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회 고독이라는 이름의 길
2017년 8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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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절~8절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고독이라는 이름의 길” 孤独という名の道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수 천 년에 이르는 구약시대에는 수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선지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엘리야를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만, 신구약을 통틀어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신 사람이 둘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녹>과 이 <엘리야>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크게 쓰셨습니다. 엘리야는 수많은 이적을 행했으며, 갈멜 산에서는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사악한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따르는 거짓 선지자들 총 850명을 혼자서 상대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다른 이도 아닌 엘리야 정도 되는 놀라운 선지자라고 하면, 이처럼 눈부신 전과를 세웠는데,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일로 인하여 당시 우상숭배에 앞장섰던 아합 왕, 정확히는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이지요. 이 이세벨이 모든 우상을 이스라엘에 다 끌고 들어왔습니다. 이 이세벨이 엘리야의 목숨을 빼앗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이 대선지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감히 너희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대항하려느냐.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뭐 이러면서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를 대항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했대요? 오늘 3절에 보니까 자기 생명을 위하여 도망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되십니까? 이처럼 놀라운 선지자가, 그토록 많은 역사를 일으킨 선지자 엘리야가, 왕이 자기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자, 기도도 안 하고,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면서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사실이 납득되십니까.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엘리야가 어떤 사람이요, 얼마나 많은 기적을 일으켰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게 쓰셨는지를 잘 아는 사람일수록 이 장면은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성경에 기록된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두고 신학자들 중에는 <엘리야의 우울증>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그저 단지 <우울증>이었다……라고 말해버린다면 이는 어쩌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냥 엘리야만의 특별케이스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그런 뉴스를 들으신 적이 없습니까. 어떤 훌륭한 사람이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어떤 멀쩡한 사람이 황당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보아서는 그 사람이 도저히 그런 어이없는 실수나 황당한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 납득하기도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사실이 버젓이 신문에 실리고 뉴스에 방송이 됩니다.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그들도 예측하지 못할 때에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고독 때문인 것입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고독. 내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 때, 그것이 바로 고독입니다.

사람들은 어쩌면 쉽게 <고독>이라는 말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문학인들은 고독이야말로 진정한 벗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그런 말은 <고독>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고 하는 말 같이 들립니다.

영국 <하트>라고 하는 학회지에 의하면 18만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결과를 분석해보니, 심한 고독이나 사회적 고립감을 느끼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심근경색을 포함한 동맥질환 위험이 29% 증가하였고 뇌졸증은 32%나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고독함을 느낄 때에는 심한 경우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발생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남녀노소가 없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에도 보면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른들은 안 그렇습니까? 많이 배운 사람이면 고독을 피해갈 수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경험이 많고, 아무리 학벌 좋고 훌륭한 인품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 고독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도적같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는 믿지 않는 사람들한테만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죠. 안타깝게도 교회라고 해서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목사님들을 비롯한 교역자나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도 소용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믿음이 좋고 기적을 많이 체험했다 하더라도 엘리야 보다도 더 믿음이 좋고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엘리야도 피해가지 못했던 <고독>이라는 순간을 우리라고 피해갈 수 있을까요? 물론 절대 불가능하다고까지는 말씀드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우리는 분명히 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잠시 화재를 바꾸어볼까 합니다.

1927년 5월 20일 새벽 5시 52분.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 루즈벨트 공항에서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 한 대가 이륙했습니다. 비행기 이름은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 그 비행기에는 찰스 린드버그라고 하는 25세 젊은 조종사 한 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 비행기는 그 때까지 아무도 성공한 적이 없는 뉴욕 파리 간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에 도전하기 위해 이륙한 것입니다.

그의 비행거리는 총 5810킬로미터. 시간은 33시간 30분이 걸렸다고 합니다. 대서양을 비행기로 횡단한 것은 그가 처음이 아닙니다. 두 명 이상의 조종사가 번갈아 가면서 조종을 해서 대서양을 건넌 것은 60번 이상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독으로 횡단한 사람은 그 때가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30시간 이상을 자지도 않고 조종을 한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린드버그는 현지시간으로 5월 21일 밤 10시 21분에 파리 르 • 부르제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당시 공항에 몰려든 인파는 공항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누구는 75만명이라고도 하고 또 누구는 100만명이었다고도 합니다. 한 마디로 어마어마한 환영인파였던 것이지요. 이 소식은 미국이나 프랑스만이 아니라 순식간에 전세계에 전해지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찰스 린드버그라고 하는 25세 청년이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그가 도착한 것이 밤 10시 넘어서라고 하니, 파리는 이미 해가 저물고 난 다음이었겠지요. 비행기에서는 파리의 야경이 보였을 것입니다. 린드버그는 하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한 말이 “날개여 저게 바로 파리의 불빛이다” 「翼よ、あれがパリの灯だ!」 Oh, my wings! That is the light of Paris 라고 했다고 합니다. 참 멋있죠?

하지만 뭐, 이건 린드버그가 쓴 자서전에 적혀 있는 말이니까 누가 본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고, 사실 파리에 도착해서 그가 처음 한 말은 무슨 드라마틱한 말이 아니라 <화장실이 어디에요?>라고 했다는 설도 있고, 아니면 <여기 누구 영어할 줄 아는 사람 있어요?>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파리의 야경을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그는 지금까지도 유명한 영웅으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대서양 횡단에 성공했던 횟수는 린드버그 이전에 60회 이상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전했던 사람들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지요. 도전했던 사람들은 훨씬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성공하지는 못했지요.

지금이라면 레이더 기술도 발달하고 했기 때문에 바다 한 가운데에서 사고가 일어났다 하면, 그 흔적이나마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도 예전에 비해 많이 높아졌지만, 그 때는 그런 기술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처럼 무선이나 레이더 기술이 높았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연락이 끊기게 된다면 그냥 바다 어디 한 가운데에서 사라졌구나 하고 그게 끝입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사진 검색을 해보니까, 린드버그가 1927년 5월 21일 밤에 파리에 도착했을 때의 사진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33시간 30분 전인 1927년 5월 20일 새벽 5시 52분에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 루즈벨트 공항을 출발할 때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제 검색기술이 떨어져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찾아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글쎄요. 어디에 있을지는 모르겠지요. 하지만 그 파리에 도착한 순간에 찍힌 사진에 비해서는 훨씬 적은 분량일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마도 그 비행기를 만들어준 기술자도, 그 비행기의 이용을 허락해준 공항 측에서도, 그래, 뭐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도전했을 테니 그 중 한 명이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한 명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이 친구가 성공하겠어? 괜히 젊은 목숨만 날리는 거겠지. 사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뭐하러 찍어? 뭐 그 정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가 파리까지 비행하는 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졸음이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비행이라고는 하지만 33시간이나 아무 것도 없는 바다 위를 비행한다는 일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는 없겠지만, 졸음을 견뎌내기 어렵다는 것은 저도 알 것 같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만, 그 때 한 6시간 정도를 운전해야 할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출발하는 시간이 새벽 4시였습니다. 그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사전에 일찍 자주던가 했을 텐데, 워낙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한숨도 못 자고 새벽 4시에 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말하자면 출발하기 전부터 졸린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또 급한 일이라서 도중에 눈을 붙일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을 하고 보니까 온몸이 아파요. 그래서 왜 그런가 했더니만, 도중에 졸지 않기 위해서 제가 혼자서 온몸을 꼬집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린드버그가 졸린 상태로 출발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목숨을 건 모험 전날, 평소처럼 편하게 잠을 잤다고 보기는 어려웠겠지요. 고작 6시간 동안 졸음을 참기도 힘든 상황에서 그는 무려 33시간이나 그 어려움을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그를 괴롭힌 것은 졸음만이 아니었습니다. 비행기 무게를 줄이기 위해 마실 물도 1리터밖에 싣지 않았고, 먹을 것이라고는 샌드위치 다섯 조각뿐이었다고 하니, 배도 많이 고팠을 것입니다.


졸음과 허기와 싸우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물론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역사적인 일인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도전이 성공만 한다면 자신은 큰 평가를 받을 것이요, 부귀와 영화를 누릴 것이라는 사실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뿐이었을까요? 그는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고, 지금 자기가 날고 있는 이 대서양에서 흔적도 없이 이슬로 사라졌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확인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전화를 걸어서 공포와 고독을 달래줄 사람과 대화할 수도 없습니다. 정말로 파리에 도착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 것일까. 지금처럼 레이더도 없었기에 그는 종이 지도와 나침반을 보고 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만약에 무슨 일이 있어서 이대로 여기서 떨어지면 어떡하나. 그리고 무사히 파리에 도착하면 누군가가 나를 맞아줄까. 아무도 나를 알아봐주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 비행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반드시 해낼 수 있다. 틀림없이 성공적으로 파리에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됐습니까. 그는 결국 아무도 이루어내지 못한 대서양무착륙 단독비행이라는 과업을 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야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고독하지나 않았을까 합니다. 갈멜 산 대결에서 대승을 거두고 거짓 선지자들을 상대로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합이나 이세벨도 나를 인정해주겠구나. 이제서야 내 말이 사실인줄 믿어줄 것이다……이렇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작 이세벨이 어떻게 했대요?

오늘 본문 2절을 봅니다.

열왕기상 19장 2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어쩌면 엘리야는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는데, 여전히 나는 평안할 수가 없구나. 이제 나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쪽을 보아도 내 적군이요, 저쪽을 보아도 아군이 안 보여요. 아무도 나를 지켜줄 사람이 안 보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아나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에 들어가서 기도라고 하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열왕기상 19장 4절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이게 무슨 말이에요. 아휴. 이제 나는 더 이상은 못합니다. 성경에 보면 다른 훌륭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나는 거기에 미치지 못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는데, 다 해봐도 안됩디다. 그러니까 어서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둬주세요……이러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독이란 아무리 훌륭한 선지자요 놀라운 믿음을 가진 선지자 엘리야마저도 이 지경으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엘리야도 그런데 우리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에 보면 이 고독이라는 이름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모세를 보십시오.

백성들이 뻑하면 불평 불만을 늘어놓고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모세를 괴롭힙니다. 모세는 그 누구에게 하소연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고독했습니다. 모세도 너무나도 힘들었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민수기 11장 14절~15절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도 이처럼 극단적인 마음이 들 정도로 괴로워했습니다. 어디서 괴로워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고독이라는 이름의 길 위에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땠습니까. 골리앗을 물리치고 영웅이 될 줄 알았으나, 그는 사울 왕에게 오랫동안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구약에서만 그런가요? 신약에서도 바울을 보십시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채찍질도 당하고 매도 얼마나 많이 맞고 그랬습니까. 누구 하나 나를 도와주는 사람 없고 어딜 돌아보아도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 밖에 안 보입니다. 이럴 때가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그리고 이 고독의 길은 다름아닌 바로 예수님도 걸어가신 길이었습니다. 제사장이 보낸 군인들에 의해 예수님께서 체포 당하실 때의 모습을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예수님을 지키겠다면서 호언장담했던 제자들도 결국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혹시 고독을 겪고 있습니까? 외로우십니까? 주변을 돌아보아도 아무도 내 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길은 주님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닌,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이웃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오직 나만을 의지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순간인 것입니다.

고독의 길은 지금 그 순간 혼자 남겨진 것 같고, 지치고 힘들게 느껴질 지라도, 주님을 의지하면서 조금만 참고 견디시길 바랍니다. 그 길은 우리가 처음 가는 길이 아닙니다.

많은 믿음의 대선배들이 걸어갔던 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걸어가신 길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일수록 주님만을 바라보고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면서 세상을 이기고 마침내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로 힘차게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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