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회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삶
2017년 12월 31일 설교

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삶” イエス様の心を抱く人生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가족끼리 살아도 그렇습니다만, 특히 혼자 살게 되면 이사를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사를 할 때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이 책들입니다. 책들이 참 무거워요. 이사를 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을 때에는 요령도 모르고 하니까, 짐을 쌀 때 박스 안에 책을 가득 채워 넣습니다. 그러면 이걸 옮길 때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에요. 상당히 무겁습니다. 원래 책을 쌀 때에는 그렇게 하면 안 된대요. 박스 속에 책을 넣을 때에는 절반 정도만 채워 넣고, 나머지는 잡동사니 같은 것을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거워서 도저히 들 수 없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짐을 싸게 되면 박스 한 개당의 무게는 줄어드는 대신 개수는 늘어나고 맙니다. 결국 이사를 할 때에 책들이 골칫거리라고 하는 사실에는 별함이 없게 되는 셈이지요.

제가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짐을 쌀 때 가장 골칫거리가 이 책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서울 시내 여기서 저기까지 이사를 한다고 하면, 요즘은 박스에 포장을 다 해놓고 난 다음에는 아예 이삿짐 센터에 맡깁니다. 그러면 그 분들이 와서 전문적으로 운반하는 짐차 같은 것에 싣게 되면 별 문제가 없이 해결됩니다. 그런데 이를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져오게 된다면 말이 달라지죠. 그 무게에 따라 돈도 들고, 또 배편으로 일일이 부친다고 하더라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박스 하나 당 20킬로 밖에 넣을 수 없다고 하는데, 솔직히 책 몇 권이면 20킬로는 금방 넘어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을 한 결과, 제가 그 동안 가지고 있든 책들을 처분하기로 했습니다. 그 동안 이사를 할 때마다 가지고 다녔던 책들인데 애착도 많았습니다만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 중에서 꼭 필요한 몇 권만 남기고는 헌책방에 팔고 그랬습니다. 그 동안 자주 보지도 않는 책들을 무슨 보물단지처럼 가지고 다녔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다 미련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걸 다 처분하고 오니까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모릅니다.


아마 저희 집에 있었던 책들 중에서 90프로 이상은 처분한 것 같습니다. 나머지 10프로만 가지고 왔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더 처분하고 와도 됐었겠다 싶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렇게 책들을 버리지 못하고 어딜 가나 고생고생 하면서 가지고 다녔던 제 모습이 참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책 욕심이라는 것이 사실 만만치 않습니다.

제가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 어떤 일본 교수 분이 계셨는데, 이 분 전공은 일본어예요, 일본어를 전공하는 교수님이시니까 아무래도 집이나 서재에는 이와 관련된 책이 많겠지요? 자기 집에는 책을 둘 곳이 없어서 방이고 창고고 할 것 없이 책이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분이 하시는 말씀이 좀 흥미롭습니다.

일본어 사전 중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일본국어대사전>이라는 책인데 전체가 두꺼운 책들로 10권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자기가 존경하는 어떤 교수님이 이사하시는데 갔었는데, 그 분이 자기한테 그 사전을 가져가겠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자기는 얼릉 달라고 해서 가져왔다고는 하는데, 여기까지 들으면 뭐 그런가 보다, 나는 잘 모르지만 귀한 책을 얻을 수 있었나 보다…할 텐데, 그런데 이 분이 하시는 말이 자기 집에 아마도 이미 이 사전이 2세트가 있을 거라는 거예요.

아니, 그럼 왜 그렇게 부피가 많은 것을 가져왔냐고 하니까, 자기는 책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다는 겁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조금 의아했습니다. 교수님이시고 책이 많다는 것은 알겠지만, 책을 둘 곳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그렇게 부피가 있는 책을 좋다고 얻어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미 자기 집에 한 두 세트 있다고 하는데,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보니까 그 책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은, 그다지 볼 일도 없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 이게 무엇입니까. 바로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분 이야기를 들으면서, 분명 이 분은 저보다 많이 배운 분이시겠지만, 얼마나 지혜롭지 못하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なぜなら私は、あなたがたの間で、イエス・キリスト、すなわち十字架につけられた方のほかは、何も知らないことに決心したからです。

바울이 어떠한 인물입니까. 그 당시 최고의 학교에서 공부했었고, 뿐만 아니라 지금으로 본다면 어려운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책도 많이 읽었겠지요. 지식도 웬만한 사람들보다 많았을 것입니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출세와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그가 얼마나 지식이 많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베스도 앞에서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합니다. 그런 바울에게 베스도 총독이 말합니다.

사도행전 26장 24절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パウロがこのように弁明していると、フェストが大声で、「気が狂っているぞ。パウロ。博学があなたの気を狂わせている」と言った。


생각해보십시오. 이 베스도라는 사람도 총독까지 오른 인물이니 남부럽지 않은 엘리트입니다. 얼마나 많은 지식과 경력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총독 조차도 인정할 정도로 바울은 학식이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바울이 또 말합니다.

골로새서 2장 8절을 봅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あのむなしい、だましごとの哲学によってだれのとりこにもならぬよう、注意しなさい。それは人の言い伝えによるもの、この世の幼稚な教えによるものであって、キリストに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그 시대에 학문 중에서 가장 으뜸을 꼽으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철학을 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에 있어서 당시 가장 선진국이었던 나라는 바로 그리스입니다.

그리스 철학자라고 하면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유명한 사람들이 즐비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당시 최고의 학문이었다고 하는 철학을 그저 초등학문이라고 깎아 내립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울은 그렇다면 철학을 잘 몰라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아니면 당시 학문적으로 가장 선진국이었던 헬라 그리스를 잘 몰랐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었던 것일까요?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신약성경 중에서 복음서를 제외한다면 상당부분이 바울이 각 교회나 개인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디모데 전후서, 디도서, 빌래몬서 등은 바울이 쓴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이 어느 나라 말로 적혀 있냐 하면 헬라어 즉 그리스어로 적혀 있습니다.


그 정도로 그리스어에 능통했던 바울이, 그리고 당시 고등학문을 했던 바울이 그리스 철학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아니, 몰랐을 정도가 아니라 대단히 열심히 공부했었을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 잠시 솔로몬 왕에 대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솔로몬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셔서 전무후무한 대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나라는 평안했었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시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솔로몬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다.

전도서 2장 3절~11절을 봅니다.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
v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 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
v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
v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私は心の中で、私の心は知恵によって導かれているが、からだはぶどう酒で元気づけようと考えた。人の子が短い一生の間、天の下でする事について、何が良いかを見るまでは、愚かさを身につけていようと考えた。
私は事業を拡張し、邸宅を建て、ぶどう畑を設け、
庭と園を造り、そこにあらゆる種類の果樹を植えた。
木の茂った森を潤すために池も造った。
私は男女の奴隷を得た。私には家で生まれた奴隷があった。私には、私より先にエルサレムにいただれよりも多くの牛や羊もあった。
私はまた、銀や金、それに王たちや諸州の宝も集めた。私は男女の歌うたいをつくり、人の子らの快楽である多くのそばめを手に入れた。
私は、私より先にエルサレムにいただれよりも偉大な者となった。しかも、私の知恵は私から離れなかった。
私は、私の目の欲するものは何でも拒まず、心のおもむくままに、あらゆる楽しみをした。実に私の心はどんな労苦をも喜 んだ。これが、私のすべての労苦による私の受ける分であった。
しかし、私が手がけたあらゆる事業と、そのために私が骨折った労苦とを振り返ってみると、なんと、すべてがむなしいことよ。風を追うようなものだ。日の下には何一つ 益になるものはない。

이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좀 행복해지려고 많은 일들을 해봤어. 재산도 많이 늘려봤어. 부인이 많으면 좋을 줄 알고 여자들도 많이 거느려 봤어. 내가 보고 싶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해봤어.

그리고 전도서 2장 25절을 보십시오.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実に、神から離れて、だれが食べ、だれが楽しむことができようか。

그랬더니 어떻게 됐다고 합니까. 기쁨이 충만했대요? 너무나도 행복하게 됐답니까?

아니요, 오히려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것이 모두 다 헛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능력으로 내 육신을 위해서 다 해보았지만, 그게 모두가 다 헛되고 헛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입니까. 전도서에 보면 흥미로운 말이 나옵니다.


전도서 9장 9절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日の下であなたに与えられたむなしい一生の間に、あなたの愛する妻と生活を楽しむがよい。それが、生きている間に、日の下であなたがする労苦によるあなたの受ける分である。

당시 결혼을 하여 아내와 남편이 같이 산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최소한의 것이었습니다. 즉, 아무리 서민이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남녀가 결혼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나친 욕심을 부려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과욕을 부린다 하더라도 모두가 헛되다. 그러지 말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최소한의 조건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충분히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솔로몬의 말에 설득력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각해보세요. 평생 동안 가난했던 사람이 “무슨 돈 같은 것 필요 없어”라고 해봐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하이고, 지가 돈을 벌어보기나 했어?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아무도 귀담아 들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그의 인생에서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려보았습니다. 그런 결과 솔로몬이 하는 말이, 뭐였습니까. 다 헛되다는 것이에요.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말씀과 이어집니다.

누가복음 12장 29절~30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何を食べたらよいか、何を飲んだらよいか、と捜し求めることをやめ、気をもむことをやめなさい。これらはみな、この世の異邦人たちが切に求めているものです。しかし、あなたがたの父は、それがあなたがたにも必要であることを知っておられます。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께서 스스로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서 주실 정도로, 우리 자신을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냥 굶어 죽으라고, 추위에 떨고 더위에 지치라고 내버려두겠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옛날에는 재산을 어느 정도 모으면 모아둘 곳이 없었습니다. 곡식이 넘치고 돈이 넘치면 땅을 사서 창고를 짓고 거기에 보관하고 그랬습니다만, 그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지요. 그러면 어떻게 했어요?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아무리 수확이 많다 하더라도 보관할 곳이 없다면, 썩도록 내버려둘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자신의 분수를 알았습니다. 이 정도 벌었으면 됐구나 하는 생각을 어렵지 않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돈을 벌면 은행으로 입금이 됩니다. 그럼 어느 날 은행에서 전화가 걸려 옵니다. 죄송합니다만, 당신 돈을 더 이상 쌓아둘 곳이 없습니다. 그런 전화 받아보신 적 있으세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들도 죽는 그 순간까지 그 돈을 계속해서 벌여드리려고 합니다.


그와 같은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너무나도 안타까워 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너한테 준 세월을 살아가면서, 걱정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채워줄 텐데, 좀 나를 믿고 기뻐하면서 살아갔으면 좋을 텐데, 나를 못 믿고 그저 맨날 부족하다고 하니 얼마나 주님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힘으로 아둥바둥거리며 살아보려고 했더니 결국 모든 것이 헛되더라는 것이 누구의 고백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솔로몬 왕의 고백입니다. 이처럼 모든 부와 명예를 누려본 솔로몬이 하는 말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고백은 어떨까요. 예를 들어서 21세기 현대에 있어서 가장 우주에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물리학자라고 하면 스티븐 호킹 교수를 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교수가 만약에 “지금까지의 물리학은 모두 다 틀렸다.” 이런 말을 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전세계 언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적인 석학의 말로서 연일 보도를 하고 난리가 나겠지요.

하지만 만약에 제가 “아~ 지금 물리학은 모두 다 틀려먹었어요! 휴지조각이에요!”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흥, 지가 뭘 안다고” 다들 그럴 것 아니겠어요?

오늘 바울은 말합니다. 이 세상의 학문은 모두 초등학문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당시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뭐? 이 세상 학문들이 다 초등학문이라고? 지가 뭘 안다고……”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니요.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 학문들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버렸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아버린 것이었습니다. 이 십자가를 알고 나니, 그 동안 자신이 최고로 알았던, 이 세상의 부와 지식과 권력과 명예가 모두 다 어린애 속임수 같이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만큼 돈을 벌어야 해. 나는 이만큼 배워야 해. 나는 이만한 지위에 올라 가야만 해. 이렇게 자기 자신을 얽매었던 그 동안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이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이 값어치가 없고 모두 다 신학만을 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에서 일을 하고 세상에서 공부하는 것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어떤 공부를 하든, 어디서 살아가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품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품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내주신 그 사랑을 믿고, 포기하지 말고, 단념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인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결국에는 잘 된다는 믿음, 끝내는 잘 된다는 믿음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을 품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품는 삶,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올 한 해도 오늘로 마지막입니다. 올 한 해를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올 한 해 동안 내가 내 마음 안에 가장 중요한 것,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품고 살아 왔는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 아니, 우리가 살아가는 날 동안에 가장 중요한 것,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품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11회 우리가 받아야 할 축복 →

← 제109회 예수님의 증명

 

이카호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