도 되는 포유류입니다만, 일생 동안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나무에 매달려서 지내고, 동작도 때도 매우 느릿느릿 움직인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그 이름이 나무늘보겠습니까. 그러다보니까 그렇게 많이 먹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기껏해야 하루에 나무 잎파리 3장 정도? 그리고는 또 나무에 매달려서 잠을 자고, 먹는 것도 많지 않으니 배설은 1주일에 한 번 정도 나무에서 내려와서 배설을 한다고 합니다.
조금 오래된 신문이긴 합니다만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서 좀 알려드릴까 합니다.
다음은 2007년 1월 29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내용입니다. 제목부터가 색다릅니다.

<최강의 ‘귀차니스트’ 나무늘보.. 3년 요지부동, 과학자들 연구 포기>

이 기사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루 18시간 이상 잠을 자는 등 게으름뱅이로 유명한 나무늘보의 행동 연구에 착수한 독일 과학자들이 연구 시작 3년만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고 24일 독일 언론들이 보도했다. 과학자들이 연구를 포기한 이유는 연구 대상 나무늘보가 연구 기간 3년 내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
언론에 따르면, 독일 제나 대학교 연구진은 3년 전 ‘마츠’라는 이름의 나무늘보를 대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진은 스파게티, 삶은 계란 등 맛있는 음식을 이용, 마츠를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나무늘보가 음식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언론의 설명.
3년 동안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연구진은 지난 주 ‘연구 포기’를 공식 선언했는데, 과학자들은 “마츠가 과학 실험은 물론 음식 등 그 어떤 대상에도 흥미가 전혀 없었다”면서 안타까움을 표출했다. 일반적인 나무늘보는 나무 위에서 생활하다가, 음식을 보면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서서히 내려온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설명.
과학 실험에 전혀 협조하지 않은 마츠는 뒤스부르크 동물원으로 보내져 편안한 삶을 살 예정이라고 언론은 전했다.”

이 사진은 이 소식을 전한 독일 신문입니다.



이른바 무슨 동물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좀 움직여야지만 여러 성과를 얻을 수 있을텐데, 이건 무슨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 나무늘보를 대상으로 연구를 하려 했던 과학자들은 프로입니다. 저 같은 아마추어라면 “에이, 이게 뭐야, 재미없게.”라면서 금방 포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분들은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매달렸을 것입니다. 어쩌면 정말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여러 방법으로 시도해보았겠지요. 그 기간이 얼마요? 예, 3년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땠대요? 그 과학자들로 하여금 아무런 성과도 못 내고 연구포기를 공식 선언하게 만들었습니다. 3년 동안 매달렸던 과학자들도 대단하지만, 이 나무늘보도 정말 대단하지요?

여러분께서는 이 기사를 들으시고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제가 이 기사를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편치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혹시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보고 어떤 반응을 바라고 계시는데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나무에 매달려 하루 18시간씩 잠이나 자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생각하시지나 않을까 해서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내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03장 8절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主は、あわれみ深く、情け深い。怒るのにおそく、恵み豊かである。

이사야 48장 9절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は、わたしの名のために、怒りを遅らせ、わたしの栄誉のために、これを押えて、あなたを断ち滅ぼさなかった。


베드로후서 3장 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主は、ある人たちがおそいと思っているように、その約束のことを遅らせておられるのではありません。かえって、あなたがたに対して忍耐深くあられるのであって、ひとりでも 滅びることを望まず、すべての人が悔い改めに進むことを望んでおられるのです。


그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에 오래 참으십니다. 쉽게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이렇게도 저렇게도 손길을 뻗으시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있다고 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하십니까. 역시 앞서 살펴본 나무늘보를 연구하던 사람들처럼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가끔 포기를 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노아 때의 홍수를 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세상이 죄악과 부패함과 포악함이 가득함을 보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노아만 사랑하시고 노아와 그 가족들만을 구하고자 하셨다면 그렇게 번거로운 절차를 밟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노아와 그 가족들만을 붕 뜨게 만들고 싹 쓸어버리면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하나님께서는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짓도록 하십니다. 그 방주를 짓는 기간은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신학자들에 따라서 기간이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만, 대략적으로 보면 최소한 60~70년은 되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昔、ノアの時代に、箱舟が造られていた間、神が忍耐して待っておられたときに、従わなかった霊 たちのことです。わずか八人の人々が、この箱舟の中で、水を通って救われたのです。

생각해보십시오. 수 십 년 동안 노아는 묵묵히 방주만 지었겠어요? 적어도 자기가 살던 동네 사람들이 그랬겠지요. 이봐, 노아야, 너 뭘 그렇게 열심히 짓고 있어? 그럴 때마다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전도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거야. 물로 쓸어버리실 거야. 그러니까 어서 회개하고 같이 배에 타서 구원을 얻자. 그리고 그 배 크기가 좀 컸어요? 배 길이가 135미터, 폭이 22.5미터, 높이가 13.5미터의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이 135미터라는 길이는 지금 축구장 보다도 더 긴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소문도 났겠지요.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노아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어서 회개하고, 죄악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믿읍시다. 함께 하나님이 명령하신 배를 만듭시다. 하지만 몰려온 사람들은 어떤 이들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지켜봤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비웃었을 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심한 욕설을 퍼붓고 모욕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구원을 얻은 사람은 노아와 그 가족 여덟 명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37절~39절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人の子が来るのは、ちょうど、ノアの日のようだからです。洪水前 の日々は、ノアが箱舟にはいるその日まで、人々は、飲んだり、食べたり、めとったり、とついだりしていました。そして、洪水が来 てすべての物をさらってしまうまで、彼らはわからなかったのです。人の子が来るのも、そのとおりです。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되 영원히 참지는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1장 16절~17절,
“16.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この時代は何にたとえたらよいでしょう。市場にすわっている子どもたちのようです。彼らは、ほかの子どもたちに呼びかけて、
こう言うのです。『笛を吹いてやっても、君たちは踊らなかった。弔いの歌を歌ってやっても、悲しまなかった。』

이와 비슷한 말씀이 바로 마태복음 23장 37절입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ああ、エルサレム、エルサレム。預言者たちを殺し、自分に遣わされた人たちを石で打つ者。わたしは、めんどりがひなを翼 の下に集めるように、あなたの子らを幾たび集めようとしたことか。それなのに、あなたがたはそれを好まなかった。


그들에게 피리를 불어도 꿈쩍도 하지 않고 슬피 울어도 무관심해 했던 사람들,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선지자들을 돌로 치고, 그래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마치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몇 번이고 모으려고 해도 이를 거부했던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한탄하십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리 엄중한 경고를 전해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마태복음 11장 18절~19절까지 봅니다.
“18.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ヨハネが来て、食べも飲みもしないと、人々は『あれは悪霊につかれているのだ。』と言い、
人の子が来て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いると、『あれ見よ。食いしんぼうの大酒飲み、取税人 や罪人の仲間だ。』と言います。でも、知恵の正しいことは、その行ないが証明します。」


이른바 온라인 쇼핑몰이라고 한다면 한국에서는 지마켓, 오크숀, 일본에는 라쿠텐 같은 곳이 있습니다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에서 제일 큰 곳은 미국의 아마존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의 알리바바가 급속도로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워낙 인구가 많다 보니까 세계를 상대하고 있는 아마존보다도 13억 중국 내국인을 상대하고 있는 알리바바가 더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큰 온라인 쇼핑몰을 꼽는다면 바로 이 알리바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알리바바의 회장이 바로 마윈이라는 분인데, 이 마윈 회장이 어떤 강연회에서 한 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어떤 말인가 하면, 이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에 대해서 한 말인데, 이 세계적인 기업을 이끌고 있는 마윈 회장이, 세상에서 가장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이라고 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마윈 회장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마윈 회장이 말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무슨 돈 없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차별하는 발언이 아닙니다. 이 분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유를 주면 함정이라 얘기하고, 작은 비지니스라 얘기하면 돈을 별로 못번다고 얘기하고, 큰 비즈니스라고 얘기하면 돈이 없다고 하고, 새로운 걸 시도하자고 하면 경험이 없다 하고, 전통적인 비지니스라고 하면 어렵다고 하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하면 사기라고 하고, 상점을 같이 운영하자고 하면 자유가 없다고 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자고 하면 전문가가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지요? <가난은 나랏님도 못 구한다>는 말입니다. 가난이 무엇이에요? 그렇죠. 쉽게 말해서 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난을 구하려면 돈을 주면 되지 않나? 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도 가난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마윈 회장이 말한 그와 같은 나쁜 습관이나 기질이 뼛속까지 스며있는 사람은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잠시 봅니다.

마태복음 3장 4절에 보면 세례요한에 대해서 묘사한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4절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このヨハネは、らくだの毛の着物を着、腰には皮の帯を締め、その食べ物はいなごと野蜜であった。

이것만 보더라도 대단히 특이합니다만, 거기에다가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자주 금식도 하고 그랬나봅니다. 성경에 의하면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나오기는 합니다만 그 외에도 에세네파라는 파가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일반인들로부터 떨어져서 매우 엄격한 규율에 따라 믿음생활을 했다고 전해집니다만, 아마도 이 세례요한도 이 에세세파에 속해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구약에 나오는 나실인처럼 포도주도 안 마시고, 매우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처럼 일반인들과는 사뭇 다른 엄격한 믿음방식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세례요한을 신뢰하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그를 두고 귀신들렸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하시는 모습을 보니까, 무슨 어부출신이다 세리다 하는 젊은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음식도 먹고 포도주도 마시고 하니까, 이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물질이 없어 가난한 사람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결국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과 같이, 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도 또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0절~24절,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数々の力 あるわざの行なわれた町々が悔い改めなかったので、責め始められた。「ああコラジン。ああベツサイダ。おまえたちのうちで行なわれた力 あるわざが、もしもツロとシドンで行なわれたのだったら、彼らはとうの昔に荒布をまとい、灰をかぶって悔い改めていたことだろう。しかし、そのツロとシドンのほうが、
おまえたちに言うが、さばきの日には、まだおまえたちよりは罰が軽いのだ。カペナウム。どうしておまえが天に上げられることがありえよう。ハデスに落 とされるのだ。おまえの中でなされた力 あるわざが、もしもソドムでなされたのだったら、ソドムはきょうまで残っていたことだろう。しかし、そのソドムの地のほうが、おまえたちに言うが、さばきの日には、まだおまえよりは罰が軽いのだ。」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3개의 도시를 책망하십니다. 거기는 바로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입니다. 예수님 당시 북쪽 갈릴리에는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디베랴 등 대표적인 네 성읍들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 벳새다는 사도 베드로와 안드레, 빌립의 고향이고, 마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시는 장면이 나오고, 누가복음 9장 10절에서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5천명을 먹이신 곳이 바로 이 벳새다입니다.
그리고 고대 가버나움은 예수님 당시에는 매우 번화해서 세관도 있었고 큰 회당도 있었으며 주민들이 많았던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곳 가버나움 회당에서 설교하셨고 나병환자도 고치셨고, 천장을 뚫고 지붕에서 내려보낸 환자를 치료하신 곳도 바로 이 가버나움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시기도 했으며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셨고,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낫게 하셨으며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셨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펴게 하신 곳도 바로 다름 아닌 이곳 가버나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토록 하나님의 큰 권능을 행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가버나움은 복음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여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무서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갈릴리 지역에 있던 4개의 대표적 도시,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디베랴 중에서 나머지 3 도시는 모두 저주를 받았고 디베랴만 이 저주를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이 디베랴라는 도시는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나타나신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저주하신 3 도시인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 그리고 저주를 피한 디베랴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V이것이 바로 고라신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완전히 황폐해지고 고대 유적만 앙상하게 남아 있습니다.
V다음, 여기가 벳새다입니다.


정말 여기에 도시가 있었을까 하는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고대 돌뭉치들 외에는 남아 있는 것들이 없습니다.
V그리고 여기가 가버나움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파괴되고 잊혀진 도시이고, 지금의 가버나움은 호숫가 종려나무들 속에 폐허 더미로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2의 고향이라 일컬어지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 놀라운 기적을 수없이 행하신 가버나움이라 할지라도, 결국 회개와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니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4개 도시 중 유일하게 저주를 피할 수 있었던 디베랴는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계셨을 때 존재했다면 그것만으로도 2천년 전일텐데, 아무리 예수님의 저주를 피했다고는 하지만 그곳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까요?
정답은 <존재 한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남아 있는 디베랴를 한 번 보실까요?



V현대식 발음으로는 티베리아스이고 예수님 시대 이후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갈릴리 지역에 존재하고, 2012년 현재 인구는 41,741명이라고 합니다.
V이 사진은 디베랴의 야경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인생 가운데에서 아름다운 추억이 재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에서는, 천국의 복음에서는 하나님 안에서의 추억은 그저 추억일 뿐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내가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다, 금식도 많이 했었다, 응답도 많이 받았었다 할지라도 지금 믿음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2장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それと同じように、信仰も、もし行ないがなかった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그리고 조금 뒤에 있는 26절에는 더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たましいを離れたからだが、死んだものであるのと同様に、行ないのない信仰は、死んでいるのです。


이 행위가 무엇입니까. 기도이고, 전도이고, 봉사이고, 찬양입니다. 그리고 이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도 예배이고 우리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예배이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도 예배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도 예배인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움직이라고 해도 움직이지 않았던 나무늘보는 결국 과학자들이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쓰시려고 해도 우리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꿈쩍도 안하면 결국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고 마실 것입니다. 앞서 본 나무늘보는 동물원으로 보내져서 편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이 포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계시록 3장 15절~16절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わたしは、あなたの行ないを知っている。あなたは、冷たくもなく、熱くもない。わたしはむしろ、あなたが冷たいか、熱いかであってほしい。
このように、あなたはなまぬるく、熱くも冷たくもないので、わたしの口からあなたを吐き出そう。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예수님이 우리를 버리신다면 우리가 갈 곳은 한 곳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0절,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火の燃える炉に投げ込みます。彼らは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です。

성경에는 종종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표현이 무엇입니까. 미리 사전에 풀무 불에 던져질 줄 알았다면, 울지는 모르겠지만 이를 갈지 않겠지요. 즉, 이 말은 자신이 풀무 불에 던져질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믿더라도 너무 지나치게 믿으면 안 돼. 정도껏 믿어야지. 적당히 믿어도 된다니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신다고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서 토해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나무늘보와 같은 믿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움직이지 않는 믿음,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처럼 아무리 큰 도시이고 부유한 도시이면 무엇합니까. 하나님께서 버리시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믿음은 영혼이 없는 죽은 몸이 아니라 영혼이 있는 살아 있는 몸처럼 행위가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기도, 살아있는 전도, 살아있는 봉사, 살아있는 찬양으로 살아있는 예배를 주님께 드리며, 마지막 날까지 살아있는 믿음을 지키고 그 날에 주님으로부터 큰 칭잔을 받은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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