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회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믿음
2017년 3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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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4절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믿음”備えれる神様を待つ信仰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있는 창세기 22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십니다.

창세기 22장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神は仰せられた。「あなたの子、あなたの愛しているひとり子イサクを連 れて、モリヤの地に行きなさい。そしてわたしがあなたに示す一つの山の上で、全焼のいけにえとしてイサクをわたしにささげなさい。」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번제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을 불로 태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그 손으로 죽이고 불로 태워서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창세기 22장에서는 놓치지 말아야 할 말씀이 몇 군데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구절 바로 앞에 있는 1절입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これらの出来事の後、神はアブラハムを試練に会わせられた。神は彼に、「アブラハムよ。」と呼びかけられると、彼は、「はい。ここにおります。」と答えた。

즉,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이유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당연히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들을 모리아 땅에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번제로, 그러니까 그 아들을 죽이고 불로 태워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것만 들어도 끔찍한 사실입니다만, 끔찍한 건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삭이 어떻게 해서, 얼마나 기다려서 얻어진 아들입니까. 아브라함이 자신이 살던 땅인 하란에서 나온 게 75세 때의 일입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해줄 것이라는 말씀만 믿고 하나님의 명을 따라 나섭니다만, 큰 민족은커녕 그 나이 때까지 아들 하나 없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를 주지 않자, 어떻게 합니까.

창세기 16장 2절,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サライはアブラムに言った。「ご存じのように、主は私が子どもを産めないようにしておられます。どうぞ、私の女奴隷のところにおはいりください。たぶん彼女 によって、私は子どもの母になれるでしょう。」アブラムはサライの言うことを聞き入れた。

사래가 생각하기를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를 낳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지도 않으셨는데,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여종으로 하여금 아들을 낳도록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나다를까 이로 말미암아 그 집안에 불화가 생깁니다.


창세기 16장 4절,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彼はハガルのところにはいった。そして彼女はみごもった。彼女は自分がみごもったのを知って、自分の女主人を見下げるようになった。

하갈의 신분은 분명히 여종이었습니다만, 이제 자신이 아이를 갖게 되니까, 그것도 주인의 자식을 갖게 되니까, 이제는 주인과 여종이 아닌, 똑 같은 여성으로서 자신이 주인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거만한 생각으로 인해서 이제 주객전도가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니까 집안이 콩가루가 됩니다. 이것이 다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 자신의 생각을 의지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나중에는 이름을 사라로 하나님께서 바꾸어 주십니다만, 이 사라가 믿음이 없어서 그랬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그랬다…라고 비판하기는 쉽습니다만, 그렇게만 몰아세우면 사라가 불쌍합니다. 과연 사라한테 믿음이 없어서 그랬어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글쎄요. 나중에 천국에 가서 사라를 만나서는, “사라 할머니, 아니, 그 때 좀 더 기다려보지, 왜 그러셨어요?”라고 묻는다면 사라는 어떻게 대답할까요?
이건 당연히 상상입니다만, 아마도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성경 안 읽어봤어요? 나도 할 만큼 했어요.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니까요.”

그렇다면 성경에 뭐라고 나와있길래 그럴까요?

창세기 16장 16절을 봅니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ハガルがアブラムにイシュマエルを産んだとき、アブラムは八十六歳であった。

이렇게 보면 사래가 하갈을 아브라함한테 주었을 때의 나이는 아브라함이 85세 때겠지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나선 게 75세 때였다고 하니, 아브라함도 그렇고 사라도 그렇고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적어도 10년은 기다렸던 것입니다. 사라에게 기다리는 믿음이 없었다면 1~2년도 채 되지 않아서 벌써 하갈을 주던지 해서 아들을 낳으라고 했겠지요. 하지만 사라는 기다렸습니다.

그것도 10년 동안이나 기다렸습니다.
어쩌면 그 기다리는 동안 아브라함한테 잔소리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준다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왜 안 주세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뭐라고 했을까요?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으니 주실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니까.
하지만 5년을 기다려도 6년을 기다려도, 그리고 8년을 기다려도 9년을 기다려도 아무런 응답도 없습니다.

이제 10년째로 접어듭니다. “여보, 이제 기다릴 만큼 기다렸어요. 10년이나 기다렸으면 이제 된 거 아니에요? 아무래도 응답이 없으니 이제 하나님이고 뭐고 내 말대로 하세요.”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10년이나 기다렸는데…하면서, 기다리다가 지쳐서 그렇게 해서 사라의 말을 듣게 되었는지도 모르죠. 이렇게 본다면 사라도 믿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2년도 아닌 10년이나 기다렸습니다.
혹시 어떤 기도제목을 갖고 10년 동안 기도해보신 적 있으세요? 아무리 기도를 해도 10년 동안 응답을 못 받아보신 적이 있으세요? 10년 동안 기다린다는 것만 보더라도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10년이 긴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아직>이었습니다. 더 기다려야 했었던 것이지요.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성취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지요.

창세기 21장 5절,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アブラハムは、その子イサクが生まれたときは百歳であった。

즉,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지 25년 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아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하지만 그 가정에는 아직도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생각으로 얻어진 결과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이스마엘 또한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소중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한테는 어떻겠어요. 사라에게 있어서는, 엄밀히 따지자면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습니다. 더구나 그 이스마엘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괴롭힙니다.


창세기 21장 9절,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そのとき、サラは、エジプトの女ハガルがアブラハムに産んだ子が、自分の子イサクをからかっているのを見た。

성경을 보면 ‘애굽’은 항상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분명히 아들을 주신다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 않고 애굽 여인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었다는 것 역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내 생각대로 하게 되면, 그 때는 그게 가장 좋은 생각처럼 여겨진다 하더라도 이렇게 불화가 끊이지 않고, 수많은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습니다. 즉, 이제 그 가정에서 아브라함의 자식은 이삭 하나만 남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 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정말 타이밍도 절묘합니다.

어쩌면 이스마엘이 있을 때 이러셨다면 아브라함이, “그래, 이삭을 바치더라도 이스마엘이 있으니까…….”

뭐, 설마 친자식인데 그럴 리도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100만분의 1이라도 그런 생각을 할까봐. 그나마 있던 이스마엘도 내쫓은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자그마치 25년 만에 얻어진 아들입니다. 그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불로 태워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アブラハムは大声をあげて叫び、泣き明かした。

뭐, 이런 구절이 있어야 될 것도 같은데, 그런데 어디에도 그런 구절이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오히려 담담합니다.


창세기 22장 3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翌朝早く、アブラハムはろばに鞍をつけ、ふたりの若い者と息子イサクとをいっしょに連 れて行った。彼は全焼のいけにえのためのたきぎを割った。こうして彼は、神がお告げになった場所へ出かけて行った。

하나님의 이런 끔찍한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냐 하면 담담하게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릴 준비를 하고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안이 없었겠습니까. 그랬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이 아브라함의 심정을 가늠할 수 있는 구절이 4절입니다.

창세기 22장 4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三日目に、アブラハムが目を上げると、その場所がはるかかなたに見えた。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잔인하게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산을 바라보고 아브라함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아마도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망설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걸까. 이 길이 정말 맞는 길일까…… 참 많은 생각을 하면서 저 멀리 있는 산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결단을 합니다. 여기 또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음 5절 말씀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それでアブラハムは若い者たちに、「あなたがたは、ろばといっしょに、ここに残っていなさい。私と子どもとはあそこに行き、礼拝 をして、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戻って来る。」と言った。

이 구절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일행더러 거기 기다리라고 하고, 아브라함과 이삭만 가서 번제를 드리고 온다면, 갈 때는 둘이서 가겠습니다만, 올 때는 한 사람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私と子どもとはあそこに行き、礼拝をして、私が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戻って来る。

라고 되어야죠.

하지만 분명히 “우리가”라고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이 ‘우리’라고 하는 부분이 개역한글에는 없었습니다만, 개역개정이 되면서 추가되었습니다. 아마도 문법상 이 복수형이 어디에 걸리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영어 번역을 보더라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나만 오겠다”가 아닌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오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먼 산을 바라봅니다. 세상적인 방법, 사람의 생각대로 해봐야 근심, 걱정, 불화만 생겼더라.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대로 한다면, 내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지만,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을 이루실 것이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우리가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이 서고 난 다음에는 아브라함은 이제 무서울 게 없습니다. 겁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방법을 버린 그는 이제 망설일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7절~8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イサクは父アブラハムに話しかけて言った。「お父さん。」すると彼は、「何だ。イサク。」と答えた。イサクは尋ねた。「火とたきぎはありますが、全焼のいけにえのための羊は、どこにあるのですか。」アブラハムは答えた。「イサク。神ご自身が全焼のいけにえの羊を備えてくださるのだ。」こうしてふたりはいっしょに歩き続けた。


아들 이삭이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 드릴 게 없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그랬더니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걱정 말아.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직접 준비하실 거야. 이렇게 답합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한테 뭔가 보였어요? 아니요. 그러나 이제 아브라함은 세상을 의지하는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믿는 아브라함이 된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 나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을 거야.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실 거야.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된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갖고 담담하게 아들을 번제로 드릴 준비를 합니다.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이삭을 결박해서 나무 위에 앉혀놓습니다. 그리고 칼을 들어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세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스톱! 됐어! 오케이! 그 아이한테 손을 대지 마. 그만 하면 됐어. 이제 너의 믿음을 알았다.
그제서야 둘러보니 어때요?


창세기 22장 13절,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アブラハムが目を上げて見ると、見よ、角をやぶに引っかけている一頭の雄羊がいた。アブラハムは行って、その雄羊 を取り、それを自分の子の代わりに、全焼のいけにえとしてささげた。

그의 믿음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자신을 위해서 준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숫양을 번제로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받습니다.

창세기 22장 16절~18절,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仰せられた。「これは主の御告げである。わたしは自分にかけて誓う。あなたが、このことをなし、あなたの子、あなたのひとり子を惜しまなかったから、わたしは確かにあなたを大いに祝福し、あなたの子孫を、空の星、海辺の砂のように数多く増し加えよう。そしてあなたの子孫は、その敵の門を勝ち 取るであろう。あなたの子孫によって、地のすべての国々は祝福を受けるようになる。あなたがわたしの声に聞き従ったからである。」

아브라함이 이와 같은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된 이유는 바로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준비하십니까. 오늘 본 아브라함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친히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음? 그렇다면 우리와는 상관이 없어?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통해서 받으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우리에게 인간적인 노력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인간이 나약해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노력을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라고 합니다. 힘써 애쓰고 땀을 흘리며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준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답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를 보시면 압니다. 첫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 모든 것을 만들어놓으시고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즉,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99%가 아니라 100% 완벽한 세상을 준비하신 다음에 우리를 만들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연의 구조형태입니다. 자연은 이른바 먹이사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쉽게는 약육강식이라고 합니다만, 강한 것은 약한 것을 잡아먹게 되어 있고, 그렇다고 그럼 제일 강한 것은 먹기만 하나요? 아니요. 제일 강한 것이 죽으면 또 약한 것이 그것을 잡아 먹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연 생태계가 돌아가는 것입니다만, 이 먹이사슬 안에는 인간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즉, 인간이 있건 없건 자연 생태계는 돌아가게끔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 이유가 바로 이 세상 모두가 우리 인간을 위해 준비된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사역에, 인간이 하나라도 거들어드린 것이 있나요? 아니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준비한 것이 있었나요?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준비를 다 마친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천지창조 때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준비할 수가 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아무 것도 준비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준비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의지합니다.

그것이 과연 최선인가요? 생각해보십시오. 정말로 그렇다면 하나님이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 아멘.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질문하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글쎄요. 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나를 사랑하시고 내 죄를 속해주시고…나를 구원해주시고……그런 거 아니에요? 라고 말씀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틀린 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귀한 믿음의 고백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다림>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믿음이다, 좋은 믿음이다, 뜨거운 믿음이다 한다 하더라도, <기다림>이 없는 믿음은 헛것입니다. 큰 것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합니다, 금식을 합니다, 철야를 합니다…그런데 응답도 못 받고 며칠 못 가서 포기하고 만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주님~ 믿습니다~ 하고 하면서 결국 좀 있다가 안 되니까, 금방 내 방법대로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은, 좋은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좋은 믿음은커녕 오히려 아브라함과 사라가 범했던 잘못처럼, 하갈과 이스마엘로 인한 경우같이 근심이 생기고 불화가 생기고 하는 원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기다려? 그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다가 늙어 죽겠다……혹시 그런 생각 해보셨나요?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을 하셨는데 그거 기다리다가 결국 늙어 죽었더라…….

그런 기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약속과 그 응답은 하나님께서 최고로 우리에게 주시는 응답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얻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내가 너무나도 못났기 때문에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을 안 해주시는 것 아니야? 라고 걱정되십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응답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죄에 물든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나 죽으나, 아침이나 밤이나 예수님을 붙잡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안 계시면, 예수님의 갈보리 십자가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설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축복을 받을 자격이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일만 일어나나요? 만사형통이에요? 안 좋은 일은 하나도 안 일어나나요?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고 슬프거나 괴로운 일은 없나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々、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従って召された人々のためには、神がすべてのことを働かせて益としてくださ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결국에는 우리는 잘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결국에는 우리는 축복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결국에는 우리는 응답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결국에는 우리는 건강이 회복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결국에는 우리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주시는, 우리를 위해 최고를 준비해주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나 생각대로 보면 눈에는 안 보이고, 귀에는 안 들리고, 손에는 안 잡힌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다림의 믿음을 갖고, 마침내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주신, 최고의 문제 해결과, 최고의 건강 회복과, 최고의 응답과, 그리고 최고의 축복을 받으시는, 그리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크나큰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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