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회 놀라운 은혜
2016년 10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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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사사기 16장 22절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놀라운 은혜’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찬송가 305장 우리나라 제목으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지만, 영어 원어 찬양 제목은 <Amezing Grace> 놀라운 은혜입니다.
한국말 번역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입니다. 정말로 말 그대로 놀랍고도 은혜로운 가사입니다. 물론 영어를 잘 하시는 분께서 그 멜로디에 맞춰서 번역을 하신 것이겠습니다만, 이 가사를 원어로 본다면 또다른 은혜를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어로는,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이 가사를 해석해보면, 먼저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놀라운 은혜, 얼마나 감미로운 소리인가……입니다. 놀라운 은혜가 무엇입니까.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시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셔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이보다 놀라운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 그 감미로운 소리, 감미로운 음성이 참으로 놀랍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That saved a wretch like me.” 이 문장을 직역하면, “그것이 나 같은 wretch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이 wretch가 뭐냐 하면 사전을 찾아보면 두 가지 의미가 나오는데, 매우 흥미롭습니다. 하나는 가엾고 불쌍한 사람, 또 하나는 악하고 비열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 같은 사악하고도 비열하고도 가엾고도 불쌍한 인간을 “그것”이 구원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예요? 그렇죠. 바로 앞에 나온 그 놀라운 은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그 놀라운 예수님의 은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나 같은 가엾고 불쌍하고 사악하고 비열한 인간을 구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은혜가 나한테 얼마나 감미롭게 여겨지겠습니까.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내가 한 번은 버려졌지만, 그러나 지금 나는 발견되어졌다. 도로 찾아졌다는 것입니다. 이건 수동태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 의해 발견되어졌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도 보십시오. 출애굽한 민족들에게 하나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시기를, 예컨대 레위기 26장에 보면,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축복을 주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징벌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그 결과 내가 한 번은 버려짐을 당했었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나를 찾아주시고, 나를 건져주셨습니다.
마지막 가사. “Was blind, but now I see.” 나는 앞을 보지 못하고 눈이 멀었으나, “but now I see.” 그러나 지금 나는 봅니다. 지금 나는 볼 수가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다시 한 번 이 가사를 처음부터 본다면요,

놀라운 은혜, 이 얼마나 감미로운 소리, 감미로운 음성인가.
그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가 나 같이 사악하고도 가엾은 영혼을 구했습니다.
내가 한 번은 버려졌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주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내가 과거에는 눈이 멀었었으나, 지금은 내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고백이 이 찬양 안에는 숨어 있습니다.
저는 이 찬양을 생각할 때마다, 특별히 성경에 등장하는 두 사람이 떠오릅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이스라엘 민족의 사사 중 한 사람이었던 삼손이요, 또 한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 사람처럼 악에서 떠난 자가 없다고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신 욥입니다.
먼저 삼손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애굽을 탈출해서 40여년을 방황하다가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여리고를 함락시키고 각 지파에 따라 땅을 분배 받고 난 다음에는 사울이 왕이 되기 전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직접 택하신 사사가 다스렸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여러 사사들이 등장합니다. 사사를 세는 방법에 따라서는 12명이 되기도 하고, 또 사사기 4장에 등장하는 바락이나, 또는 사사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사사시대와 왕국시대의 분기점이 되는 격동기의 시대에 대해서 적힌 사무엘서에 등장하는 사무엘과 그 두 아들까지 포함하면 16명이 되기도 합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들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기드온이나 입다, 그리고 여성 사사도 있었죠? 드보라 사사도 유명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삼손은, 사사기 15장 20절에 의하면 20년간 이스라엘을 사사로서 다스렸다고 합니다. 삼손에 대해서는 영화가 되기도 하고 해서 꽤 많이 알려진 존재입니다만, 오늘은 특별히 이 삼손에 대해서 잘 몰랐던 부분을 다시 살펴보면서 은혜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먼저, 사사기에서는 삼손에 대해서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만, 사사기 13장에서는 삼손의 출생을 기록하는데, 매우 특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 13장 3절~5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여인에게 아들을 낳을 것을 알려줍니다. 네가 이제 아들을 낳을 것이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아라, 그리고 태어나면 머리에 삭도를 대지도 말아라.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실인이라고 하는 말은 “헌신”이나 “봉사”를 뜻하는 ‘나자르’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나실인이라고 하면 자신이 서원해서 일정기간을 정하고 그 기간 동안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쳐지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무엘 같은 경우에도 평생동안 나실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만, 그것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서원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장 11절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결과 사무엘이 태어나고, 어머니 한나는 자신의 서원대로 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서 대제사장 엘리에게로 데려갑니다. 그런데 삼손의 경우에는 아예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사람이 정한 것도 아니요, 여호와의 사자가 직접 나타나서 지시를 합니다. 이는 매우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사기 13장 24절~25절에 보면,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이제 삼손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영이 그를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삼손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이른바 힘이 강했다는 인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을 그려놓은 그림이나 영화를 보면 대단히 근육질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아도 사사기 14장 6절을 보면 맨손으로 사자를 물리치는데 무슨 염소새끼를 찢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 뿐만이 아니죠. 4장 19절에는 사람 삼 십 명을 쳐죽였다고 하며, 15장 14절에 보면, 새 밧줄로 삼손을 결박했지만 그 밧줄이 무슨 불에 타는 것처럼 풀려버리고는 나귀의 턱뼈 하나 가지고 블레셋 사람들을 천 명이나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한 사람이 전쟁터에서 총 한 자루 갖고 적군 천 명을 물리친다면 그야말로 전설과도 같은 일이겠지요. 그런데 무슨 대단한 무기도 아닌 나귀 턱뼈 하나 가지고 이렇게 큰 성과를 이루어냈다는 것은 정말 놀랍다고밖에는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렸던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사기 14장 6절,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
사사기 14장 19절,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사사기 15장 14절,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이렇게 삼손이 힘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삼손이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자기몸 관리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이 임해서 이와 같은 놀라운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지요? 삼손은 자신이 나실인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도 가벼히 여겼습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삭의 아들이요 야곱의 형인 에서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합니까. 야곱이 팥죽을 쒀서 에서한테 말하기를, 자기한테 장자권을 팔면 내가 팥죽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에서는 어떻게 해요?
창세기 25장 32절~33절에 보면,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아이구, 내가 지금 배고파서 죽겠는데 그깟 장자권이 뭐가 중요해? 야, 너나 가져라, 그리고 빨리 그 팥죽이나 줘. 라고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부모와 자식간도 그렇지만 형제지간에 있어서도 그 순서를 사람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순서이고, 하물며 <장자>라고 하는 지위는 그 집안을 대표하는 권위있는 지위이고, 그것을 정해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이를 그깟 팥죽 한 그릇에 팔아넘긴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창세기 25장 34절에 보면,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야곱에게 판 이유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삼손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나실인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남들보다도 더욱 신실하게 지켜야 하는 입장에 있었지요. 더구나 삼손이 그냥 나실인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사사였습니다. 지도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남들의 모범이 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는데, 삼손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사기 14장에 보면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명기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과 혼인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사사이자 나실인이라고 하는 신분도 망각한 채, 부모가 말리는 데도 끝까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고 합니다. 더구나 블레셋은 이스라엘 민족과 대립하고 있는, 말하자면 물리칠 대상의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나님이 허락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결국은 거기서 다툼이 생기고, 그 블레셋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한테 넘어가버리고 맙니다. 그랬더니 여기에 화를 낸 삼손이 여우 3백마리를 붙들어서 두 마리씩 꼬리를 묶고 그 사이에 횃불을 달아서 블레셋 사람들 밭에 풀어놓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꼬리에 불이 붙은 여우는 뜨겁워서 날뜁니다. 하지만 두 마리가 하나로 묶여 있으니까 멀리 도망도 못 가고 해서 발버둥을 치니까 온 천지 과수원 밭이 불바다가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게 도대체 사람이 할 짓입니까. 그런데 아직도 자기가 무엇을 잘못한지 모르는 삼손은 사사기 16장에 보면 이제 블레셋의 그냥 여인도 아니고 기생인 들릴라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기생이라고 하는 점에 있지 않습니다. 기생이라면 무조건 나쁜 거예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성경에서 <기생>이라고 하면 누가 떠오르죠?
예, <라합>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성을 공략하는 데에 협조하고, 마침내는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큰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삼손의 경우는 다릅니다. 삼손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이고 나실인이었습니다. 물론 여인을 사랑해서 혼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이방 여인을, 그것도 성경에 보면 정상적인 결혼관계도 맺지 않은, 그야말로 비정상적인 남녀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이제 블레셋 사람은 자신들의 원수인 삼손을 어떻게든 꾀어내어서 잡으려고 들릴라한테 지시를 해서 그 힘의 비밀을 캐려고 합니다.
사사기 16장 5절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이기어서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일천 일백을 네게 주리라”
만약에 진정한 사랑이었다면 들릴라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겠지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들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들릴라는 삼손보다도 돈에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밤이고 낮이고 못살게 굽니다. 자꾸만 캐묻습니다. 맨 처음에는 엉터리 답을 가르쳐줬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죠.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들릴라가 포기하겠어요? 그녀한테 사랑이란 없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주겠다고 한 돈밖에는 안중에 없어요. 그래서 삼손을 보기만 하면 그 비밀을 자기한테 알려달라고 피를 말립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사기 16장 16절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결국 그 비밀을 말하고 맙니다.
사사기 16장 17절,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이제 비밀을 알아낸 들릴라는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는 그 머리털을 밀어버립니다. 이제 신호를 보내자 블레셋 사람들이 들이닥칩니다. 들릴라는 삼손을 깨웁니다. 벌떡 일어난 삼손은 그 모습을 보고 힘을 쓰려고 합니다만, 이제 힘이 나지 않아요. 왜 힘이 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머리를 깎이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삼손이 힘이 셌던 이유가 단순히 머리를 안 깎아서 그랬어요?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머리를 기르면 모두 삼손처럼 될 수가 있나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삼손이 머리를 안 깎았다는 것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믿음을 지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방탕한 생활에 믿음도 약해지고, 마침내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망각한채 타락하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사사기 16장 20절입니다. 먼저 중반부까지만 보시겠습니다.
사사기 16장 20절, 중반부까지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만약에 머리털이 정말로 힘의 근원인데 머리를 깎았기 때문에 힘이 없어졌다면, 이 구절 마지막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야겠지요.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머리카락이 이미 깎인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라고 되어 있겠지요. 그러나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냐 하면, 사사기 16장 20절 전체를 보시겠습니다.
사사기 16장 20절,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라고 적혀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삼손을 떠나셨기에 힘을 쓸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 이유는 하나님이 변덕을 부려서요? 아니요, 삼손이 하나님을 저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떠나버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곁을 떠나신 후의 삶은 어땠습니까.
다음 구절 사사기 16장 21절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하나님이 버리신 삶, 하나님이 포기하신 삶은 너무나도 비참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그는 태어나기도 전에 천사가 와서 그의 탄생을 예고했습니다. 이런 일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탄생 때나 있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태어날 때에도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얼마나 영광된 삶이 예비되고 얼마나 축복된 인생이 약속되었습니까. 그런데 지금 신세가 어떻습니까. 그 찬란했던 과거는 완전히 사라지고, 삼손은 두 눈이 뽑힌 채로 감옥에 갇혀서 노역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합니다.
민수기 14장 43절에 보면,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삼손을 배반하신 것이 아닙니다. 삼손이 하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생하고 비참한 지경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나지는 않습니다. 오늘 말씀인 사사기 16장 22절을 봅니다.
사사기 16장 22절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이는 단순히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믿음이 다시금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을 모셔놓은 신전에서 큰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자리가 없어서 지붕에도 사람들이 올라가 있었는데, 그 지붕에 있던 사람들만 하더라도 3천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블레셋 사람들 자신들의 원수인 삼손을 불러와서 모욕을 주려고 했습니다. 이 때 삼손의 모습을 성경은 기록합니다.
사사기 16장 28절~30절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두 눈이 있고 축복 속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안 보이더니 두 눈이 뽑히고 고통 속에 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앞서 찬양에서도 있었지요?
내가 한 번은 버려졌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주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내가 과거에는 눈이 멀었었으나, 지금은 내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곡을 들으면 삼손과 욥이 생각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욥기 42장 5절을 봅니다.
욥기 42장 5절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렇게 풍요롭고 축복 속에 있을 때에는 주님께 대해서 그냥 귀로 들었을 뿐이었지만, 온갖 모진 고통을 겪고 났더니 이제 눈으로 주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삼손이 이방 여인, 블레셋 여인에 빠졌다는 것은 단순히 여자를 탐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대한 무거운 죄를 꼽는다면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간음’입니다. 그러나 이 ‘간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아닌, 쉽게 말하자면 바람을 피우거나 불륜을 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상숭배를 ‘간음’이라고 합니다.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은 꼭 무슨 동상을 세워놓고 거기에 절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섬기고 하나님이 아닌 재물을 섬기는 것 또한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신명기 4장 24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왜 하나님이 질투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저버리고 재물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고 세상을 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간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가 눈 먼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놀라우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사야 41장 17절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58장 9절 전반부,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예레미야 33장 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사사기 16장 22절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머리털이 자라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내가 지금, 우리가 지금 아무리 죄 가운데 있었다 할 지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나 자신이 누구입니까. 삼손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값없는 존재예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존재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려서 얻어진 존재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값없다고, 별볼일 없다고 여기십니까? 아니요. 절대로 그러면 안 됩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나 자신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독하는 일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모독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내 값어치, 내 영혼의 값어치는 다름아닌 예수님의 피값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 놀라운 은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고,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주님을 두 눈으로 바라보는, 주님을 바라보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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