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회 최고의 신앙고백
2017년 3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최고의 신앙고백”最高の信仰の告白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큰 위로의 말씀을 해주시는 장면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우리더러 염려를 하지 말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あなたがたのうちだれが、心配したからといって、自分のいのちを少しでも延ばすことができますか。

마태복음 6장 31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そういうわけだから、何を食べるか、何を飲むか、何を着るか、などと言って心配するのはやめなさい。

이렇게 미래의 일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철학이다 지식이다 하면서 사람이 만들어낸 학문으로 우리의 삶을 이해하려는 사람들 중에는 이른바 운명론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의 삶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아무리 좋게 바꾸려고 해봤자 소용없다.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고 다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비단 서양의 철학자만은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사주팔자에 토정비결입니다. 매일 신문에는 ‘오늘의 운세’가 실려 있습니다. 새해에는 토정비결을 봅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으면 무슨 부적이다 굿이다 하면서 온갖 난리를 칩니다.
이와 같은 생각들을 잘 살펴 보면 서로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운명론자들은 자신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또 바꿀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바꿀 수가 있어요? 비싼 돈을 바쳐서 부적을 사거나 굿판을 벌이면 바꿀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 쉽죠? 조금만 생각하면 됩니다. 이 주장의 본질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그 사람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렇게 해서 그 사 람들로부터 경제적인 이익, 다시 말해서 돈을 빼앗으려는 의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왜 사주팔자를 보고, 오늘의 운세를 보고, 점을 치고 부적을 사고 굿판을 벌입니까. 그것은 바로 <염려>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염려>를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반대로 염려를 전혀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할 때에 거울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사람이 걱정하고 염려할 때의 얼굴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그 얼굴이 어떤가요? 방실방실 웃으면서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이 있던가요? 밝게 활짝 웃으면서 내일 일들을 걱정하고 그런 분들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만약에 그런 분이 계시다면, 어떻게 해드려야 해요? 예, 잘 보살펴드려야 합니다. 정확히 어디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그분은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서 그 분을 적절한 곳으로 모셔다 드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걱정하고 염려할 때에 얼굴은 어두워지고 미간……눈썹과 눈썹 사이에 주름이 깊게 파이게 됩니다. 아무리 비싼 화장품을 쓰고 비싼 마사지를 받는다고 해도, 노상 얼굴에 걱정과 염려가 가득 차 있어서 주름을 짓고 있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또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얼굴을 누가 하고 있어요? 예, 만약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노상 아침이나 밤이나 얼굴에 걱정과 근심과 염려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맨날 얼굴에 밤이고 낮이고 우거지상을 짓고 있으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역시 뭐라고 말을 해주시겠습니까.
“걱정하지 말아. 염려하지 말아” 라는 말을 해주시기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도 내 마음이 아픈데,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 있다면 얼마나 마음 아파 하시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오늘 우리에게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염려를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한 대학 수업에서 교수님이 물을 컵에 따르더니, 그 물이 들어 있는 컴을 든 채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묻습니다.
“이 컵 무게가 얼마나 나갈까요?”
그러자 몇몇 학생들이 대답합니다.
“200그램이요! 300그램이요!”
그러자 이 교수님이 대답합니다.
“저는 이 컵의 무게를 달아보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그런데 내가 몇 분 더 들고 있으면 무게는 어떻게 될까요?"
그러자 학생들이 뭐라고 해요?
“똑 같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걸 10분 정도 이렇게 들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니까 학생들이 웃으면서 말합니다.
“교수님 팔이 조금씩 아파올 겁니다.”
이 말을 들은 교수님은 말합니다.
“그래요. 벌써부터 조금씩 아파옵니다. 자, 그렇다면 하루 종일 들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자 어떤 학생이 말합니다.
“이제 교수님 팔이 무감각해지고, 심각한 근육 경련과 마비가 올 거고…… 그렇게 되면 아마 교수님은 병원에 누워 계시겠죠!”
이렇게 이야기를 하자 모든 학생들이 웃었습니다.
교수님은 이 대답을 듣고 다시 질문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게 될 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내가 이 컵을 들고 있음으로 인해서 이 컵의 무게가 바뀌었나요?”
이 말을 들은 학생들은 조금 당황합니다.
“아니요……”
학생들은 조용한 말로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교수님이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내 팔과 근육을 아프게 했나요?"학생들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합니다.
내가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러자 학생들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컵을 내려 놓으세요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시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 하시려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물컵을 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물컵을 들고 있으면, 내가 이렇게 내 스스로의 힘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감당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이 컵이 가벼워지겠지…… 그리고 열심히 힘들어합니다. 열심히 어려워합니다. 이 컵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봐도 물이 안 줄어요. 기를 쓰고 물을 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리 참고 견디고 해봐도 물이 안 줄어요.
생각해보십시오. 물이 줄어드는 게 빠르겠습니까. 내 팔이 아파오는 게 빠르겠습니까. 아무리 힘이 강한 장사라고 하더라도 물컵을 이렇게 손을 뻗은 상태에서 들고 있으라고 해서 1시간 이상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 그렇다고 해보지는 마세요. 시간이 아깝고 힘도 아깝습니다.
그렇다면 이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하, 내가 이 물컵을 들고 있어봤자 소용 없구나. 이러고 있어봤자 물은 줄어들지 않고 내 팔만 아프구나.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요? 그렇습니다. 컵을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걱정 근심 고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래요. 걱정도 하고 근심도 하고 고민도 해야겠지요. 예를 들어서 수학문제가 안 풀려요. 돈 계산이 안 맞아요. 그럼 열심히 공부를 하거나 계산을 해서 어디에서 틀렸는지 어기를 내가 모르는 지를 알아내야겠죠. 하지만 그건 생각이고, 연구이고 공부이지 염려나 걱정 근심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진정한 염려나 걱정 근심이란 무엇일까요?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라는 사람이 쓴 느리게 사는 즐거움(Dont Hurry, Be Happy)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고,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고,
걱정의 22%는 안 해도 될 사소한 것이고,
걱정의 4%는 우리 힘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고,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다

즉, 이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가 맨날 밥 먹듯이 하는 걱정 근심 염려 중에서 96%는 우리가 아무리 해봤자 아무런 소용 없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걱정의 정체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4%는 이게 진짜 걱정 근심 염려인가요? 아니에요. 이건 걱정 근심 염려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서 주일 아침에 몇 시까지 교회에 가야 할까. 예배가 11시에 시작하니까 11시까지 가면 될까? 아니, 조금 더 일찍 가서 찬양이라도 함께 부르고 시작해야지. 아냐아냐, 조금 더 일찍 가서 조용히 기도도 하고 그래야겠다. 그러려면 몇 시쯤에 집을 나설까…… 어떠세요? 너무 쉬우신가요? 이런 것이 바로 4%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에이, 홍목사. 어디 세상에 그런 것만 있나. 예를 들어서 무슨 사업을 시작하려고 한다거나 한다면 걱정 되는 게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럼 그것도 4%야?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솔직히 그렇죠. 내가 내 능력으로 한다 하더라도 내 힘만으로 되는 일이 알고 보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답이에요?
아까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한 질문으로 잠시 돌아가보고자 합니다. 교수님이 컵을 오래 들고 있으면 팔이 아파온다고 했습니다. 이는 누가 봐도 당연한 사실이겠지요. 하지만 교수님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내 팔과 근육을 아프게 했나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이 컵을 들고 있는 내 팔과 근육을 아프게 했습니까.
혹시 이 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컵이 그렇게 큰 잘못을 했나요? 알고 보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이 컵이 아니라, 이 컵을 이렇게 들고 있으면 가벼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의 생각, 바로 그 생각 때문에 내 팔과 근육이 아파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이 컵을 버려야겠습니까. 아니면 내 생각을 버려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두 가지 이유를 다시 한 번 정리해본다면, 첫째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이요, 둘째는 우리가 아무리 염려해봤자 소용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컵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예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잊어버린다? 그건 어떻게 보면 책임회피죠.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걱정과 근심과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주님을 의지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 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면, 내가 나 자신의 힘으로는 그 사람의 하는 일을 해결해줄 수 없을 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걱정하는 것이 마음이 아프니까, 염려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 됐으니까, “걱정하지 말아, 염려하지 말아” 라고 말을 해줍니다만,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모든 걱정과 근심과 염려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 직접 “걱정하지 말아. 염려하지 말아”라고 말씀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마음이 든든합니까. 이것보다 더욱 확실한 말씀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가 염려해봤자 우리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해결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 비밀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가 하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だから、あすのための心配は無用です。あすのことはあすが心配します。労苦はその日その日に、十分あります。

이 성경말씀이 과거의 개역한글에서는 어떻게 되어 있었는가 하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이 두 구절을 비교해보면 어디가 다릅니까. 몇 군데 차이가 있습니다만,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 곳입니다. 제가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과거에 쓰던 개역한글에서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저는 이것이 좀 신기해서 무슨 오타가 아닐까 했습니다만, 다른 번역본을 보더라도 모두 <내일 염려할 것>이 아니라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과거 우리가 사용하던 개역한글성경에서 잘못 번역한 곳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개역한글 성경에서처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이 말씀은 누구한테 하시는 말씀이에요? 예,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한국어로 본다면 이 문자만을 본다면 주어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주어가 생략되어 있는 문장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주어가 뭐가 되죠? 누가 저한테 말합니다.
“내일 할 일은 내일 걱정하면 되잖아.”
누가 저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면, 누가 걱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예, 저더러 내일 걱정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해, 내일 걱정해”라고 하면 그게 큰 위로가 되나요?
아……그래? 아휴……그럼 뭐, 내일도 똑같이 걱정하라는 거네……이런 뜻 아니겠어요?
그런데 개역개정에서는 어떻게 되어 있나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여기에는 주어가 있어요? 없어요? 예, 있습니다. 그럼 주어가 저에요? 저더러 염려하래요? 아닙니다. 주어가 뭐냐 하면 <내일>입니다. 내일 일어날 일은 내가 염려하는 것이 아니고, 말하자면 <내일>이라는 것이 염려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내일? 내일이 누군데?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일>이 나에요? 아니에요, 나는 내일이 아니에요. 다른 어려운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는 확실하지요? 그렇다면 내가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이것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당연하지만, 이것은 성경 말씀 원문이 바뀌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원문은 그대로이지만 한글 성경 번역이 올바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 한 번 차원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1차원, 2차원, 3차원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1차원의 세계는 점과 선의 세계입니다. 거기에는 좌표, 위치만 존재하고 넓이, 즉 면적이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2차원은 어떨까요. 2차원은 1차원과는 달리 넓이가 있습니다. 좌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로와 세로, 얼마든지 넓은 면적은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차원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높이입니다. 가로와 세로로는 아무리 넓어질 수는 있지만 높이는 1미리도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2차원은 높이라는 감옥에 갇혀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3차원은 어떨까요. 3차원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당연히 위치도 있고, 넓이도 있을 뿐만 아니라 높이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점프도 할 수 있고, 입체적인 건물도 지을 수가 있지요. 2차원에 비하면 대단히 자유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까 2차원은 높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2차원 세계라는 곳은 높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렇다면 이 자유로운 세계인 3차원을 가둬놓은 것은 없을까요? 아니요.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돈이 많고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것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3차원이라는 세계는 이 <시간>이라고 하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이 시간이라고 하는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원래부터 있는 거예요? 아닙니다. 성경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모습을 봅니다.

창세기 1장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地は形がなく、何もなかった。やみが大いなる水の上にあり、神の霊は水の上を動いていた。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땅도 물도 빛도 어둠도 모두가 섞여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100만년 전인지 1000만년 전인지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창세기 1장 3절~5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そのとき、神が「光よ。あれ。」と仰せられた。すると光ができた。神はその光をよしと見られた。そして神はこの光とやみとを区別された。神は、この光を昼と名づけ、このやみを夜と名づけられた。こうして夕があり、朝があった。第一日。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더니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이것이 바로 시간의 창조입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질서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질서로서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매우 강조하십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8장 22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地の続くかぎり、種蒔きと刈り入れ、寒さと暑さ、夏と冬、昼と夜とは、やむことはない。」

세상이 홍수로 인하여 혼돈하게 되었으나, 내가 창조한 이 땅의 질서, 이 땅의 시간이라고 하는 질서는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 속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하나님도 이 시간이라고 하는 질서 속에 계신 분이신가요?

성경을 살펴봅니다.

이사야 44장 6절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イスラエルの王である主、これを贖(あがな)う方(かた)、万軍の主はこう仰せられる。「わたしは初めであり、わたしは終わりである。わたしのほかに神はない。

이사야 48장 12절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わたしに聞け。ヤコブよ。わたしが呼び出したイスラエルよ。わたしがそれだ。わたしは初めであり、また、終わりである。


히브리서 13장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イエス・キリストは、きのうもきょうも、いつまでも、同じです。

유다서 1장 25절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すなわち、私たちの救い主である唯一の神に、栄光、尊厳、支配、権威が、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永遠の先にも、今も、また世々限りなく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세상에 어떤 독재자라 하더라도, 세상에 어떤 사이비 종교의 교주라 하더라도, 내가 처음이요 내가 마지막이다, 내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내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우리 주 하나님의 존재가 시간이라고 하는 질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분이시라고 반복해서 강조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간, 우리의 삶, 우리의 이 세계를 모두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금 이 순간도 함께 하시며,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내일이 뭐예요. 1분 1초 뒤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누구는 아세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우리가 슬퍼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근심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염려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슬퍼하거나 근심하거나 염려한다는 것은 이것은 믿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른다고 하는 최고의 신앙고백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한글 성경에서 가장 짧은 성경 구절 중 하나였죠?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항상 기뻐하라”

いつも喜んでいなさい。

이 말씀입니다. 우리 한국사람은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에 이 귀한 말씀이 가장 짧은 구절인지도 모릅니다만, 이걸 우리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우리가 슬퍼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면서, 우리가 근심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따른다면서, 우리가 염려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신경도 좋고, 찬양도 기도도 좋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고백,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 우리의 삶을 통해서 가장 큰 믿음의 고백,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우리 구주 되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한 우리의 신앙고백이야말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 4장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いつも主にあって喜びなさい。もう一度言います。喜びなさい。

여러분, 항상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항상 기뻐하다 보면 근심할 새가 어디 있겠습니까. 걱정할 새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니 지금 기뻐하기도 바쁜데 언제 염려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 앞에 근심, 걱정, 염려를 모두 내려 놓고, 우리 주님 안에서 최고의 신앙고백인 기뻐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믿음을 고백하는 삶을 통해서 우리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우리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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