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회 더욱 사랑
2017년 2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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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7절~8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더욱 사랑”より大きな愛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교회만으로는 생활이 좀 어렵기 때문에 평일에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해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어제 학교 사무실 앞을 지나가다가 보았더니 사무실 입구에 낯선 외국인 3명이 그 학교 출입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창문을 보니 사무실 안에는 물이 꺼져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냐고 하니까, 학교 입학 문제 때문에 문의할 게 있어서 온 학생들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담당자와 약속은 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약속은 안 했대요. 그럼, 오늘 여기 올 때에 전화를 하고 왔냐고 물었더니 전화를 안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 오늘이 무슨 요일인 줄 아느냐 했더니, 토요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 맞다. 토요일이다. 그런데도 왔냐고 했더니, 그 학생들이 하는 말이, 토요일이라도 12시 정도까지는 근무를 할 줄 알았다는 거예요.
저는 좀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래서, 아니, 우리 직원이 그런 말을 했느냐, 라고 했더니, 아니, 그냥 자기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저는 참 여러 가지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본은 기본적으로 토요일은 노는 날이다. 그리고 지금 시간이 몇 시냐”
다행히 그 친구들은 시계를 차고 있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이미 12시는커녕 1시도 아니고 2시가 다 되어갑니다. 그리고 이건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2월 11일은 일본 공휴일이더라구요.
그래서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했더니, 足利 시에서 왔다고 해요. 아시카가 시라고 하면 군마현도 아니고 이웃 토치기 현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걸렸냐고 하니까 1시간 반이나 걸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제가 검색을 해보니까 자동차로 오면 1시간이 좀 안 걸리는데, 전철을 타고 오면 대략 1시간 30~40분이 나오더군요.
자, 지금까지 이 3명의 외국학생들이 한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꼭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군마현에 있는 학교에 왔는데, 토요일이라도 1~2시 정도까지 가면 사람이 있겠지, 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하고 1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전철을 탔는지 아니면 운전하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시간과 돈을 들여서 왔다는 거예요. 한 명이라면 착각할 수도 있다고 한다지만, 멀쩡한 3명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전화 한 통 걸어보면 될 일을 3명 모두가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솔직히 안타깝다기 보다는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온 학생이냐고 물었더니, 어디어디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그 나라는 일본이나 한국과 비교하면 경제적으로도 대단히 낙후된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 나라에도 훌륭한 사람들은 많이 있겠지요. 하지만 이 학생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면, 그 나라의 미래는 그리 밝지만은 않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이 학생들이 그 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어쩌다가 한 번 그랬을까요? 오히려 그렇다기 보다는 그들이 갖고 있는 시간에 대한 개념은 항상 그 정도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마침 저기 담당자가 탄 차가 오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 분이 타고 있는 차에 가서 이러이러한 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라고 했더니만, 아니, 그 분도 당혹스럽죠. 갑자기 찾아왔으니 말이에요. 그러면서, 지금은 좀 볼일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좀 기다리라고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안으로 들여보내놓았습니다만 30분이 지나도 40분이 지나도 안 옵니다. 그게 그 담당자 책임이에요? 아니에요,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찾아온 그 학생들 잘못입니다. 결국 기다린 지 50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월요일에 다시 연락하고 오겠다고 하면서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지 20분 정도가 지나서 그 담당자는 왔습니다.

사실 한국도 옛날에는 그랬다고 합니다. 우스갯소리로 이른바 코리안 타임이라고 하죠? 이 코리안타임에 대해서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다음과 같이 나와 있었습니다.

“코리안 타임(Korean time)은 약속시간에 일부러 늦게 도착하는 행동이나 그 버릇을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한국 전쟁 때 주한 미군이 한국인과 약속을 한 뒤 약속시간보다 늦게 나오는 한국인을 좋지 않게 생각하여 '한국인은 약속 시간에 늦게 도착한다. 이것이 한국인의 시간관이다.' 라고 하여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한국전쟁 때라고 하면 1950년대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시계도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도 통할지는 모르지만, 사실 이 코리안 타임이라고 하는 말이 꽤나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한국도 참 경제적으로 낙후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대체적으로 본다면 이 시간관념과 경제적 수준은 비례하는 부분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시간을 안 지키니까 가난한 것인지, 아니면 가난하니까 시간을 못 지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는 있겠습니다만, 어찌되었든 이 시간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학생들은 시간관념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시간관념만의 문제였다면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일 뿐이겠지요. 하지만 이 학생들은 시간이고 뭐고를 떠나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자기들이 멋대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기들 생각에 오늘은 토요일이지만 담당자들이 있을 줄 알았고, 자기들 생각에 1~2시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토요일에 적어도 몇 천엔의 돈과, 왕복하고 기다리고 하는 시간을 들이게 됐고, 결국 기다리는 것도 도중에 포기해서 그 날에 자신들이 하고자 했던 일은 하나도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을 한 번 볼까요?

마태복음 15장 1절~3절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そのころ、パリサイ人や律法学者たちが、エルサレムからイエスのところに来 て、言った。「あなたの弟子たちは、なぜ昔の先祖たちの言い伝えを犯すのですか。パンを食べるときに手を洗っていないではありませんか。」そこで、イエスは彼らに答えて言われた。「なぜ、あなたがたも、自分たちの言い伝えのために神の戒めを犯すのですか。

이 구절만을 읽으면 좀 이상한 생각이 들게 됩니다. 아니, 식사 하시기 전에 손 씻으라고 한 건데 그걸 가지고 왜 화를 내셨을까.

그런데 이 의문은 마가복음 7장 3절~4절을 보면 풀립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パリサイ人をはじめユダヤ人はみな、昔の人たちの言い伝えを堅く守って、手をよく洗わないでは食事をせず、また、市場から帰ったときには、からだをきよめてからでないと食事をしない。まだこのほかにも、杯、水差し、銅器を洗うことなど、堅く守るように伝えられた、しきたりがたくさんある。―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이 구절을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느냐 아니면 씻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생각하면 이는 큰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만들어낸 방식대로 행하라고 예수님이나 그 제자한테 강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15장 4절~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神は『あなたの父と母を敬え。』また『父や母をののしる者は、死刑に処せられる。』と言われたのです。それなのに、あなたがたは、『だれでも、父や母に向かって、私からあなたのために差し上げられる物は、供え物になりましたと言う者は、その物をもって父や母を尊んではならない。』と言っています。こうしてあなたがたは、自分たちの言い伝えのために、神のことばを無にしてしまいました。

십계명 중에서 제5계명에는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는데, 그 부모한테 가서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私からあなたのために差し上げられる物は、供え物になりました ”라고 말하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히 부모를 공경한 것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하나님께서 언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니에요. 하지만 이는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머리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걸 지키라는 거예요.
그것뿐인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만든 논리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긴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안식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1장 15절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六日間は仕事をしてもよい。しかし、七日目は、主の聖なる全き休みの安息日である。安息の日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그런데 이 안식일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시는 것을 두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고 해서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안식일에 행하면 안 되는 일들을 바리새인들은 수도 없이 많이 만들었습니다. 아주 세부적으로 이것을 하면 안 된다, 저것을 하면 안 된다고 해서 대단히 까다롭게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잘 믿도록 하기 위해서요?

예를 들어서 독재자가 등장하면 대체적으로 그들은 반드시 법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매우 까다로운 법을 만들었지요. 그 이유를 그들은 나라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한국만 보더라도 어떻습니까. 유신헌법이나 무슨 헌법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긴급조치다 뭐다 해서 수많은 법을 만듭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괴롭히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들은 나라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그와 같은 법을 만들었나요? 아니요, 그들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만들었던 것입니다.
외국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행위를 보십시오. 그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살해했습니다. 그 살해한 수가 600백만에서 많게는 2000만명까지 추산된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그가 저지른 행위는 모두가 불법이었나요? 아니요. 모두가 합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항해서 싸운다는 것은 모두가 불법행위였던 것입니다. 왜죠? 그것은 그와 같은 법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 독재자였기 때문입니다. 일제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에 대항한 독립투사들은 모두가 불법행위를 저지른, 말하자면 범법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나치에 대항해서 싸운 사람들이나 일제에 대항해서 싸운 독립투사들이 범법자라고 해서 비난을 받아야 하나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와 같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잡은 독재자나 잡은 세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있지도 않은 논리와 주장으로 그럴 듯한 말들을 총동원해서 법을 만들고 규칙을 만들고, 그리고 이를 따르라고, 이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와 같은 전통을 만든 것은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이것저것 붙여서 만들어 놓았던 것이고, 하물며 예수님한테까지도 이를 따르도록 강요한 것이니, 이게 얼마나 어이없는 노릇입니까.
오늘날 교회에도 보면 여러 가지 규칙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을 하면 안 된다. 물론 그와 같은 규칙이 모두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두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성경에 부합된 것인지를 분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바리새인들이나 독재자들은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다면, 그렇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법은 어떨까요. 역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법도 하나님의 권력과 권위를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은 여느 독재자들처럼 우리를 짓밟고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를 괴롭히면서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우리의 영혼을 위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법을 지켜라…라고 하면 무슨 골치 아프고 힘든 것처럼 들릴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신호를 지키라는 것은 권위나 권력을 위한 것인가요? 빨간 신호에는 건너지 말아라, 파란 신호라도 깜빡 거릴 때에는 건너지 말아라, 전철을 기다릴 때에는 좀 더 뒤로 와서 서 있어라. 운전을 할 때에는 차간 거리를 넓혀라. 이것이 권위나 권력입니까? 바로 이런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말씀에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내 생각으로 노력을 해서 열심히 믿음 생활도 하고 그랬는데, 나중에 내 성적표를 받아보니 완전히 점수가 바닥이에요. 그러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이는 바로 내 생각만 중요시하고 하나님 생각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바라는 삶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른바 십자가 계명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そこで、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心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知力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せよ。』これがたいせつな第一の戒めです。『あなたの 隣人をあなた自身のように愛せよ。』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たいせつです。律法全体と預言者とが、この二つの戒め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는 우리에게 친숙한 말씀이기도 합니다만, 반면에 대단히 어려운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그래요, 이건 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이건 정말 어떻게 해야 할 수 있을까요? 정말 목숨을 걸고, 지금 당장이라도 순교할 작정을 하고, 이를 악 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인가요?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고 계신 걸까요?
물론 과거에 보면 우리 주님을 믿는 것이 목숨을 걸만한 일이었던 적도 있습니다. 지금 북한 같은 곳에서도 한 번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도, 성경책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마음껏 예배를 드리고 성경책은 여기저기에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가장 알기 쉬운 것이 남녀간의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그리고 우리를 신부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33절~35절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彼らはイエスに言った。「ヨハネの弟子たちは、よく断食をしており、祈りもしています。また、パリサイ人の弟子たちも同じなのに、あなたの弟子たちは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います。」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 花婿がいっしょにいるのに、花婿につき添う友だちに断食させることが、あなたがたにできますか。しかし、やがてその時が来て、花婿 が取り去られたら、その日には彼らは断食します。」

고린도후서 11장 2절 초중반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というのも、私は神の熱心をもって、熱心にあなたがたのことを思っているからです。私はあなたがたを、清純な処女として、ひとりの人の花嫁に定め、キリストにささげることにしたからです。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마지막 날, 구원의 날에 예수님 품에 안기는 것이 그야말로 혼인잔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 예수님을 섬겨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답이 나오게 됩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어느 정도로 사랑하냐 하면 내가 결혼 상대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때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이는 분명 틀림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을 일주일에 한 번만 생각해요? 일주일에 한 번만 생각하고 나머지 6일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삽니까? 과연 그래도 되는, 그 정도 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평생을 같이 살아요?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와 같은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내가 이 정도로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교회 한 번 나가고 헌금 내고, 또 십일조 내고 뭐 그러면 되는 거 아냐? 뭘 더 해?
하지만 그런 생각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생각이 바로 그런 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제 천국 문 앞에서 서성입니다.

이상하네.
내 생각에는 이 정도 했으면 천국 문이 열릴 줄만 알았는데.
내 생각에는 이 정도 했으면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실 줄 알았는데,
내 생각에는 이 정도로 헌금도 내고 십일조도 내고 했으면 예수님이 나를 칭찬해줄 줄 알았는데,
내 생각에는 이 정도로 교회도 오래 다니고, 직분도 받았으면 천국 천사들이 나를 환영해 줄 알았는데…….
이상하네…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문은 잠겨있고 아무도 안 열어주네…
바로 그때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12절,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しかし、彼は答えて、『確かなところ、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と言った。

만약에 그러신다면 이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더 무서운 구절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23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その日には、大ぜいの者がわたしに言うでしょう。『主よ、主よ。私たちはあなたの名によって預言をし、あなたの名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あなたの名によって奇蹟をたくさん行なったではありませんか。』しかし、その時、わたしは彼らにこう宣告しま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全然知らない。 不法をなす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て行け。』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다음에 다시 와라”라고 하셨더라면 그래도 기회는 있습니다만,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해. 떠나 가”라고 하신다면, 이는 말 그대로 사형선고나 다름없겠지요.

이 모두가 다 내 생각만 하고 내 생각대로 신앙생활을 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우리 생각해봅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 사람보다 나를 사랑하나요?
내가 그 사람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나요?
내가 그 사람보다 나를 더 소중하게 여기나요?
만약에 그렇다면 결혼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죠.

내가 진정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나 자신보다도 그 사람을 더욱 사랑할 것이요,
나는 나 자신보다도 그 사람을 먼저 생각할 것이요,
나는 나 자신보다도 그 사람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 아니겠어요?

에이,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냐구요? 여기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5장 7절~8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正しい人のためにでも死ぬ人はほとんどありません。情け深い人のためには、進んで死ぬ人があるいはいるでしょう。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ったことにより、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身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우리가 의인이나 선인일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주셨다는 것이 성경에 이미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바라지는 않으십니다.
제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팔 굽혀 펴기나 윗몸 일으키기를 할 때에, 한 두 번 정도는 괜찮습니다만 안 하나가 하면 서른 번도 힘듭니다.

자, 스물 여덟, 스물 아홉…그리고 이를 악 물고 서른 번을 했습니다. 간신히 했어요. 많은 사람들은 거기서 멈춥니다. 그런데 정말로 근육이 생기는 순간은 그 때가 아니랍니다. 그럼 언제냐. 바로 그 다음, 이를 악 물고 발발 떨면서 서른 번째를 한 바로 그 다음에 한 번 더 할 때! 그 때 진정으로 근육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만에 운동을 하면 어떻습니까. 근육통이 옵니다. 안 하던 운동을 했기 때문에 여기저기가 쑤셔요.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오랜만에 운동을 했는데 다음 날에 몸이 멀쩡해요. 근육통이 안 느껴져요.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답은 간단합니다. 운동 헛 한 거예요. 근육통이 있어야 근육이 생긴다는 증거이지, 근육통이 없다면 이건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 안에서는 어떨까요. 여러분께서도 지금까지 믿음 생활을 잘 해 오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조금 더, 지금까지 해왔던 믿음 생활보다 조금만 더 우리 주님을 사랑해봅시다. 그게 어려운 것 아닙니다.
내가 만약 일주일에 한 번만 예수님을 생각했다면, 이제부터는 두 번, 그리고 세 번, 네 번, 그리고 매일 매 순간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
내가 만약 일주일에 한 번만 성경 말씀을 묵상했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두 번, 세 번, 그리고 항상 성경말씀을 묵상하게 되는 것,
별 것 아닌 것 같으신가요?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지름길인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안 하던 일을 하면요, 몸이 피곤해집니다. 안 읽던 성경 읽으려니 눈이 침침합니다. 주일 예배만 가다가 수요예배 가고 새벽예배 가려니 몸도 피곤합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 안에서의 근육통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면 믿음이 놀라울 만큼 성장하게 되는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내가 지금보다
항상 내가 나 자신보다도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항상 내가 나 자신보다도 예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항상 내가 나 자신보다도 예수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을 보냄으로 인하여,


마지막 날에 내가 다가가자 문이 활짝 열리고 마태복음 25장 21절과 23절의 말씀처럼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その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あなた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私はあなたにたくさん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 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하고 예수님께서 기뻐 맞이해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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