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회 전능하사
2017년 2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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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7장 4절
"우리의 구원자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전능하사”全能なりし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날 특히 개신교 교회에서는 예배 중에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예배 순서에 사도신경이 있지요. 이른바 주기도문은 이름 그대로 주님이 주신 기도문, 즉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주신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 9절~13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름이 <사도신경>이라고 해서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설화도 있습니다만, 이는 불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사도신경이 과거에 한 번 만들어지고 그만이었던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수없이 변천을 거듭해왔습니다. 이 사도신경은 기도문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얼마 전에는 흥미로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 보면 <복음방송>이라고 하는 한국말로 나오는 기독교 라디오 방송이 있습니다. 이 방송국에서는 물론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합니다만, 주로 각 교회에서 협찬을 해서 설교 방송을 틀어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집에 있을 때에는 하루 종일 틀어놓으면 주로 로스앤젤레스나 그 인근지역에 있는 남부캘리포니아, 이를 미국 한인들 사이에서는 남가주라고 하는데, 주로 남가주 쪽에 있는 한인 교회의 설교들을 한 번에 꽤 많이 들을 수가 있습니다. 물론 시간이 정해져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 정도 여러 교회 설교들을 한 번에 들을 수 있는 건 참 귀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지역 목사님의 설교를 인터넷에서 들었는데, 그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당시 조금 작은 소동이 있었나봅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그 복음방송에서 방송된 설교 내용에 어떤 교회 목사님이, 사도신경을 외우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는 말씀을 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대로 방송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송국에서는 사과도 하고 그 교회 설교를 이제 더 이상 방송하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사도신경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분들한테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분이 교회 목사님한테 전화를 걸어서, 당신 교회에 다니려고 하는데 거긴 사도신경을 외우냐고 물어보더랍니다. 그래서 왜 그걸 물으시냐고 했더니, 사도신경을 외우는 교회는 이단이라고 자기가 들어서 그걸 확인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목사님이 전화로 말씀하기를, 저희 교회는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을 외운다고 해서 이단이 아닙니다. 저희 교회는 복음주의 교회이고……라고 하니까 그냥 끊어버리더랍니다.
여러분께서도 혹시 사도신경을 외우는 교회는 이단이다…뭐, 이런 엉뚱한 말씀을 들어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이 사도신경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교회를 어느 정도 다녀보신 분이라면 사도신경 정도는 안 보고도 외우실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저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분명히 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도 이 사도신경을 외우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면, 초대교회에서부터 중세에 걸쳐 성경이 형성되고 많은 신학과 교리가 나오게 되었습니다만, 그 중에는 성경에서 벗어나거나 해서 믿음이 바로 서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로 인한 크고 작은 마찰도 적지 않게 일어났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다보니 이를 어느 정도 정비할 필요가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주의 교회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신앙고백으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이 사도신경은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논쟁과 토론과 고민 끝에 완성된, 그야말로 우리의 신앙고백 중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사도신경을 보면 지금까지 오랜 역사 속에서 어떤 부분 때문에 다투어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신경은 어떻게 시작하죠?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여기에도 우리의 얼마나 많은 신앙고백들이 들어 있습니까.
하나님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 메시야,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 짧은 문장 안에 얼마나 많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들어 있습니까. 우리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만, 사실은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은 부분 하나하나가 쟁점이 되기도 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도 물론이지만, 이 사도신경에서도 은혜를 참 많이 받습니다.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세상에 보면 많은 문학작품들이 있습니다만, 어느분 말에 의하면 명작은 벌써 그 시작부터 다르다고 합니다. 일본을 보면 벌써 노벨문학상을 두 개나 땄지요. 그 중에서 첫 번째 작품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입니다. 눈의 나라…설국입니다만, 그 도입부가 어떻게 되냐 하면 이렇습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벗어나자 설국이었다……. 사실 원문이 아니라 번역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그 느낌이 좀 떨어집니다만, 그래도 어둡고 캄캄한 긴 터널, 검은빛 터널을 벗어났더니 완전히 다른 세상, 하얀 눈덮인 세상에 펼쳐졌다는 것입니다. 이 벌써 시작부터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힘이 좀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건 노벨상 수상작은 아닙니다만, 나츠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吾輩は猫である。名前はまだない 나는 고양이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이렇게 시작함으로써 이 소설은 고양이의 시각으로 적혀졌다는 것을 독자한테 직접적으로 알려줍니다. 지금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에 좀 신선도는 떨어지겠습니다만, 당시 이 책을 처음 접한 독자들한테 있어서는 상당히 충격적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첫 구절이 훌륭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이 성경을 따라올만한 작품은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창세기 첫 구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시작하죠?

예,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初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した。

제가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좀 어느 정도 읽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짧으면서도 황홀할만한 도입부로 장식된 책은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태초, 모든 것, 세계 만물이 시작하는 그 시점에 하나님께서 계셨으며, 그 분께서 천지,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조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만들어놓기만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적힌 책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일단 신약에 있어서는 인정하시겠죠? 신약성경은 마태복음에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으로 끝납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한 번 볼까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アブラハムの子孫、ダビデの子孫、イエス・キリストの系図。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은 어떻게 끝나죠?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るように。アーメン。

분명히 신약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은 어떨까요. 예수님은 신약에만 등장하시니까 신약에서만 주인공이신가요? 어떤 분은 구약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인공이시고 신약에서만 예수님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신약에서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い。

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초에, 즉 모든 것의 시작 바로 그 시점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이 없이 창조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17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御子は、見えない神のかたちであり、造られたすべてのものより先に生まれた方です。なぜなら、万物は御子にあって造られたからです。天にあるもの、地にあるもの、見えるもの、また見えないもの、王座も主権も支配も権威も、すべて御子によって造られたのです。万物は、御子によって造られ、御子のために造られたのです。御子は、万物よりも先に存在し、万物は御子にあって成り 立っています。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보다도 먼저 나셨으며,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뿐만이 아니라,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곳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서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까지도 예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신약에서만이 아니라 구약에서의 창세기 1장 1절부터 예수님께서는 이미 성경에 기록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죄악 속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에서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方なのに、神のあり方を捨てることができないとは考えないで、ご自分を無にして、仕える者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たのです。キリストは人としての性質をもって現われ、自分を卑(いや)しくし、死にまで従い、実に十字架の死にまでも従われたのです。

그리고 이제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내 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과 함께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そして、こう言われると、彼らに息を吹きかけて言われた。「聖霊を受けなさい。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에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를 가장한 다른 종교에서는 우리를 천사가 지켜준다고 하거나, 아니면 성령님을 그저 무슨 신비로운 바람이나 기운처럼 주장하는 곳도 있습니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천사가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빈 무덤 앞에서였습니다. 그 다음에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있은 후에는 천사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과거에 우리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을 때에는 감히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수도 없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주셔서 우리의 죄악을 모두 해결해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과 천사가 같습니까? 이는 전혀 다릅니다. 천사는 아무리 미가엘 천사장이라고 해봤자 똑 같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어떻습니까.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요,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이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 만드신 또다른 피조물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가끔, 아니, 종종 잊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가난한 청년이 꼭 타고 싶었던 여객선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여객선은 표값이 너무나 비싸요. 그래서 이 청년은 돈을 열심히 모아서 그 여객선 표를 샀습니다. 많은 돈을 모으지 못했기 때문에 표 중에서도 제일 싼 3등급짜리 표를 간신히 샀습니다.
이제 배가 출발합니다. 주변에는 멋지게 차려입은 신사들과 숙녀들이 넘쳐납니다. 그들의 화려함에 기가 죽어서 이 청년은 감히 어디를 나가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미소를 지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십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이제 자기가 가진 돈을 모두 탈탈 털어서 간신히 그 3등급짜리 표를 샀기 때문에 더 이상 돈이 없어요. 그래서 이제 배도 고프고 기운도 빠져서, 혼자 저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허기를 꾹 참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객선 승무원이 지나가다가 이 청년을 봤어요. 그래서 이 청년한테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느냐고, 어디 아픈데라도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말을 하죠. 자기가 이 배에 너무나도 타고 싶어서 열심히 돈을 모아서 표를 끊었는데, 이제 가진 돈이 없어서 밥도 못 사먹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승무원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손님, 이 배의 운임에는 모든 식사값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어서 가서 자유롭게 드시라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이 청년은 어떻게 했겠어요.
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청년은 이제 더 이상 허기에 시달릴 필요도 없습니다. 목마름을 참을 필요도 없습니다. 곧바로 식당으로 달려가서 차려놓은 음식들을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분은 나보다 조금 더 사람이에요?
나보다 조금 더 힘이 있는, 능력이 있는 천사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이 곧 성령 하나님이신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7절~11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v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捜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つかります。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ます。だれであれ、求める者は受け、捜す者は見つけ出し、たたく者には開(ひら)かれます。あなたがたも、自分の子がパンを下さいと言うときに、だれが石を与える
でしょう。また、子が魚(うお)を下さいと言うのに、だれが蛇を与えるでしょう。してみると、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は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には良い物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とすれば、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が、どうして、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下さらないことがありましょう。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구하는 방법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はそれをしましょう。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구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끔 기도하시는 분들 중에 겸손하게 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니, 겸손하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에요. 좋습니다. 그런데 기도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을 안 드리는 것이 겸손이에요? 그건 겸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은 이는 불순종이지요. 하지만 하라고 하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도 역시 불순종입니다. 우리가 사람한테는 해도 되는 말,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지요. 내가 또 이런 말을 저 사람한테 해서 저 사람이 상처 입으면 어쩌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건 당연히 생각해야지요.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냥 막 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기도는 어떻습니까. 특히 다윗의 기도를 보십시오. 다윗의 기도를 보려면 시편을 보면 됩니다. 저 너무나 속상합니다, 답답합니다. 저들을 아주 혼 내주세요…. 이런 기도가 넘쳐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십니까. 물론 원수를 그의 손에 붙여서 물리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한없은 은혜로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구해야 할 기도가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것까지 기도하면 들어주실까? 하나님한테 그런 능력이 있을까?
물론 너무나도 지나치거나 이기적인 탐욕으로 가득찬 기도를 드리면 안되겠습니다만, 기도를 하다 보면 하나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를 드리게 되고, 주님으로부터 응답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괜히 이뻐했습니까.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쏟아놓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무슨 멋있고 거창하고 어려운 말을 써야만 합니까.

물론 주일날 많은 분들 앞에서 드리는 대표기도 같은 경우에는 그래야겠지요. 하지만 은밀한 가운데에 드리는 기도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あなたがたは、人を再び恐怖に魏れるような、奴隷の霊を受けたのではなく、子としてくださる御霊を受けたのです。私たちは御霊 によって、「アバ、父。」と呼びます。

갈라디아서 4장 6절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そして、あなたがたは子であるゆえに、神は「アバ、父。」と呼ぶ、御子の御霊を、私たちの心に遣わしてくださいました。

자기 혼자 기도하는데 아~ 거룩하고 존귀하고 영화롭고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고 전지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지혜와 능력이 충만하시고 왕 중의 왕이시요 신 중의 신이신 아버지 하나님……이렇게 하면요, 내가 무슨 기도를 하려고 했는지 까먹습니다.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구한다구요? 예,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누구한테 구합니까. 무슨 신비한 바람이나 기운한테요? 나를 지켜주는 천사한테요?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들이 아빠한테 하듯이 구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이루어 주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 때에는 사도신경을 외워봅시다. 사도신경이 너무 길어요? 그렇다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만 외워봅시다. 외운다고 해서 무슨 주문처럼 외우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뜻을 깊이 곱씹어 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길어요? 그렇다면 “전능하사”, “전능하사”, 그래,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뭐가 무섭겠냐…하고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이사야 47장 4절
“우리의 구원자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

私たちを贖(あがな)う方、その名は万軍の主、イスラエルの聖なる方。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분은 시시한 분이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존재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요, 그 외아들 우리 주 독생자 예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고,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주님께 구하고,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고,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고,
그리고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그래서 기도의 응답과 차고 넘치는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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