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회 예수님을 영접하면
2017년 5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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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10절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을 영접하면”イエス様を迎え入れれ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데 그 도중에 여리고를 지나시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의 직업은 세리장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성경에 등장하는 <세리>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리라고 하는 사람들은 지금으로 본다면 세무공무원을 뜻합니다. 한 나라는 그 나라의 국민들이 납부하는 세금으로 운영이 되기 때문에, 세금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세금을 징수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하는 세무서, 그리고 그 위에 있는 국세청은 당연히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유독 이 세리들에 대해서 나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잠시 살펴만 보아도 이 <세리>라는 말과 맨날 같이 붙어 다니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죄인>입니다.

마태복음 9장 11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すると、これを見たパリサイ人たちが、イエスの弟子たちに言った。「なぜ、あなたがたの先生は、取税人や罪人といっしょに食事をするのですか。」

마가복음 2장 16절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パリサイ派の律法学者たちは、イエスが罪人や取税人たちといっしょに食事をしておられるのを見て、イエスの弟子たちにこう言った。「なぜ、あの人は取税人 や罪人たちといっしょに食事をするのですか。」


누가복음 5장 30절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すると、パリサイ人やその派の律法学者たちが、イエスの弟子たちに向かって、つぶやいて言った。「なぜ、あなたがたは、取税人 や罪人どもといっしょに飲み食いするのですか。」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음식을 잡수시는 모습을 보고는, 이 간섭하기 좋아하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또 말을 하죠?

누가복음 19장 7절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これを見て、みなは、「あの方は罪人のところに行って客となられた。」と言ってつぶやいた。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있어서도 세금을 걷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에요? 국세청이나 세무서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모두 죄인들인가요? ㅎㅎ

물론 뭐, 사업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 어떻게 해서든 세금을 좀 줄이려고 하시는데, 그런데도 세금을 꼬박꼬박 거둬가는 걸 보면 미울 수도 있겠지요. 직장인들도 마찬가지죠. 월급을 받고 보면 소득세다 무슨 세다 해서 이것저것 다 떼고 나면 남는 게 없다……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국세청이나 세무서 잘못은 아닙니다. 그건 모두 국회나 정부에서 정하는 것이고, 세무 공무원들은 그대로 집행하는 것일 뿐이니까, 국세청이나 세무서 직원분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는 걸맞지 않다고 해야겠지요.

그렇다면 과거에는 왜 세리들이 이처럼 죄인이라는 말을 들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당시의 세금 징수제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걷어지는 세금은 모두 로마 정부한테로 갔지요.

이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하는 사람들이 바로 세리였는데, 당시 로마에서는 매우 간교한 방법을 취합니다. 그것은 첫째, 세리들은 로마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세금을 걷도록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둘째로는, 그 세리한테 <징수권>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주었습니다. 이 징수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세대에 부과하는 세금액을 책정할 수 있는 권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이런 식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 세대에 부과해야 할 세금이 100,000원이었다고 해보죠. 이 금액은 로마 정부에서 할당됩니다. 그렇다면 세리는 그 가정으로부터 100,000원을 징수해서 로마 정부에 납부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세리들은 징수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100,000원이 부과된 가정에 대해 자의적으로 200,000원, 또는 300,000원……이라는 식으로 과징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정이 되면 그 세대에서는 그 금액을 내야 되요. 그게 법입니다. 그리고 세리는 어떻게 해요? 로마 정부에는 공식적으로 부과된 100,000원만 납부하고, 나머지는 자기가 챙기는 것이 허용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을 취한 이유는 이런 것이겠죠. 우선 로마인이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동족인 유대인이 징수를 하게 되면, 다른 민족한테 세금을 낸다는 거부감을 덜 수 있을 것이고, 만약에 무슨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자기들끼리 해결하라는 식으로 일을 떠넘길 수도 있는 장점이 있겠지요. 그리고 세리들한테 그와 같은,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징수권> 같은 것을 부여함으로 인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세금을 걷도록 하는 효과가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세리들은 같은 동족들한테 몇 배나 되는 세금을 부과하고, 이를 뜯어가서 자기들의 배를 채우게 되니까 같은 유대인들끼리 좋아할 리가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일제 시대 때 앞잡이 노릇을 시킨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당시로서는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세리들을 가리켜서 죄인이라고 했던 것은 당시 로마법에 위반해서 죄인이라는 게 아니라, 합법적이긴 하지만 동족인 자신들한테 많은 돈을 뜯어가서 자기들의 배를 불리고 있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윤리적이고 도적적인 의미에서 죄인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삭개오. 이 사람은요, 그냥 세리가 아닙니다. 세리장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라고 소개합니다.

ここには、ザアカイという人がいたが、彼は取税人のかしらで、金持ちであった。

그러니 그 때까지 얼마나 많은 돈을 거둬들여서 로마 정부에 갖다 바쳤으면 세리장까지 되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아무리 같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한다 하더라도 좋아했을 리가 없겠지요. 아니, 좋아하기는커녕 지극히 증오스러운 존재였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어때요?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지위가 꽤 높았겠지요. 일제시대 때로 본다면 앞잡이 중에서도 목에 힘 좀 주는 그런 지위였을 것입니다.

자, 그와 같은 인물, 사회적으로는 꽤 지위는 높고 돈도 많았으나 같은 동족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던 삭개오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이 삭개오가 거리를 지날 때 우연히 사람들 무리를 본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이미 예수님께서 그 날 그 곳을 지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었던 것일까요?

어찌되었든 삭개오는 그 사람들 무리 쪽으로 다가갑니다. 왜요? 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한 번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무슨 대단한 신앙심이나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힘들겠지요. 그 때 당시에는 이미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정도로 대단히 유명인사셨던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니,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나도 어디 한 번 보자……라고 하는 수준의 어쩌면 그저 단순한 호기심 정도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이 안 보입니다. 더구나 삭개오는 키가 작았어요. 이제 큰일 났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커지는 것을 보니까 이제 예수님이 점점 더 가까이 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좀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어볼까 하지만, 사람들이 보니까 그 미운털이 박힌 삭개오에요. 그렇다고 때릴 수는 없습니다. 그는 엄연한 지위가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뭐 어떻게 했겠어요. 글쎄요. 막 그 사이로 끼어들어오려는 삭개오를 모르는 척 하고 팔꿈치로 밀어버리고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평소 같았으면 <이런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뭐 이러면서 따질 법도 합니다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마음이 급합니다. 우물쭈물 하고 있으면 예수님이 지나가버릴 것만 같아요. 그 때 상황을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오늘 본문 4절을 봅니다.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それで、イエスを見るために、前方に走り出て、いちじく桑の木に登った。ちょうどイエスがそこを通り過ぎようとしておられたからである。

오늘은 유대인의 옷차림에 대한 특징을 두 가지 들 수 있겠습니다만, 먼저 첫째로, 당시 유대인들의 옷차림을 보면, 도저히 뛰거나 하기 매우 불편한 차림입니다. 그래서 특히나 어른 또는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웬만해서 뛰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마음이 급합니다. 서둘러야 해요. 그래서 이것저것 안 가리고, 아마도 옷자락을 든 채로 뛰어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대요? 예, 나무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나무에 올라보신 적이 있으세요? 저는 높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경험은 별로 없습니다만, 이 삭개오는 자신의 약점, 그러니까 키가 작다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무에 오른다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 부분만 보면, 그래 뭐 그런가보다……라고 넘어갈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삭개오가 나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혹시 생각해보셨나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온다고 하고, 많은 인파들이 모였다고 한다면, 지금 같았으면 당연히 여러 사람들이 뭐 나무에도 오르고, 지붕 위에도 오르고 그랬을 것 아니에요? 만약에 그랬다면 어쩌면 삭개오는 나무에 오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나무에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무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상하죠? 왜일까요? 나무에 올라가면 더 잘 보인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아닙니다. 사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유대인의 옷차림의 두 번째 특징이 나옵니다.

성경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6절을 봅니다.
“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あなたは階段で、わたしの祭壇に上っ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裸が、その上にあらわれてはならないからである。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옷은 남성도 지금의 무슨 원피스처럼 통으로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서 여성이 원피스나 치마를 입고 나무에 오른다고 하면 그 모습이 어떻겠습니까. 잘못하면 속옷이 많은 사람들에게 들어나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점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나무에 오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어땠을까요. 그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부끄러움이나 수치 같은 것은 상관이 없었습니다. 세리장이라고 하는 사회적 지위나 체면도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삭개오가 나무 위로 올라가자 저기쯤에서 예수님이 오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가 있는 곳에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イエスは、ちょうどそこに来られて、上を見上げて彼に言われた。「ザアカイ。急いで降りて来なさい。きょうは、あなたの家に泊まることにしてあるから。」

삭개오는 너무나도 놀랐습니다. 왜 놀랐겠습니까.

첫째는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요즘 같아서는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있으니, 당시에 그런 것이 있었다면 예수님 얼굴도 알 수 있었겠습니다만, 삭개오 조차도 예수님 얼굴을 몰랐는데, 예수님께서 오히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1장 4절~5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すなわち、神は私たちを世界の基(もとい)の置かれる前からキリストのうちに選び、御前(みまえ)で聖(きよ)く、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ました。神は、ただみこころのままに、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ご自分の子にしようと、愛をもってあらかじめ定めておられたのです。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곧 예수님이닌데, 예수님이 삭개오를 알고 계시다는 것은 놀랍다기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둘째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거기서 빨리 내려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세요? 오늘 네 집에 가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처럼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를 위해서 삭개오가 한 일은 뭐였습니까. 예, 나무에 올라갔던 일 밖에 없습니다. 그게 다예요.

그런데 어떻게 됐어요?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얼굴이나 한 번 볼까 하는 마음에 나무에 올라갔다가, 이제 예수님과 아는 사이가 됐고, 그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기 집에 맞이하게 되는 영광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이 본문 5절을 보면요, 참으로 삭개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지금 치마 같은 옷을 입고 나무 위에 있습니다. 자존심도 체면도 모두 다 버리고 예수님 한 번 보겠다는 심정으로 나무에 올라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예수님은 그냥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아까 살펴본 대로 5절에 보면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ザアカイ。急いで降りて来なさい

라고 말씀하세요.

나를 갈망하는 너의 그 마음은 내가 충분히 알았으니까 이제 어서 내려와서 부끄러운 모습을 가려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세심하신 예수님의 사랑입니까.

이제 삭개오는 신이 났습니다. 서둘러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하여 자기 집으로 모십니다. 이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수군수군 대도 삭개오에게는 전혀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바로 삭개오는 예수님을 모심으로 자기에게 손가락질 하는 사람을 본 것이 아니라, 온전히 예수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 이제 예수님께서 삭개오 집에 오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거나, 아니면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을 보면 무슨 병을 고쳐달라고 한다거나, 질문을 한다거나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글쎄요. 예를 들어서 예수님을 앞에 앉혀놓고 “아, 예수님, 제가 이런 고민이 있습니다. 저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나쁜놈 취급 하는데, 저도 처자식이 있잖아요. 다 먹고 살라고 하는 일인데 저를 나무라는 사람들을 좀 혼이라도 내주세요”

뭐 이러면서 넋두리를 했다면 좀 자연스럽지 않을까 합니다만, 삭개오가 보여주는 모습은 우리에게 매우 생소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본문 8절을 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ところがザアカイは立って、主に言った。「主よ。ご覧ください。私の財産の半分を貧しい人たちに施します。また、だれからでも、私がだまし取 った物は、四倍にして返します。」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나요?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주라고 하시던가요? 아니요, 아무 말도 안 하셨습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막 혼자서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보면 삭개오가 앉지도 않고 서서 말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기쁨이 넘치는 모습입니까.

그리고 삭개오의 말을 보면요, 율법에서는 도둑질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2장 4절
“도둑질한 것이 살아 그의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막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

もし盗んだ物が、牛でも、ろばでも、羊でも、生きたままで彼の手の中にあるのが確かに見つかったなら、それを二倍にして償わなければならない。

도둑질 한 것이 있으면 2배를 배상하라고 되어 있는데, 삭개오는 4배를 배상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 절반을 포기하고, 내가 규정보다도 지나치게 세금을 맥인 것이 있다면 율법보다도 더 많이 배상하겠다……그러니까 이제 뭐예요? 나는 이제부터 규정된 세금만 걷겠다고 예수님 앞에서 서원하게 된 것입니다.

이 오늘 삭개오를 보면요,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좋은 책을 쓰기 위해서는 그 책에 무슨 내용을 더 담을까 생각하면 좋은 책은 만들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좋은 책을 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여기에 담고 싶은 내용은 많은데, 어떤 걸 뺄까 하고 고민하는 단계에 이르면 정말로 좋은 책을 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드는 생각이 뭐냐 하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도 갖고 싶다, 저것도 갖고 싶다. 하는 말하자면 뭔가를 갖고 싶다는 삶은요, 이건 좋은 삶을 살아갈 수가 없고, 오히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이것도 나누어 주고 싶고, 우리 이웃을 위해 저것도 함께 나누어 주고 싶고……이렇게 뭐든지 나누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우리의 삶이 풍요롭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삭개오가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나요? 아니요, 욕심 없는 사람이 어떻게 세리가 되고, 또 세리장까지 올라갔겠습니까. 오히려 남들보다도 욕심이 많으면 많았지 욕심이 없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왜 이렇게 뭐,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준다느니, 남들한테서 속여 빼앗은 것을 네 갑절로 배상 한다느니 했을까요?

마태복음 13장 44절을 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です。人はその宝を見つけると、それを隠しておいて、大喜びで帰り、持ち物を全部売り払ってその畑を買います。

이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모두를 다 합쳐봐도 그 밭에 감추인 보화보다도 못하니까, 내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보화가 있는 밭을 산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삭개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이와 같은 놀라운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그 때까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부귀영화보다도 더욱 귀한 것을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을 얻었어요? 예, 바로 예수님을 얻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얻었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얻었는데 더 이상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온 세계와 온 천하만물을 창조하신 예수님을 얻었는데 지금 돈 몇 푼이 중요해요? 이건 비교가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을 하십니다. 본문 9절~1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きょう、救いがこの家に来ました。この人もアブラハムの子なのですから。人の子は、失われた人を捜して救うために来たのです。」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당시 이스라엘에 있었던 세리들은 모두가 다 로마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굳이 말씀하실 것도 없이 혈통으로는 당연히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육적인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혈통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29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ユダヤ人もギリシヤ人もなく、奴隷 も自由人もなく、男子も女子もありません。なぜなら、あなたがたはみな、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一つだからです。もし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のものであれば、それによってアブラハムの子孫であり、約束による相続人なのです。

그러니까 유대인이라고 모두가 다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요, 아브라함의 축복을 모두 받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삭개오에게 구원이 임함으로 인하여 삭개오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내 것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살아가다 보면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지요. 구할 것이 있으면 예수님께 구하기도 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온 천하보다도 귀하신 예수님이 계신데, 조금 부족하다고, 조금 어렵다고 낙심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삭개오가 보여준 것처럼 예수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예수님께 기도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찬양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헌신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예배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얘, 누구누구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きょうは、あなたの家に泊まることにしてあるから。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모셔 들이면 됩니다.

그러면 이제 그 때부터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께 찬양하고 예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께 예배하는 삶,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때까지 백성들의 피눈물을 짜내면서 악랄하게 세금을 착취했던 삭개오 보다 우리가 더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삭개오를 구원해주셨는데,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으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못난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까지 흘려주셨는데 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 반가이 맞아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모습 그대로 기도로, 찬양으로, 헌신으로, 예배로 나아감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으로 구원을 얻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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