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회 그는 무엇을 팔았는가
2017년 7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창세기 25장 27절~34절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는 무엇을 팔았는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사람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에서와 야곱입니다. 둘 모두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손인 이삭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듣고 자란 축복의 자녀들이었고, 그 축복의 계보를 이어갈 주인공들이었습니다.
이 두 아들은 서로 성격이 좀 달랐습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창세기 25장 27절~28절을 봅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라고 기록합니다. 아들이 둘이 있습니다. 당시에 아버지 이삭은 당연히 첫째 아들 에서를 후계자로 생각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장차 아브라함과 이삭의 대를 이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이어갈 후손인 에서를 사랑했을 것입니다.
에서는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의 성격은 매우 활달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한다면 남자다웠습니다. 그는 산을 달리고 들을 누비면서 능숙한 솜씨로 사냥을 했습니다. 얼마나 멋진 남성입니까. 그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흡족해했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자신을 사랑해주는 아버지를 위해서 에서는 자기가 사냥한 고기를 아버지에게 요리를 해서 대접할 정도로 효성도 지극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비해 야곱은 어떻습니까. 그는 형과 달라서 주로 집에 있었다고 해요. 그런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저런 쯧쯧쯧. 남자놈이 지 형처럼 바깥에 나가서 들을 달리고 산을 누비면서 사나이답게 살아야지, 맨날 집에서 지 엄마 심부름이나 하고 그러니 저걸 커서 어디다 쓸꼬……뭐, 이러지 않았겠어요?
그러니 외모도 달랐을 것입니다. 큰아들인 에서는 햇볕에 그을리고 근육질이었겠지요. 온몸이 늠름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반해 야곱은요? 맨날 집에 있으니 살은 하얗고 호리호리한 체구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 집 대를 이을 사람은 장자 에서였습니다. 에서는 장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납니다. 본문 29절~34절을 봅니다.
창세기 25장 29절~34절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야곱은 팥죽을 쑤고 있었어요. 어쩌면 평소처럼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있으면서 일을 거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산을 달리고 들을 누비던 에서가 지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오다가, 마침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에서는 황급히 야곱에게 다가가서 그 붉은 팥죽을 내게 달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냥 어서 팥죽을 주었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야곱이 에서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제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였습니다. 조금이라도 먼저 나왔기 때문에 에서가 형이 된 것뿐이지, 실질적인 나이 차이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장자였기 때문에, 그는 아브라함의 계보를 이을 첫째 아들이었으므로, 원래대로라면 하나님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에서의 하나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장자의 특권에 대해서 야곱은 너무나도 탐이 났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 되길 원했습니다. 이 집안의 대를 에서의 이름이 아닌 야곱의 이름으로 잇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 반면에 에서는 어땠습니까. 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자권에 대해서 집착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가 갖고 있는 장자권은 자신이 노력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거든요. 에서는 자기가 태어나면서부터 장자로 여김을 받았고, 자신이 장자라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에서는 대단히 피곤하고 허기가 졌을 것입니다. 보통 피곤한 게 아니었겠지요. 저도 그런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냥 멀쩡하게 있다가 갑자기 허기가 찾아오면, 무슨 만화처럼 눈앞이 빙글빙글 돕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칠 때 일인데, 그 동안 아무렇지도 않다가, 수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허기가 지더라구요. 서 있기도 힘들어서 문제를 풀게 하고 부랴부랴 편의점에 가서 빵이랑 우유를 먹고 온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에서의 마음을 알 것 같아요. 그는 무슨 엄살을 부린 게 아니라 정말 기진맥진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서 야곱이 “팥죽을 줄 테니 장자의 명분을 나한테 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갑작스러운 말을 들은 에서는 야곱에게 말하기를, 아니,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장자의 명분 같은 게 무슨 소용이냐, 옛다 가져라, 그리고 빨리 팥죽이나 내놔……이런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게도 소중한 장자의 명분을 에서가 떡과 팥죽 한 그릇에 팔았던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에서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얻게 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큰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스스로 노력하지도 않았고, 이를 위해서 대가를 지불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에서는 그 중요성에 대해서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축복의 촛대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시고 그 후손에게 주시기로 한 축복의 촛대가 에서에서 야곱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가치를 에서는 몰랐고 야곱은 알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받고 있을 때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맨 처음에 예수님께로 와서 속삭인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4장 1절~4절을 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여러분, 금식을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3일이 아니라 하루를 금식해도 매우 허기가 집니다. 그런데 3일이나 4일도 아닌 40일씩이나 금식을 하셨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그렇게 생각하실지 몰라요.
“에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금식을 해도 전혀 힘들지 않았을 거야.”
혹시 그렇게 생각하신 적 없으신가요? 이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만, 신성만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떻게 죽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인성, 즉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아픔과, 우리와 똑같은 고통과, 우리와 똑같은 슬픔을 느끼실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신성은 없고 인성만 있나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분명히 인성이 있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성만 있었다면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의 죄를 청산하기 위해서 대신 죽을 수가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자기 스스로의 죄를 청산할 능력도 인간한테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청산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으며, 인간으로서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럼 또 궁금증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으로도 오셨고, 인간으로도 오셨다면, 그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50%는 하나님이고 50%는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인가요? 이 또한 어떻게 보면 말이 되는 것 같이 들릴 지는 모르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이것도 큰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50% 하나님이고 50% 인간으로 오셨다면,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통도 50%요, 예수님께서 받으신 징계도 50%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50%이고, 이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신 구원도 50%짜리 구원이라는 것이요,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도 50%짜리라는 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은혜가 50%짜리입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가 받을 구원은 50%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을 구원이 기껏해야 50%짜리 구원인가요? 아닙니다. 50%도 아닌, 90%도 아닌 100%의 완벽한 구원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99.999%도 아닌 100%의 사랑을 쏟아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50% 신성과 50% 인성이 아닌, 100% 신성과 100% 인성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만약에 50%짜리 사랑이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50%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50%의 하나님, 90%의 하나님이 아니라 100%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몇 프로의 구원을 받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100% 구원을 받게 된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느끼는 모든 고통을 100% 똑같이 느끼셨습니다. 40일 동안 주리셨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셨지요.
바로 그 때 사탄이 속삭입니다. “너 하나님의 아들이잖아? 그런데 배고프지? 자, 이 돌멩이들을 네 능력으로 떡으로 만들어서 먹어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탄의 말을 듣지 않으십니다. 저는 꽤 오랫동안 이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탄이 주는 떡을 먹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돌멩이를 떡이 되게 해서 드시라고 한 건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를 거절하셨을까 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 능력이 없으셨던 것인가요? 아닙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기도 하셨고,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폭풍이 부는 바다를 잠잠하게 하기도 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던 예수님인데, 그깟 돌멩이를 떡으로 만드시는 것이 불가능하셨겠어요? 아니요, 충분히 가능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거절하셨을까요. 그때 마침 예수님께서 입맛이 없었어요? 그것도 아닙니다. 40일 동안 굶주리셨습니다. 100% 신성과 함께 100% 인성이기도 하셨던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느끼는 굶주림을 똑같이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탄의 말을 거절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세상 것과 바꾸려고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것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믿음을 버린 사람들을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사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도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 그 중에서도 미약한 사울을 하나님께서 높이셔서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구와 체면을 중요시했습니다. 처음에 그가 가졌던 겸손한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자신을 왕으로 높여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사라지고, 오직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데에 급급해집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사무엘상 15장 23절 중에 보면,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렇게 해서 결국 그는 나중에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촛대는 누구한테로 옮겨집니까. 그렇습니다. 다윗한테로 하나님의 축복의 촛대가 옮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한테 사탄이 속삭입니다. 너 훌륭한 능력 있잖아? 하나님이 너한테 준 능력이 있잖아? 그 능력을 너 자신을 위해 써야지. 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써야 하지 않아? 지금 너 굶어 죽게 생겼잖아? 그러니까 어서 그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어서 먹어.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세상적인 것을 얻으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에서한테 속삭였는지도 모릅니다. 야, 장자의 명분이 뭐가 중요해? 장자의 명분이 밥 먹여줘? 그렇다면 차라리 그딴 건 저 야곱한테나 줘버리고 너는 떡과 팥죽을 달라고 해. 하나님이 너한테 준 장자의 명분이 뭐가 대수야? 지금 너 굶어 죽게 생겼잖아. 그러니까 어서 저 팥죽을 달라고 해서 먹어.
이 달콤한 유혹에 에서는 넘어가서 결국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기게 되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 유혹을 물리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차고 넘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세상 것과 맞바꿔서 없애버린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이 되고 맙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27절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놀라운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명분, 은혜의 명분, 축복의 명분을 헐값에 넘기는 어이없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이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가 있겠지요. 아하,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야곱한테 팔았기 때문에 축복을 받지 못했지만, 야곱은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기 때문에 축복을 받았구나. 혹시 이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세계적인 설교자였던 무디 목사님은 이 야곱이 에서에게 판 팥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선악과를 제외하고 이 죽보다 더 비싸게 팔린 음식물은 없었다.”
그러니까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따먹었던 선악과의 대가로 인해서 전인류가 죄 가운데 놓이게 되고 말았는데, 에서도 이 떡과 팥죽 한 그릇으로 인해서 본인만이 아니라 자손 대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그 음식은 정말로 비싼 것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비유이긴 합니다만,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곱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축복을 받지 못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만약에 정말로 야곱이 꾀를 부려서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어요? 무슨 수를 써서든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축복 받는 사람의 약점을 공략해서 그 축복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요.
참 안타까운 것이, 교회에 다니면서도 실제로 그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어디인지 아세요?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구절을 참 엉뚱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유명 대형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래요. 그 교회에서는 매년 장로를 장립하는 시기가 되면 목사님 댁에 그 장로 후보들한테서 보내오는 선물들이 집안 가득히 쌓인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어떤 사람이 보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까, 그 목사님 사모님이 그러시더래요. “예수님도 그러시지 않느냐.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천국이 침노를 당하고,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고 하는 말씀은, 빌립보서 3장 14절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을 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지, 축복 받는 사람들한테 가서 그 축복을 빼앗는다거나, 아니면 나 장로 시켜달라고 목사님 집에 선물보따리를 보내는 것이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으로 돌아간다면, 에서가 야곱한테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고 나옵니다만, 그렇다면 단지 그것 때문에 축복을 못 받게 된 것일까요. 창세기 25장 34절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저도 일본에서 매일 같이 운전을 하고 그렇습니다만, 교통위반을 해서 딱지를 떼는 사람들을 보면요, 어쩌다가 딱 한 번 위반해서 잡히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음주운전이나 신호위반 같은 경우도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평소에도 늘 습관처럼 하다가 언제 한 번 걸리는 것이지요.
이 에서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한 이유는 어쩌다가 재수없이 야곱한테 딱 한 번 잘못 걸렸다가 깜빡 속아서 팥죽 값 대신 장자의 명분을 팔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평소부터도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놀라운 축복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한편 야곱은 어떻습니까. 야곱의 잔꾀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아버지 이삭으로부터의 유언을 받을 때에도 일부러 에서처럼 변장해서 아버지를 속여가면서 장자로서의 축복을 얻어냅니다. 그랬더니 야곱의 앞길이 활짝 열리던가요? 앞길이 열리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축복의 길이 아니라 고생길이었습니다.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에서를 피해서 오랜 세월 동안 객지에서 도망자처럼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축복의 비밀을 몰랐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을 봅니다. 창세기 25장 21절~23절,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벌써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에서가 야곱을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높이실 것을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봅시다. 나와 어떤 사람이 동경에서 서울까지 가는 경주를 하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서울까지 가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누구냐 하면, 마라톤 선수에요. 그것도 그냥 마라톤 선수가 아니라 올림픽 금메달 선수에요. 자, 문제를 내겠습니다. 누가 이길까요.
이렇게 물으면 좀 그렇겠지요? 예, 제가 아무리 기를 쓰고 달린다 하더라도 달리기로는 제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이길 수야 없겠지요. 그런데 제 주머니를 뒤져보니까 뭐가 들어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비행기 표입니다. 보니까 동경에서 서울까지 가는 비행기 표예요.
자,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누가 이기겠습니까. 그렇죠. 제아무리 빨리 뛴다 하더라도, 제아무리 빨리 헤엄친다 하더라도 비행기를 당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건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아, 이제 내가 이길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왠걸,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아요. 시간표를 보니까 1시간을 기다려야 한대요. 아, 속이 타기 시작합니다. 빨리 가야 할 텐데, 지금 상대방 선수는 열심히 달리고 있을 텐데 난 지금 버스 정거장에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고 있다니 이를 어떡하나……. 그러던 중에 한 가지 작전이 떠오릅니다. 그래. 아무래도 불안해. 지금 달리고 있는 선수를 방해해야겠다……하고 저기 높은 곳에 올라가서 돌멩이를 던집니다. 친구를 시켜서 함정을 파게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앞을 가지 못하게 훼방을 놓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야곱이 했던 방법입니다.
여러분, 꼭 그래야만 이길 수가 있어요? 아닙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기를 쓰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하더라도, 내 주머니에는 비행기표가 있어요. 그 순간 이미 승부는 끝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기기 위해서 무엇을 하면 됩니까. 방해를 해요? 함정을 파요? 돌멩이를 던져요? 아닙니다. 기다렸다가 버스가 오면 버스를 타고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편안하게 서울까지 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꾀를 의지해서 상대방을 넘어뜨리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리고, 주님께서 가라고 하면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대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우리 스스로 기를 쓰고 노력하는 삶이 아닙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길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이미 예정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축복은 이미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미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생명의 면류관도 이미 저 천국에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축복을 믿고, 감사하면서 예수님의 인도해주시는 길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패배와 우리가 받을 징계와 우리가 받을 저주와 우리가 받을 심판은 이미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모두 받아 주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주시는 승리와,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항상 감사하고,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푯대를 향해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면서, 마침내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87회 튼튼한 믿음 →

← 제85회 이제 일어날 때입니다

 

이카호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