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회 갈증
2017년 8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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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요한복음 4장 16절~18절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갈증’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물 곁에 앉아 계셨는데, 저기서 사마리아 여인이 마침 그 우물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넵니다.
요한복음 4장 7절에 보면,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왜 말을 거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지금 이 장면을 보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 상황을 본다면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길에 보니 우물 곁에 누가 앉아 있어요. 척 보니까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인 우리를 사람 취급도 안 하니까 내가 가면 저리 비켜 앉거나, 아니면 다른 데로 갈 지도 몰라. 그래, 이런 차별을 겪는 게 어디 한 두 번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유대인이 나한테 말을 겁니다. 그것도 차가운 목소리가 아닌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 좀 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여인은 매우 의아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9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인간취급도 안 하지 않느냐. 그런데 어떻게 해서 당신이 나 같은 여자한테 물을 달라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여자가 놀란 이유는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해서가 아니라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인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는 것에 놀랐던 것입니다.
여기서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서로의 말이 엇갈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엇갈리는 것처럼 보이는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이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4장 1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 말씀을 들은 이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음? 아니, 처음에는 나한테 물을 달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제 자기한테 구하면 물이 아니라 생수를 줘? 그게 무슨 말이야?”
당연히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생수>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십니다.
요한복음 4장 13절~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말을 들은 이 여인의 궁금증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나한테 물을 달라고 한 건 자기가 목마르기 때문에 그런 것일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기가 나한테 생수를 준다고 하네? 아니, 세상에 그런 물이 어디 있어? 그런 게 있다면 자기가 마시던가 하지, 왜 나한테 물을 달라고 그래?
여기까지 생각하고 말았다면 어땠겠습니까. 이건 자기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입니다.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생각이지요.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정신이 듭니다. 어? 한 번 마시면 더 이상 목마르지 않아? 그런 물이 있으면 얼마나 편리할까. 그런데 뭐라구? 자기한테 구하면 생수를 준다고? 어디 그럼 나도 한 번 달라고 해봐야겠다.
예를 들어서 어떤 좋은 약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그 약을 먹고 어떤 병이 나았대요. 아, 그렇구나. 그것 참 다행이네. 잘 됐네…….
이것으로 끝나면 그야말로 남의 나라 이야기입니다. 자기 얘기가 아니에요. 그런데 자기 얘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 그렇게 좋은 약이 있어? 그렇다면 나도 한 번 먹어봐야겠구나.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 순간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요,
바로 이 순간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이 내 이야기가 되는 순간이요,
바로 이 순간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내 것이 되는 순간이요,
바로 이 순간이 주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나에게 임하게 되는 순간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가 될 수 있겠구나. 내가 그 생수를 마셔서 더 이상 갈증을 느끼지 않게 된다면 맨날 이렇게 고생하면서 우물을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할까. 그렇게 생각한 이 여인은 이제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요한복음 4장 15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그래요? 그런 축복이 있어요? 그렇다면 그 물을 나한테도 좀 주세요……라고 비로소 예수님께 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여인이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선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래. 나는 갈증이 있어. 목이 말라. 그렇기 때문에 매일 이렇게 힘들게 우물 물을 길으러 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녀가 비록 자신에 대한 일이지만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갈증의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나요? 우리가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갑니다. 여기가 이렇게 아파요. 저기가 저렇게 안 좋습니다……라고 의사 선생님한테 말을 합니다. 그러면 의사 선생님이 그 말만 믿고 나를 치료하나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환자의 말을 듣고 난 다음에 뭘 해요? 예, 검사를 합니다. 청진기를 대 보기도 하고, 맥박을 재볼 지도 모릅니다. 엑스레이를 찍기도 하고요, 심전도 검사나 혈액검사 같은 것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환자의 말이 못 미더워서요?
아니요, 그렇다기 보다는, 환자가 느끼고 있는 통증이나 불편함을 일으키는 보다 더 정확한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서입니다. 어디가 아프다고 해서 반드시 그 부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어쩌면 다른 부분이 안 좋아서 거기가 아플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문제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는 알고 계세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이 여인은 갈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여인 자신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자신이 육체적인 갈증, 단순히 몸 안에 수분이 부족해서 느끼는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이보다도 더욱 심각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사실은 여인 자신도 몰랐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이제 이 여인이 자신에게 생수를 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병원에 가서 의사선생님 말 대로 침대 위에 누운 것이나 마찬가지죠. 자, 제 몸을 맡깁니다. 청진기를 대건 혈액검사를 하건 원하는 대로 검사를 해서 저를 치료해주세요……라면서 의사 선생님한테 치료를 맡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이제 내가 갈증이 있으니까 내 갈증 좀 해소해주세요. 이렇게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스크를 하시고 장갑을 끼시고는 이제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에 이 사마리아 여인이었다면 어떤 것을 상상했을까요.
예수님한테 더 이상 목이 마르지 않는 생수를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주머니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물통을 꺼내시고는, 자, 이걸 마셔. 이게 바로 그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 생수야……. 뭐 이런 모습을 상상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머니에서 물통을 꺼내시는 것도 아니요, 생수가 나오는 우물이 있는 위치를 알려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4장 16절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 말씀이 바로 이 여인을 치료하기 위한 첫마디였습니다. 그야말로 동문서답 아니겠습니까? 아니, 목이 안 마르게 되는 물을 달라고 했는데, 왜 뜬금없이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는 것입니까. 이건 마치 내가 팔이 부러져서 병원에 갔는데 소화제만 주고 집에 가라는 것처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물으시는 말씀에 대해서 솔직히 고백을 합니다.
다음 구절 전반부에 보면 이 여인의 고백이 나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 말씀을 듣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17절 후반부에서 18절까지를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했더니 남편이 없다고? 그래 맞아. 너한테 지금까지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지만 그게 다 네 남편이 아니고, 그 뿐만이 아니라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니까, 지금 너한테 남편이 없다고 한 네 말이 맞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이 사마리아 여인 옆에 누가 서서 이 말씀을 들었다면 뭐라고 했겠어요? 아니, 여보쇼. 당신이 선지자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이 여인은 모든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이 갖고 있는 진정한 갈증의 원인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엇갈리는 것처럼 이어졌던 대화가 비로소 모두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다양한 방면에서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 과거에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여자는 그저 결혼해서 애 낳고 집안 살림이나 하면 되는 것이지, 여자가 배워서 뭘 하느냐……라고 하는 풍조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그랬는데, 하물며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인 예수님 당시에는 오죽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사마리아 여인도 남편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믿을 만한, 자신이 의지할 만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만한 남편을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 난 남편이 다섯 명이 아니니까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야, 또는 나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이기 때문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야, 나는 미혼이기 때문에, 나는 직업이 있기 때문에 나와는 무관한 이야기야……우리가 만약에 이렇게 이해하게 된다면, 이는 성경을 반의 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과연 그녀가 원했던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어떤 부족함을 채워줄 사람을 원했던 것이었을까요.
어쩌면 경제적인 풍요로움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기만 하면, 돈만 있으면 나는 행복하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돈을 남편 삼아봤습니다. 하지만 어땠습니까. 그녀의 갈증이 해소 되었습니까. 아니요. 아무리 밤낮없이 돈을 모으고 재산을 늘려가 보아도 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점점 더 목이 말라갑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지고 통장의 숫자가 늘어가도 만족을 느낄 수가 없어요.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 안되겠다. 돈이 내 마음을 채워줄 수 없구나. 그래서 갈아치웁니다. 이제는 그래, 명예를 내 남편으로 삼아보자, 그러면서 또 많은 사람들로부터 평가 받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상을 받기 위해서, 칭찬을 받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상을 받아도, 아무리 남들이 나를 칭찬하고 박수를 쳐줘도, 역시 내 마음은 공허해집니다. 나를 바라보는 저 눈빛, 나에게 찬사를 보내주고 박수를 쳐주고 칭찬해주기는 하지만,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나를 시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훌륭한 성과를 올렸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나를 추월해서 올라갈까봐 불안함이 항상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또 안되겠다. 그러면서 이제는 권력을 좇아갑니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많은 돈과 많은 사람들을 총동원해서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었습니다. 이제 내가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머리를 숙입니다. 어디를 가나 나는 VIP 귀빈 대우를 해줍니다. 어떻게 해서든 내 눈에 들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무슨 날만 되면 여기저기서 보내오는 선물들로 가득 찹니다. 하지만, 내가 안 보는 곳에서는 나를 모해합니다. 내 욕을 합니다. 그리고 나를 어떻게 해서든 권력의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 사람들이 늘 존재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을 채워줄 것을 찾아봐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내 갈증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도 아니야, 저것도 아니야 하면서, 마치 무슨 남편을 갈아 치우듯, 부인을 갈아 치우듯 세상 속에서, 세파에 떠밀리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모습인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우리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오늘 이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남편이 다섯이 있었는데 모두 네 남편이 아니었고, 지금 네가 의지하고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다……만약에 이 사마리아 여인이 이렇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았다면, 우리는 그 여인에게 뭐라고 했겠어요?
이보쇼. 인생 그렇게 살지 마. 그렇게 살아서 뭘 어쩌려고 그래? 뭐 그러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이것은 윤리적이나 도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영적인 갈증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을 전혀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비난하지도 않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 세상에 살면서 세상적인 것으로 갈증을 해소해보려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니. 이것으로도 채우려고 해보고, 저것으로도 채우려고 해보았지만, 결국 내 마음 속의 공허함만 늘어갈 뿐 그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한 우리의 심정,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또 다른 세상적인 욕망을 좇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얘야, 그것도 네 남편이 아니야……. 네가 잡으려는 세상적인 욕심이나 욕망으로는 네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 오히려 더 목이 말라갈 뿐이야……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세상 욕심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욕망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을 다시 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모두 다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적인 것으로는 아무리 많이 가져봤자 우리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야말로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과 진정한 감사함이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고, 세상이 주는 공허한 기쁨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를 마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기쁨과 진정한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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