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회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
2017년 11월 26일 설교

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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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 神様を宣べ伝える人生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천사한테는 날개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른바 천사라고 하면 우리는 날개가 있는 천사를 연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많은 예술가들도 천사를 그릴 때에 보면 반드시 날개를 그려왔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천사들을 보면 날개에 대한 묘사가 있는 것도 있지만 없는 것도 있습니다.

사사기 13장 16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すると、主の使いはマノアに言った。「たとい、あなたがわたしを引き止めても、わたしはあなたの食物は食べない。もし全焼のいけにえをささげたいなら、それは主にささげなさい。」マノアはその方が主の使いであることを知らなかったのである。

이는 여호와의 사자인 천사가 삼손의 탄생을 그의 아버지인 마노아에게 알리는 장면입니다만, 성경에는 천사를 보고도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보았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큰 날개가 달린 천사를 보았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누구나가 다 금새 알아보았겠습니다만, 이처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는 얼핏 보기에 우리와도 같은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천사 이름 중에는 가브리엘과 미가엘이 성경에 나옵니다. 가브리엘은 구약에서는 다니엘서에 등장하고 신약에서는 누가복음에 등장하지요. 미가엘은 천사장이라고 합니다. 미가엘은 구약에 보면 역시 다니엘서에 등장하고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합니다. 여기서 보면 그 어디에도 그들에게 날개가 있었다고 묘사한 부분은 없습니다.

물론 다니엘 9장 21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곧 내가 기도할 때에 이전에 환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すなわち、私がまだ祈って語っているとき、私が初めに幻の中で見たあの人、ガブリエルが、夕方のささげ物をささげるころ、すばやく飛んで来て、私に近づき、

가브리엘이 다니엘의 기도 응답을 위해서 빠른 속도로 날아 왔다고 합니다. 여기에 특별히 <날아 왔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분명 날개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옛날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해석하였습니다만, 여기서 <날다>라고 하는 원어 뜻에 대한 해석도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이 주장하기로는 <날다>라고 하는 뜻에는 <지치다>, <피곤하다>라는 뜻도 있다고 하면서, 이는 다니엘이 오랜 기도 때문에 지쳐 있을 때에 가브리엘이 왔다……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날라왔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럼 가브리엘이 아닌 다른 천사들, 날개가 없는 천사들은 그럼 어떻게 내려왔겠습니까. 하늘에서 사다리라도 타고 내려왔겠어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성경을 열심히 읽으신 분이라면 어떤 한 구절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창세기 28장 12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そのうちに、彼は夢を見た。見よ。一つのはしごが地に向けて立てられている。その頂は天に届き、見よ、神の使いたちが、そのはしごを上り下りしている。

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이를 보고, 거봐. 날개가 있는 천사들은 하늘에서 날아서 이 땅에 오고, 그렇지 않은 천사들은 사닥다리를 타고 왔다 갔다 한 거야……

라고 말씀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생각해보세요. 천사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일인데,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으면 저기 하늘나라에서 열심히 사닥다리를 타고 이 땅에 내려와서 일을 하고는, 임무를 마친 다음에는 다시 열심히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요? 그건 좀 무리가 있겠지요. 여기 야곱에게 나타난 사닥다리는 어디까지나 환상입니다. 이는 천사들이 고생하면서 저 하늘까지 왔다 갔다 했다는 뜻이 아니라, 야곱이 자기가 살던 집에서 도망 나와서 외롭게 가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와 이 땅 사이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이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려고 환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증거로 앞서 말씀 드렸던, 삼손의 출생을 알린 천사가 다시 하늘로 올라갈 때 사닥다리를 타고 갔을까요?

사사기 13장 20절에 보면,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炎が祭壇から天に向かって上ったとき、マノアとその妻の見ているところで、主の使いは祭壇の炎の中を上って行った。彼らは地にひれ伏した。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준비했더니,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데, 이와 함께 여호와의 사자도 제단 불꽃에 휩싸여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천사한테는 날개가 있었고, 날개가 있어야지만 하늘을 날 수 있고 하늘나라와 이 땅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땅에서의 얄팍한 기준을 두고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 16장 5절~6절을 봅니다.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それで、墓の中に入ったところ、真っ白な長い衣をまとった青年が右側にすわっているのが見えた。彼女 たちは驚いた。青年は言った。「驚い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がたは、十字架につけられたナザレ人イエスを捜しているのでしょう。あの方はよみがえられました。ここにはおられません。ご 覧なさい。ここがあの方の納められた所です。

이는 예수님 시신 위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갔다가, 빈 무덤 안에서 천사를 만났을 때의 묘사입니다. 여기에는 단지 흰 옷을 입은 청년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만약에 날개가 있었다면 흰 옷을 입었다거나 청년이라거나 하는 게 문제겠어요? 적어도 날개가 달린 청년을 보고……이렇게 되어 있어야겠지요. 하지만 여기에도 역시 날개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사한테는 날개가 없을까요? 아뇨. 확실하게 날개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룹(ケルビム)과 스랍(セラフィム)입니다. 실제 그룹(ケルビム)에 대한 묘사는 에스겔서(エゼキエル書) 에 많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날개에 대한 묘사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룹(ケルビム)이 많이 등장하는 곳은 출애굽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성막(幕屋)을 제작하는 장면인데, 여기에 보면 성소 여기저기에 날개가 있는 그룹(ケルビム) 천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하나님의 법궤나 성막에는 일반 천사가 아닌 그룹(ケルビム) 천사가 새겨지거나 그려졌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그룹(ケルビム)천사의 임무는 주로 지키는 일입니다. 사실 천사들 중에서 성경에 제일 처음 등장하는 천사가 바로 이 그룹(ケルビム)천사인데, 어디에 등장하냐 하면 창세기에, 그것도 창세기 3장에 벌써 등장합니다.

창세기 3장 24절을 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こうして、神は人を追放して、いのちの木への道を守るために、エデンの園の東に、ケルビムと輪を描いて回る炎の剣を置かれた。

아담과 하와는 본래 에덴에 있으면서, 우리를 영생하게 하는 생명나무도 마음대로 따먹을 수가 있었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에덴으로 이어지는 길, 생명나무로 이어지는 길을 막은 것이 누구였냐 하면 바로 그룹(ケルビム) 천사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그룹(ケルビム) 천사가 지키고 있는 곳을 함부로 지나치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 곧바로 죽음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궤의 모양을 보더라도 그룹(ケルビム) 천사의 날개로 덮여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5장 20절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ケルビムは翼を上のほうに伸べ広げ、その翼 で『贖(あがな)いのふた』をおおうようにする。互いに向かい合って、ケルビムの顔が『贖いのふた』に向かうよう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

여기서의 속죄소는 법궤神の契約の箱의 뚜껑을 말합니다. 이처럼 그룹(ケルビム) 천사로 하여금 법궤를 지키게 했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를 열어보려고 했다가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무엘상 6장 19절을 보면 이를 열어보려고 했던 벧세메스(ベテ・シェメシュ)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죽이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법궤가 놓여져 있는 곳은 어디였냐 하면 바로 지성소였습니다. 과거에는 성전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성소만 하더라도 일반 사람은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고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으며, 법궤가 놓여져 있는 지성소에는 제사장들 중에서도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대속죄일에 단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아무리 대제사장이라 한다 하더라도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곳이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옛날이라면 이 땅의 임금님을 만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임금님 앞에서 자칫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대제사장들도 마찬가지였지요. 당시 제사장 복장에는 방울이 달려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과정에서 죽을 수도 있었는데, 이 방울소리가 나면 죽지 않은 것이고, 방울소리가 안 나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소와 지성소는 대단히 거룩하게 구별된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휘장으로 구분이 되어 있어서, 밖에서는 그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마가복음 15장 37절~38절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大声をあげて息を引き取られた。神殿の幕が上から下まで真っ二つに裂けた。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시고, 모든 징계를 대신해서 받으시고, 모든 심판을 대신해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위에서 숨이 끊어지셨을 바로 그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완전히 둘로 찢어졌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마가복음만이 아니라 공관복음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된 사건입니다. 아니 휘장이 찢어진 게 뭐가 그리 대단하기에 이처럼 공관복음 기자가 모두 적어 놓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소 휘장에 대한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6장 31절~33절을 봅니다.
“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ケルビム)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 금 갈고리를 네 기둥 위에 늘어뜨리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 받침 위에 둘지며 그 휘장을 갈고리 아래에 늘어뜨린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 안에 들여놓으라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
青色、紫色、緋色の撚り糸、撚(よ)り糸で織った亜麻布(あまぬの)で垂れ幕を作る。これに巧みな細工でケルビムを織り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これを、四つの銀の 台座 の上に据えられ、その鉤(かぎ)が金でできている、金をかぶせたアカシヤ材の四本の柱につける。その垂れ幕を留(と)め金の下に掛け、その垂れ幕の内側に、あかしの箱を運び入れる。その垂れ幕は、あなたがたのために聖所と至聖所との仕切りとなる。
이 기록에 의하면 법궤만이 아니라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해 놓은 휘장에는 바로 다름 아닌 그룹(ケルビム) 천사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단지 그림으로 그려놓으면 지워질까봐 정교하게 수를 놓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죠? 그룹(ケルビム) 천사의 최초 역할이 무엇이었습니까. 죄를 짓고 타락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를 지키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타락한 상황에서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인하여 영생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하나도 남김 없이 해결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지키고 있던 그룹(ケルビム) 천사들이 물러나고 생명으로 가는 길, 생명나무로 가는 길,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지성소가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있는 교회가 성소이고 지성소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꼭 교회만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주님을 부르는 곳, 우리가 주님 이름으로 모인 바로 그 곳이 성소이자 지성소입니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통해서가 아닌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날개 가진 천사에 대해서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스랍(セラフィム)>이라고 하는 이름의 천사입니다. 이 스랍(セラフィム)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단 두 구절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이사야 6장 2절과 6절인데, 특히 2절~3절에 이 스랍(セラフィム)에 대한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セラフィムがその上に立っていた。彼らはそれぞれ六つの翼があり、おのおのその二つで顔をおおい、二つで両足 をおおい、二つで飛んでおり、互いに呼びかわして言っていた。「聖なる、聖なる、聖なる、万軍の主。その栄光は全地に満つ。」

이 스랍(セラフィム)은 낮이나 밤이나 하나님 곁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입니다. 그런데 이 천사의 모습이 독특합니다. 날개가 여섯이 있는데 둘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자기 발을 가리고, 그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아다니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류폴드라는 분은, 얼굴을 가린 것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이고, 발을 가린 것은 먼지로 자주 더럽혀지는 발의 상대적인 불경건성 때문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 해석에 상당히 의문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는 없으나 하늘의 천사들이 하나님 얼굴을 볼 수가 없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고, 또한 날개로 날아다니는 스랍(セラフィム)에게 있어서 발이 불경건하다는 표현도 쉽게 이해가 안 됩니다.

여기에 있어서의 힌트가 바로 오늘 본문이 있는 이사야 43장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43장 2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으신 이유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문맥을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송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되어야 할 텐데, 어디 한 번 그 다음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43장 22절~24절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제물로 말미암아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말미암아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v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하게 하지 아니하고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しかしヤコブよ。あなたはわたしを呼び求めなかった。イスラエルよ。あなたはわたしのために労苦しなかった。
あなたはわたしに、全焼のいけにえの羊を携 えて来ず、いけにえをささげて、わたしをあがめようともしなかった。わたしは穀物のささげ物のことで、あなたに苦労をさせず、乳香(にゅうこう)のことであなたを煩わせもしなかった。
あなたはわたしのために、金を払って菖蒲(しょうぶ)を買わず、いけにえの脂肪で、わたしを満足させなかった。かえって、あなたの罪で、わたしに苦労をさせ、あなたの不義で、わたしを煩わせただけだ。

여러분, 어떠세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찬송하라고 지어놨더니 제대로 찬송하지 않더라……라는 말씀을 하시려면, 무슨 노래를 많이 하지 않는다거나, 노래 실력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말씀을 하실 만도 한데, 노래에 대한 말씀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하나님을 괴롭게 여겼고, 하나님께 제물로 공경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너한테 돈을 벌게 해주고 재물도 너한테 많이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서 그것을 쓰지 않고 오히려 네 죄악들로 인해서 나를 괴롭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디에도 노래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나는 너한테 많은 것을 주었는데, 너는 그것을 가지고 나를 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죄악으로 하나님을 힘들게 할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랍(セラフィム) 천사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스랍(セラフィム)의 모습은 얼굴을 가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려고 합니다.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려고 합니다. 하나님 얼굴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하나님 이름을 널리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발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디로든 가고자 하는 행위는 발로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악의 길로 갈 것인가 하는 기로에 우리는 항상 서 있기 마련입니다.

20세기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Life is C between B and D. 우리의 인생은 B와 D 사이에 있는 C이다. 이 말은 B는 birth, 탄생이고, D는 death…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알파벳으로 보더라도 B와 D 사이에 C가 있는데 우리 인생에도 B와 D 사이에 C가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C Choice 그렇습니다. 바로 선택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보내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돈 많은 부모를 만나야만 가능한가요? 행운이 있어야지만 하나요? 아닙니다. 순간 순간마다 선택만 잘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인지를 우리는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까. 돈이나 재산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건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을 섬길 것인지를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요,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과거에는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지성소로 들어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지성소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남은 삶의 기간 동안, 나를 위한 선택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선택을 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주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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