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회 우리들의 희로애락
2017년 10월 15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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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요나 4장 6절~8절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들의 희로애락’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고자 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밋대의 아들 요나한테 말씀하시기를 니느웨에 가서, “너희들의 죄악이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라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이 요나가 한 행동이 참 흥미롭죠? 니느웨로 가라고 했더니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니느웨라고 하는 곳은 당시 앗수르라는 나라의 수도입니다. 그리고 니느웨와 다시스의 방향은 거의 반대방향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또 흥미로운 것은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기 싫어서 다시스로 갔다고 하는데, 그 거리가 보통이 아닙니다. 무슨 엄마 심부름 하기 싫어서 친구네로 도망간 정도가 아니에요. 요나가 정확히 어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이었다는 것은 요나가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까지 내려갔다는 글로 알 수 있습니다. <욥바>라고 하는 곳은 예루살렘에서 6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항구도시인데, 여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요나가 있었던 곳이 일단 예루살렘이었다고 한다면 니느웨는 지금의 이라크 정도 되는 곳으로서, 대략 800km 정도 되는 거리였다고 하는데, 요나가 도망가고자 했던 목적지인 다시스는 지금의 스페인 쪽이라고 해요. 그래서 거리가 무려 3200km 정도 떨어진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저 잠깐 피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작심하고 도망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어떤 분들은 요나더러 불순종한 못된 사람으로 낙인을 찍기도 합니다만 과연 그럴까요? 요나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일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니느웨가 수도인 앗수르 제국은 이스라엘을 무척이나 괴롭혔던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괴롭혔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맨날 자기 나라를 공격하고 못살게 굴고 하는 나라가 좋았을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쉽게 물리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대단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자랑합니다.
그런 최강국이자 적대국인 나라에 가서 무슨 좋은 소리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너희들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다 아신다……이런 말을 하러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당시 일제시대 때, 조선은 일본이 빨리 망하는 것을 원했을 텐데, 하나님이 조선에 있는 한 기독교 신자한테 말씀하시기를, 일본에 가서 너희들의 죄악을 하나님이 모두 아신다! 그러니까 회개하라! 라고 말하기를 명하시면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요나더러 무슨 불순종한 선지자다, 나약한 선지자다 하고 손가락질 하기는 쉽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사명을 하나님이 주셨을 때,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은 지극히 의문입니다.
요나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구체적인 사전설명은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아무나 선지자로 택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에 아무나 택했다고 하면 그야말로 하나님이 사람을 잘못 골랐다, 하나님이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 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가 불순종했다는 것은, 요나가 나약해서였다기보다는, 당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명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지자한테 조차도 그만큼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이었다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 요나서는 비록 짧은 책이긴 합니다만, 여기에는 너무나도 드릴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후반부에 있는 구절을 말씀 드려야 하기 때문에 전반부는 조금 빨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요나가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는데 풍랑을 만납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배를 가볍게 하려고 짐들을 바다에 던집니다. 그래도 잠잠해지지 않자, 이 풍랑이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지를 알아보자고 하면서 제비를 뽑자고 합니다. 그랬더니 요나가 뽑혔어요. 요나는 이것을 보고 그래,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달아나려고 하니 이렇게 난리가 나는구나, 하고 깨닫고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다는 잔잔해지고, 바다로 던져진 요나를 큰 물고기가 삼켜버리고 맙니다. 요나는 이제 물고기 뱃속에서 무려 3일 동안을 보낸 다음 육지로 나오게 되지요. 요나가 도망치려 했던 곳은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이었지만, 뱃속에서 나온 곳은 니느웨 근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넣으시고 니느웨 쪽으로 강제송환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자, 이제 뱃속에서 나온 요나한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나 3장 1절~2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지금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갇혀 있다가 이제 간신히 물고기가 토하는 바람에 밖으로 나왔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있으면서 죽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지요.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물고기 뱃속에 불이 있겠어요? 3일 동안 캄캄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간신히 나왔습니다. 이 때가 낮인지 밤인지는 적혀 있지는 않습니다만, 낮이었다면 얼마나 눈이 부셨을 것이고, 밤이면 거기가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마음이 급하십니다. 어서 일어나라는 거예요. 그리고 빨리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너한테 말한 것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뭐라고 하셨어요. 예, 너희들이 지금 짓고 있는 죄를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라는 말씀이었죠. 그런데 이 부분을 기록한 말씀을 보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요나 3장 3절~4절입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이 구절에 보면 요나가 더 한 말이 있었지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 말씀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겠지요. 당시 니느웨라고 하는 도시 크기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만, 성경에는 분명히 <큰 성읍>이라고 하고, 그 기준을 <사흘 동안 걸을 만큼>이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굳이 <사흘 동안 걸을 만큼>이라고 한 이유는, 물론 당시 어떤 도시 규모를 표현하는 방법일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오히려 그 다음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요나는 어떻게 했대요? 예, 하루 동안 다니면서 외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니느웨 전체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3일을 다녀야 하는데, 하루만 다니면서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은 그 성읍의 1/3 정도밖에 안 돌아다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면 이 요나가 니느웨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얼마나 하나님이 이 성읍을 멸망시켜주시기를 바랬는지, 얼마나 니느웨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참으로 불성실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나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되었대요?
요나 3장 5절~9절을 보면요,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정말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지독한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하면서 회개했다는 것이에요. 이 앗수르는 본래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 무성의하고 불성실한 요나의 말 한마디를 듣고 온 국민은 물론이거니와, 니느웨 왕까지 금식과 회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니느웨 대부흥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것이 누구였습니까. 그렇죠. 바로 요나였습니다. 요나가 비록 강제적이긴 했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니느웨에서 선포함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하지만 요나는 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는 요나의 심보가 고약해서가 아니에요.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을 그렇게 괴롭히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가고 노략질을 하던 나라가 바로 앗수르였습니다. 요나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앗수르의 멸망을 원하고 있었고, 앗수르의 멸망이야말로 이스라엘의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지극히 무성의한 전도를 했을 뿐인데, 이 말을 듣고 하나님을 믿지를 않나, 금식을 하지 않나, 회개를 하지 않나……그러자 결국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부터가 오늘 말씀의 본론입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드린 이유는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부터 나오는 요나의 감정표현이 얼마나 풍부한지 한 번 보세요.
이를 보고 요나는 기뻐했겠어요? 아니죠. 반대로 무척 화를 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나 4장 1절~4절까지를 봅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요나를 보니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 가지 말이 있습니다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거 봐요. 이럴 거면 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말을 하지 그랬어요.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내가 다시스로 도망친 거 아니에요. 아~~열 받아. 나 정말 죽겠으니까 어서 빨리 내 생명이나 거둬가쇼.”
뭐 이러면서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모자란 사람이에요? 요나가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사실 내용이 좀 그렇습니다만, 이 정도로 하나님과 가깝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보통 인물입니까. 우리가 만약에 요나였더라면 더 속상해하고 불평을 했지, 요나보다 낫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나가 그래도 또 혹시 몰라서, 어쩌면 그 중에서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한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을까 해서, 그것을 지켜보려고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앉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다음부터가 오늘 본문입니다.
요나 4장 6절~8절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여기 이 세 구절에 보면 요나의 극단적인 감정표현이 두 군데 나옵니다.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크게 기뻐했다는 것과, 둘째는 죽기를 구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뜨거운 동풍>이 불었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북아프리카 쪽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바람 중에 <시로코(Sirocco)>라고 하는 열풍이 있다고 합니다만. 이 바람은 보통 초여름에 불어온다고 합니다. 이 바람은 똑같은 열풍인데 어떤 때는 대단히 건조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대단히 습하기도 해서, 이 바람이 불면 대체적으로 불쾌지수가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나도 그 때 이렇게 예민했는지 모르지만, 그 때가 이 시로코라고 하는 바람이 불어오는 초여름이었다고 하면 햇빛도 대단히 강했을 것입니다.
요나가 머물렀던 초막은 집으로서 완벽하지가 않았겠지요. 요나도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박넝쿨을 예비해주셨다는 것이에요. 그랬더니 요나가 어떻게 했대요? 예, 크게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놔두시면 좋으실 것을, 하나님이 이번에는 벌레를 예비하셔서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뜨거운 바람, 열풍을 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뜨거운 바람은 불어오죠, 거기에 강한 햇빛을 가려줄 박넝쿨도 없어졌죠, 그러니까 정신이 혼미해져서는 이제 자기를 죽여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든, 저는 지금까지 이 요나라는 선지자에 대해서 꿋꿋이 변호하고 왔습니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이 어떤 상황입니까.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까지 하나님께 이끌려 와서, 큰 도시 니느웨에서 회개를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니느웨에 대한 운명을 생각하고 계실 때에, 거기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구원사역을 생각하고 계실 때에, 선지자이자 선교사로 온 장본인인 요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면, 박 넝쿨 하나가 생겼다고 크게 기뻐하다가, 그 넝쿨 하나가 사라지니까 나를 죽여달라고 하나님한테 떼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로애락도 어쩌면 이런 수준인지 모르겠습니다. 희로애락……기뻐하고 화를 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이와 같은 감정을 모두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근시안적으로, 조금 좋은 일이 있으면 히히 거리다가, 조금 섭섭한 일이 있으면 화를 내고, 좋은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슬퍼하다가, 또 조금 좋은 일이 있으면 즐거워하고……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사람들인가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별볼일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큰 사랑을 허락하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해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죄 안에서 허덕이다가 결국은 지옥으로 떨어져서 영원토록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 속에서 고통을 당할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까지도 내주실 만큼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구약에는 우리와 같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성전을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괜히 사랑하셨나요? 아닙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감당해야 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이는 목사나 선교사만이 감당해야 하는 사역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하는 사명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천하가 어디입니까. 만민이 누구입니까. 내가 있는 곳이 바로 천하요, 예수님을 믿지 않거나, 믿다가 안 믿게 된 이웃이 바로 만민인 것입니다. 지금 그와 같은 막중한 상황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 채, 그저 초막에 앉아서 박넝쿨 하나에 크게 기뻐하고, 벌레 한 마리 때문에 못 살겠다, 죽고 싶다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가 없었는지, 우리 스스로를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희로애락만으로도 모자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근심, 불안, 불평, 불만을 일삼고 있지나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 좋습니다.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하면 할수록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서 버스를 탈 때 <이 버스가 서울역에 갑니까>라고 물었더니 <예, 갑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예, 그 버스는 서울역에 간다고 믿어야죠.
그런데 그 버스에 탔으면서도 서울역까지 갈 수 있도록 금식하고, “이 버스가 서울역까지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그러면서 버스 안에서 통성기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버스 기사 아저씨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니, 서울역까지 간다니까요. 왜 안 믿어요?” 그럴 거 아니겠어요?
여러분,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렇다면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우리는 잘 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룹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우리가 받을 고통과 고난은 예수님께서 이미 2천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모두 해결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이 있는데,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박넝쿨 한 두 개 때문에 슬퍼했다가 걱정했다가, 근심했다가, 낙심했다가, 좌절했다가 하면, 마귀들이 보고 얼마나 깔깔대고 좋아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슬픔과 걱정과 근심과 낙심과 좌절을 모두 버려버리고,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을 갖고,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승리를 모두 얻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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