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회 이제 일어날 때입니다
2017년 7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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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누가복음 15장 11절~24절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제 일어날 때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많이 익숙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다 아는 이야기>로 흘려버릴 수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보면, 생소한 부분은 하나하나 주의를 기울여서 읽어가다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부분이 나오면, <그거 뭐 다 아는 이야기인데>라고 생각해서 중요한 부분을 지나쳐버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우리가 운전을 할 때 교통사고가 날 때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길을 달릴 때가 아니라,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길, 지금까지 몇 번이나 다니던 길을 달릴 때에 오히려 방심함으로 인해서 사고가 나기 쉽다는 점입니다.
이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그냥 속도를 내서 대충대충 넘어가 버린다면, 대단히 중요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마는 일이 생길 수도 있고요, 또 심한 경우에는 엉뚱하게 이해를 해서, 그야말로 성경 이해에 있어서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면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진정으로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이 말씀에 담긴 너무나도 큰 은혜를 함께 나누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11절에 보면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문맥으로 본다면 이 <어떤 사람>이라는 분은 상당히 돈이 많은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을 합니다. 아버지가 갖고 있는 재산 중에서 자기한테 나누어줄 몫을 미리 달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버지는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들이 그 재산을 갖고 먼 나라에 가서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들을 모두 낭비했다고 합니다.
그 때까지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탕진했다 하더라도, 그곳 경제 상황이 좋았다면 거기서 일자리도 구해서 생활을 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때마침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둘째 아들이 간 곳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지명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만,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먼 나라에 갔었다고 합니다. 그 먼 나라는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나라, 외국이었습니다.
경기가 좋고 사람들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면 내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일자리가 많겠습니다만, 흉년이 들어서 경제사정이 안 좋아지고 일자리도 줄어들어서, 그 나라 사람들이 일할 곳도 없어지는 마당에 외국인한테 줄 일자리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돈이 많을 때에는 여기저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나를 대우해주고 그랬던 사람들도, 돈이 떨어지니 그 사람들은 다 어디 가 버리고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까 일자리를 찾긴 찾았는데, 그 일이 뭐냐 하면 돼지를 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돼지고기를 먹고 그러기는 합니다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신명기 14장 8절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돼지고기를 먹기는커녕 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돼지가 등장하는 장면은 그 곳이 유대가 아닌 이방인이 사는 지역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둘째 아들은 분명 이스라엘 민족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돼지는 부정하다고 말씀하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돼지를 치는 일을 했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그의 아버지는 대단한 부자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거기에 걸맞은 교육도 받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분명 하나님께서 돼지를 부정하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그가 그런 일을 했을까요. 그것은 첫째로 너무나도 궁핍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점잖은 일자리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때까지는 자신이 경멸했던 일, 멸시했던 일이긴 하지만, 그야말로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그는 신앙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 안에 살아 있었다면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다 하더라도 믿음의 원칙, 신앙의 원칙은 지켰어야 하겠으나, 이제 돈도 잃어버리고 인심도 잃어버리고, 그리고 어쩌면 건강도 잃어버렸을 그에게는 이제 그 마음 안에 있었던 신앙의 불빛도 꺼져가고, 그리고 삶에 대한 희망조차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자, 우선 여기까지를 보겠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단순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둘째 아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슨 잘못을 이 아들이 한 것일까요?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면 그야말로 성경적인 교통사고, 주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일단 우리가 생각할 때에 이 아들이 한 잘못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먼저 달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물론 그렇습니다만 당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재산을 자식이 나누어 가진다고 하는, 이른바 상속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가 사망하거나 또는 사망이 임박한 가운데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둘째는 아버지가 아직 멀쩡한데도 불구하고, 자기 몫을 나누어달라고 아버지한테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효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을 첫째 잘못이라고 칩시다. 제가 이를 <첫째 잘못입니다>가 아닌 <첫째 잘못이라고 칩시다>라고 굳이 말씀 드리는 이유는 조금 있다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낭비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다면 이를 아껴서 계획적으로 써야지, 돈을 물 쓰듯이 했다는 것이지요. 이것도 역시 둘째 잘못이라고 칩시다.
이 구절에 대한 설교를 보면 한국에서는 대부분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 5월에 주로 다루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라, 그리고 부모님이 주신 돈이나 재산을 낭비하지 말아라…… 그런 내용이겠지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죠. 그런데, 그렇다면 이 둘째가 어긴 율법이 무엇입니까.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 것은 맞아요. 십계명에서도 제5계명에서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째 아들은 제5계명을 어긴 거예요?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에 재산을 달라고 한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니까, 이러지 말라고, 제5계명을 지키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건가요?
그리고 돈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본문에서 본 바와 같이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돈을 낭비했습니다. 그건 사실이에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돈을 낭비하지 말아라>라는 말씀을 하시려고 했던 건가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질문 드리겠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어떤 피의자를 재판에 의해서 처벌 받게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한 행위가 현행법에 처벌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명확하게 있어야 합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그 사람이 한 짓이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한 행동이라 하더라도, 법적으로 그 사람을 처벌할 수 있다는 법조항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 둘째 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정죄를 받기 위해서는 율법을 어겼다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율법에 보면 <아버지가 건강할 때에는 재산 상속을 요구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나요? 하물며 이 둘째가 그와 같은 재산상속을 요구했을 때, 아버지가 분명히 거절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강제로 재산을 빼앗아서 달아났다고 하면 아버지에게 불순종했다는 비난을 받을 만도 하고, 이것이야말로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아버지가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강제로 빼앗은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본다면 이 둘째가 상속을 요구한 행위만으로 율법을 어겼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가지고 낭비를 했지요. 그렇다면 그 행위가 율법을 어겼다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 중에 <너희들은 돈 낭비를 해서는 안 될 지어다.> 라는 것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특히 복음서를 읽을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 더구나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읽을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굳이 이 땅에 오셔서, 왜 굳이 3년이라고 하는 그리 길지 않은 기간에 이 말씀을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늘 나라 생활이 지루해서 잠시 바람 쐬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 위에서 보시기에 답답해서 몇 마디 잔소리를 하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직접 보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 가운데에서 건져내셔서 구원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의 죄를 모두 씻으시고 영원히 불타는 지옥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으로 가득 찬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해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 3년여에 걸친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1분 1초도 낭비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모든 말씀이 구원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기에 윤리적이나 도덕적으로 볼 때, 상속방법이나 돈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 중요한 말이기는 합니다만, 그 귀한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께서 기껏 하신다는 말씀이, 부모님이 건강할 때에는 재산을 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거나, 돈은 아껴 써라……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면, 이것이 납득이 되시나요?
이렇게 말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오해가 여전히 생기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비유 중에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무척이나 가난하게 살았는데, 죽고 난 다음에 아브라함 품에 안겼어요. 그런데 부자는 죽은 후에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를 볼 때에 <거지 나사로>를 중심으로 본다면 이야기가 대단히 이상해집니다.
나사로가 어떻게 살았다고 나오나요?
누가복음 16장 20절~21절에 보면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죽은 후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기 위해서는 나사로처럼 거지로 살아야 하고, 부자가 버리는 쓰레기를 먹고 살아야지만 하는 것인가요? 말도 안 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이런 잘못된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집중해야 할 곳, 핀트를 잘못 맞추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른바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비유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나사로>가 아니라 <부자>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제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 오늘 본문을 볼 때에도,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상속을 받았다고 하는 점이나, 아니면 돈을 낭비했다고 하는 부분에만 집착을 하게 된다면 이 말씀도 앞서 살펴본 나사로에 대한 비유처럼 어처구니 없는 오해를 하게 될 소지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하시고자 했던 말씀은 무엇일까요.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이 둘째 아들은 <무엇을 낭비하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낭비를 했다는 것이니 그것은 재산이겠지요. 하지만 그 재산은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예, 아버지로부터 왔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단순히 우리의 육신의 부모가 아닌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바로 우리들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먼저,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재산이 많았나요? 적었나요?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했다고 하는데, 나누어준 재산이 몇 푼 안 되는 정도라고 하면 낭비를 할래야 할 수도 없지 않았겠어요? 그러니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은 정말 그야말로 허랑방탕하게 낭비를 할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재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별로 안 될 것 같아요? 아이구……하나님이 나한테 뭘 주셨다고……혹시 그런 생각이 드시나요?
만약에 그런 생각이 드신다면,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눈동자. 돈으로 환산해서 얼마라면 파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팔과 다리. 누군가가 사겠다고 해요. 돈은 원하는 대로 주겠다고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얼마에 파시겠습니까. 100만원이면 파시겠어요? 아니면 200만원?
그것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명,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1000만원? 2000만원? 한 5000만원 정도라면 바꿔 볼만 하겠어요?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시다면 저나, 아니면 가까운 교회 목사님과 상담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것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이나 우리의 생명만이 아닙니다. 조금 진부한 말일지는 모릅니다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돈을 쌓는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흘러간 1분 1초를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오늘 날짜가 7월 9일입니다만, 아무리 세상 재벌이 금은보화를 낸다 하더라도 오늘 이 하루를 또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귀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밖에 나가면 눈부신 햇빛이 있습니다. 상쾌한 공기가 있습니다. 서울이나 동경 같은 대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이 군마현의 맑은 공기가 넘쳐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위해서 얼마를 냈습니까. 우리가 태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 눈동자를 얻기 위해서, 우리 팔 다리를 얻기 위해서, 우리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을 얻기 위해서, 낮에는 넘쳐나는 햇빛을 얻기 위해서, 맑고 상쾌한 공기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돈을 얼마나 냈습니까.
어디 그 뿐인가요?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귀한 보혈을 흘려주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낸 돈이 과연 얼마입니까. 그렇습니다. 돈 한 푼 안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공짜인가요? 아닙니다. 돈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꾼 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이, 내 영혼이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꿀만한 대단한 값어치가 있나요? 없습니다. 나 하나는 고사하고 이 세상의 모든 영혼들을 다 모은다 하더라도 그 값어치는 예수님 생명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 한 방울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악에 찌든, 죄악 속에서 허우적대는 영혼이 아무리 많아 봤자, 어디 예수님의 보혈 한 방울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귀한 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흘려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 하나 살려보려고, 어떻게 해서든 멸망으로 달려가는 내 영혼을 살려보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주신 것입니다. 너무나도 부족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해요. 그래서 직접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세상 속에 던져 넣고 낭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돌아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나한테 좋은 차를 하나 보여줍니다. 이 차를 나한테 주겠다고 합니다. 차를 보니 유명한 회사 차예요. 최신형이에요. 속도도 300킬로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밟는 대로 속도가 나옵니다. 디자인도 번쩍번쩍합니다. 이 차를 타고 지나가면 주위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너무나도 멋져요.
“아! 이렇게 훌륭한 차를 저한테 주신다고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한테 한 마디 말을 합니다.
“예,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차에는 한 가지 흠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핸들이 없습니다”
자, 여러분. 이 차를 타시겠습니까?
이런 차는 절대로 안 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멋지고 훌륭하고 엔진 성능이 뛰어나고 비싼 차라 하더라도, 핸들이 없다면 사고가 나고 인생이 엉망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재물이 풍족하다 하더라도 주님의 품을 떠난 우리들의 모습은 핸들 없는 자동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 차를 타라고 합니다.
“야! 봐봐. 이 차 너무 멋있잖아? 이 차를 타기만 하면 사람들은 너를 부러워 할거야! 모든 사람들이 너를 존경할 거야! 정말로 멋진 인생을 살게 될 거야!”
누가 타라고 해요? 그렇습니다. 마귀가 속삭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한테도 누군가가 그렇게 속삭였는지 모릅니다.
“야! 아버지한테 재산을 달라고 해.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아버지가 없는 곳, 아버지가 간섭하지 않는 곳에 가서 살아봐. 얼마나 멋지겠어? 그 돈을 갖고 산다면 정말 큰 집에 살면서, 고급 차를 몰면서, 그리고 아름다운 부인을 맞이해서 살 수 있을 거야”
사탄이 둘째 아들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사탄이 왜 그랬을까요? 이 둘째 아들을 사랑해서요? 이 둘째 아들이 정말로 멋진 인생을 살기 바랬기 때문에요? 아닙니다. 마귀 사탄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우리의 타락과 우리의 멸망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 결과가 어땠습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재산을 주셨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떠나서 살게 된다는 것은 그 결말이 행복이겠습니까? 아니죠. 처절한 절망이요 처절한 타락이요 처절한 좌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랬다면 어떻게 해야 마땅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주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둘째 아들은 처절한 절망 속에서 후회를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 많은 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후회를 합니다. 하지만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왜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자존심 때문입니다. 그렇잖아요? 아버지 도움이 없더라도 잘살 수 있다, 성공할 수 있다, 뭐 이러면서 얼마나 자신만만하게 집을 나섰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어땠습니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대로는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었을 것입니다. 아니, 돌아갈 때 돌아간다 하더라도 좀 어느 정도 체면을 살릴 만한 정도로 회복하고 난 다음에 돌아가려고 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회복이 되던가요? 결국 그는 돼지 사료로 쓰이는 쥐엄열매를 먹으려고 했는데도 그것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돼지만도 못한 대우를 받는 정도까지 떨어지고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존심의 회복이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더 이상 버릴 자손심도 없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0절을 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우연히 아버지가 바깥에 나와 있는데 마침 그 때 둘째 아들이 돌아오고 있었던 것인가요? 아닙니다. 아버지는 밤이나 낮이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밖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냥 아들보고 싶은 마음에? 아닙니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육신으로 본다면 아들이 아버지 품을 떠나서 잘 되는 경우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영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육신의 아버지 품을 떠나서 잘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적으로 하나님 품을 떠나서 잘 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아버지도, 그 아들이 자기 품을 떠나서는 잘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거리가 먼 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보세요. 아들이 자기한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죄인 다루듯이 아니라 최고의 귀빈을 맞이하듯이 돌아온 둘째 아들을 대접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아버지가 준 재산을 모두 낭비하고 빈털터리로 온 아들을 꾸짖지 않습니다. “너 내가 얼마를 줬는데 그 중에 얼마가 남았느냐, 어디에 썼느냐”하고 묻지도 않습니다. 궁금해하거나 불안해하지도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얼마를 잃었건, 얼마를 탕진했건, 아버지는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문제가 많고 얼마나 죄가 많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돌아올 때,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돌아올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실 것이요,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으로 채워주실 것이요, 은혜와 축복을 넘치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한테, “아버지, 아버지가 아무리 나를 맞이해 주신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세계적인 설교자이신 빌리 그래함 목사님한테 어떤 분이 이렇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면 어떤 죄일까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하든지, 무슨 일을 했던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분께 돌아가기만 한다면 온전히 전체적으로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제가 제 후배와 식사를 했다고 쳐요. 그리고 난 다음에 “아, 오늘은 내가 대접을 하겠다”하고 제가 계산을 했습니다. 이미 돈을 내고 계산을 다 끝냈어요. 그런데 그 후배가 다시 직원을 불러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다시 계산해 달라, 내가 먹은 식사에 대해서는 내가 계산하겠다……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그렇다면 여러분이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어? 자기가 먹은 돈은 자기가 내겠데? 잘됐네. 내 돈이 굳었네. 라고 생각하겠어요? 그것은 오히려 내 마음을, 그 후배를 대접해주고자 했던 내 마음을 짓밟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한테 말하기를 “아버지, 내가 좀 실수를 해서 탕진했습니다만, 이런 대접을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반드시 다시 벌어서 실력을 보여줄 테니까 그 때까지는 나를 종으로 생각해주세요” 라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가 만약에 예수님더러, “예수님.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수고를 해주셨습니다만, 저는 예수님 없이, 내 실력만으로도 충분히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한테 이런 말을 한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기특하게 여길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오히려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하는 일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짓밟는, 그야말로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아침이나 밤이나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멀리서 발견하시면 거리를 마다 않고 달려와서 우리를 맞이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대접을 해주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낭비를 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육신으로 낭비를 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재산으로 시간으로 낭비를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20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아들이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때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맨 처음에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제 일어나서……”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일어날 때입니다. 죄책감과 좌절과 후회와 낙심과 절망을 툭툭 털어버리고 이제 일어날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 품으로, 예수님 품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그러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기만 하면 우리가 잃은 것을 모두 회복시켜 주십시다.
더 늦기 전에, 이제 어서 일어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 품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 받고, 모든 것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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