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회 설레는 믿음
2018년 2월 18일 설교

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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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 장 51절~52절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설레는 믿음”胸躍る信仰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 같은 곳에서 그런 장면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에서 누가 아파요. 아니면 갑자기 아이가 태어나려고 해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여기 승객분들 중에 의사 선생님 안 계십니까!” “여기 탑승하고 계신 분들 중에 의사 선생님 안 계십니까!” 하고 승무원들이 애타게 찾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요? 예, 거기 승객 중 한 사람이 서둘러 손을 듭니다. 제가 의사입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그러면 이제 급한 환자에 대한 진찰을 하거나, 임산부 같은 경우에는 아이를 출산하기도 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긴급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꼭 비행기 안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불이 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요즘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겨울철이라서 화제에 대한 뉴스도 많이 볼 수 있고, 그 중에는 정말 안타까운 소식도 있어서 가슴이 아픕니다만, 자, 불이 났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예, 물론 작은 불이라면 어떻게든 끄려고 해보아야겠지요. 하지만 도저히 안 되면 그 때는 어떻게 합니까. 예, 재빨리 신고를 해야지요. 119를 겁니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했어요. 그러면 경찰에 신고를 합니다. 한국은 112, 일본은 110번에 서둘러 전화를 겁니다.

자, 이와 같이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애타게 승객들 중에서 의사를 찾거나, 불이 났을 때 소방소에 신고를 하거나 사건 또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 경찰에 신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니까요? ㅎㅎ 물론 그렇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렇게 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환자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사 선생님을 찾으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불이 났습니다. 소방소에 신고를 하면 사이렌을 울리면서 달려와서는 불을 꺼줍니다. 경찰도 마찬가지죠.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합니다. 그 이유 또한 경찰이 가장 신속하고도 완벽하게 문제를 처리해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편으로 우리 기독교인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승객분들 중에 기독교인은 안 계십니까!” 라고 애타게 찾는 목소리를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기 탑승하고 계신 분들 중에 크리스천은 안 계십니까! 예수 믿는 분은 안 계십니까!” 라고 간절하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찾는 목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으세요? 예, 저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앞에서 말씀 드린 경우와 비교를 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비행기에서 어떤 환자가 발생했을 때, 의사를 찾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 상황에서 의사가 있으면 지금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타게, 간절하게 의사를 찾는 것이지요. 하지만 기독교인은 어떻습니까. 어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럴 때에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찾습니까? 아, 나에게 지금 너무나도 큰 문제가 생겼어요. 예수 믿는 사람을 찾아주세요… 라고 예수님을 믿지 않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죠.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어봤자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기독교인의 존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v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け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けをつけるのでしょう。もう何の役にも立 たず、外に捨てられて、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되어라도 아니고 바로 지금 우리가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비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저 첫째로, 소금이 무엇입니까. 싱거운 음식에 소금을 넣으면 그 음식 맛이 변하는 것입니다. 싱거운 음식, 밋밋한 음식에 소금을 분명히 넣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리 많이 넣어도 맛이 변하지 않아요. 그러면, 그것은 소금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진다고 말씀하십니다만, 그 소금이 맛을 잃었는지 안 잃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소금이 들어감으로 인해서 그 음식의 맛이 변화했는지 안 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소금이 들어갔다면 그 음식 맛이 변화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거기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지나도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안 변해요. 그냥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세상적으로만 살아가고 예수님에 의해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거기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은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짜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 스스로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주변에서 분명히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진정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의 비밀은 바로 소금 자체가 주인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틀어서 대단히 훌륭한 곰탕이 있습니다. 정말 좋은 사골을 가져다가 오랜 시간 동안 푹 과서 육수가 기가 막히게 나온 곰탕입니다. 이것을 이제 먹으려고 하는데 이것만으로는 싱겁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재료로 정성 들여서 만들었다고는 해도 역시 소금을 넣어야 맛이 납니다. 그래서 여기에 또 최고급 소금을 준비했습니다.


자, 그 맛있는 곰탕에 최고급 소금을 넣고 먹었습니다. 당연히 맛이 있었겠지요. 그렇다면 그 먹은 사람이 곰탕맛과 소금맛, 어느 쪽을 칭찬하겠습니까. 야, 이 곰탕에 넣은 소금이 정말 맛있네……글쎄요. 만약에 이렇게 말을 했다면 그것은 어쩌면 소금을 칭찬했다기보다는 곰탕이 맛없다는 것을 비꼬아서 말한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음식에 소금을 넣었는데, 먹어보니까 음식 맛은 안 나고 소금 맛만 나요. 그게 과연 훌륭한 소금입니까. 그건 제대로 된 소금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소금이었다 하더라도 정말 뛰어난 소금은 스스로의 맛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 본연의 맛을 변화시켜서 기가 막힌 맛으로 만들어주는 소금, 그것이 바로 진정한 소금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분명히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소금인 우리가 다른 사람들, 우리 이웃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만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이는 마치 요리에 소금을 넣었더니 무조건 짠 맛만 나게 하는 소금과 아무런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소금이 제대로 소금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예수 믿는 사람들, 기독교인들이 제대로 기독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기독교인을 찾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있어봤자 어떠한 문제들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믿음을 스스로 돌아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어디 한 번 대단히 기본적인 질문부터 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왜 매주 주일날 할 일도 많은데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까.

누군가가 여러분께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는 여러 답변들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함께 한 번 생각해보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설렘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한 설렘, 가슴 뛰는 믿음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매주 교회에 나오는 이유, 그것이 어쩌면 습관적이기 때문은 아닙니까. 그냥 왠지 안 나가면 찝찝하니까 나가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그냥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해서,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거나 하는 식으로, 믿음이 아닌 다른 데에 이유가 있지는 않으십니까.

우리가 언제부터인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일에 대해서 감동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기적을 믿으시나요? 성경에 기록된 기적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일어날 기적을 믿으시나요?

이렇게 물으면 예, 아멘도 하시겠지요. 하지만 정말로 우리 마음 안에 그 기적을 믿고 기대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는지를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에이, 뭐, 기적을 뭘 믿어요. 그냥 교회 다니는 거죠. 교회에서 목사님 말씀 듣고, 사람들 만나고 하면 위로가 되요. 기도도 가끔 하고, 성경도 뭐 성경책은 집에 몇 권 있어요. 찬양요? 그건 교회에서 하잖아요.

혹시 마음 한 구석에 이런 생각이 있으시다면 우리 오늘 본문을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리고(エリコ)를 지나고 계셨습니다. 그 여리고에는 바디메오(バルテマイ)라고 하는 맹인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지나간다고 하니까, 예수님께 소리를 칩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웅성웅성 거리는 무리 쪽을 보고 무작정 큰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v“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ダビデの子のイエスさま。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
주변에서 조용히 좀 하라고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ダビデの子のイエスさま。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

누구는 주님께 기도를 드리는 데에는 순서가 있다고도 합니다. 처음에는 무엇부터 기도를 하고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고……그런 순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예배를 드릴 때에 대표기도를 드리거나 한다면, 말 그대로 많은 사람들을 대표해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니만큼 그 내용도 한 가지가 아니겠지요. 거기에 담아내야 하는 내용도 많을 것이고 순서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어디를 지나가다가 머리를 부딪쳤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사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보면, 천장은 낮은 편은 아닌데, 방과 방 사이를 지날 때의 그 미닫이문이 있는 그 높이가 좀 낮아요. 그래서 거기를 지날 때에는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겸손한 자세로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가끔 보면 지나가면서 머리를 빡 하고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때, 무슨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고 뭐라고 뭐라고 한 다음에 나중에 가서 “아이구 아파!” 그러나요? 그럴 새가 어디 있겠어요. 아파 죽겠는데.

우리에게 무슨 다급한 기도제목이 있어요. 그러면 역시 그 때도 무슨 순서를 정해서 기도하고 마지막에 자기 기도를 합니까?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 바디메오(バルテマイ)의 기도를 보세요. 여기에 무슨 서론 본론 결론이 있습니까.

예수님! 지금 날 도와주세요!

지금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지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찾았지? 그래,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그랬더니 바디메오(バルテマイ)가 뭐라고 하던가요.

그가 원하는 소원은 명확합니다. 딱 여덟 글자(14文字)였습니다.

v“보기를 원하나이다”
目が見えるようになることです。

생각해보십시오. 이 말을 할 때 이 바디메오(バルテマ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우선 그가 애초에 예수님을 애타게 찾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비록 그는 앞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귀가 있었어요.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겠지요.

“지금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한테 부탁하면 말이야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더라……”

今イエスという人がいるんだけどさあ、目の見えない者が見、足のなえた者が歩き、病に冒された者がきよめられ、耳の聞こえない者が聞き、死人が生き返るそうだぞ

어쩌면 그는 이런 소문을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찾아갈래야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죽기 전에 그 예수인지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예수라는 사람만 만날 수 있다면 내 눈을 고쳐주실 것 같은데, 내가 앞을 보게 될 것만 같은데, 도대체 그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러 갈 방법이 없으니 어쩌면 좋을까……이렇게 애타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이제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면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찾아올 지 모릅니다. 체면이요? 창피해요? 지금 그거 가리고 있을 때입니까?

10장 46절에 보면 성경은 그 바디메오(バルテマイ)를 가리켜 맹인 거지(盲人の物ごい)라고 기록합니다. 그가 원래부터 거지인지 아니면 맹인이기 때문에 거지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는 이미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습니다. 목청이 터지라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셨을 때 그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目が見えるようになることです。」

여러분, 이 말을 할 때 그의 표정은 어땠을까요. 그냥 되면 그만이고 안 되도 그만인, 싱겁고 밋밋한 그런 표정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기쁨에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께서는 내 눈을 치료해주신다고 하는 강력한 믿음과 확신으로 충만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죠. 예수님으로부터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요. 우리는 일본 vSONY 라는 회사를 알고 있습니다. 이 소니는 이른바 일본경제를 견인해온, 일본경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회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회사의 창업정신은 무엇이었냐 하면, 당시 미국이나 유럽에서 만들어진 전자제품들은 편리하고 우수한 기능들이 많긴 했는데 너무나도 크고 투박해요. 그래서 소니에서는 이를 무조건 작게 만들자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회사 이름도 영어에서 작은 아이나, 청년, 소년을 뜻하는 <v소니>로 했는데, 본래 영서 철자는 SONNY입니다만, 이것도 너무 크다고 해서 여기서도 vN을 하나 빼 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회사가 바로 vSONY인 것입니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오디오입니다. 외국에서 만들어진 이 오디오는 너무나도 컸어요. 그래서 이것을 작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오디오에서 가장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부분이 뭐냐 하면 바로 스피커입니다. 그러면 작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요?

예, 쉽습니다. 스피커를 떼어버리면 됩니다. 스피커를 떼어내어서 귀에 꽂고 듣게 하면 된다는 거죠. 하지만 여기에는 당시 회사 내에서도 반발이 심했다고 합니다. 아니, 세상에 도대체 어느 정신 나간 인간이 걸어 다니면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냐 하는 거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품이 출시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바로 끊임없는 도전 정신, 설레는 마음, 반드시 성공한다고 하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제품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워크맨이었고, 일본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소니를 비롯한 일본 기업이 위기에 처해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어떤 전문가는 이렇게 분석합니다. 과거의 일본 기업은 도전정신이 있었다. 그래서 이게 아니면 외국 기업들에게 밀린다고 하는 위기의식이 있어서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일본 기업, 특히 대기업들은 어떤 상황이냐 하면,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이지요. 그 결과 <도전>이 아니라 <안정>을 선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우리 믿음은 어땠습니까. 한국의 50년대 60년대의 교회를 보십시오. 그야말로 먹고 살기 힘들었던 그 시대는 주님에게 매달렸습니다.

돈도 없었습니다. 밥도 없었습니다.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기도제목이요? 부자가 되고 뭐고 간에 우리 가족이 내일 굶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위생상태도 안 좋고, 좋은 약도 부족하고 하니 얼마나 병들이 많았습니까. 그러니 뭐예요? 제발 우리 가족의 병이 낫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루라도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건 무슨 상투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그야말로 절박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러한 문제들은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돈도 한 두 푼 가지고 해결이 안됩니다. 하물며 그 지독한 질병들이 어떻게 나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방법은 하나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디메오(バルテマイ)처럼 그저 주님을 향해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과거의 우리 나라가 가난하고 굶주리고 질병에 시달릴 때에 우리가 원했던 것은 바디메오(バルテマイ)가 그랬던 것처럼 오직 기적만을 간구했습니다. 기적만이 우리가 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사람을 의지하겠지만, 기적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의지한 것입니다.

그냥 기도해도 안 되니까 금식하고 철야하고 새벽기도도 하고 그렇게 주님만을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953년 6.25가 끝나고 잿더미가 된지 100년도 지나지 않아서 이제는 세계 선진국 대열에까지 오르는 성장을 보였습니다. 전세계에 파송하는 선교사가 2위에 오르는 믿음의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한국의 성장을 두고 사람들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합니다만, 아닙니다. 이는 믿음의 기적, 주님의 기적이라고 믿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왜 교회에 다니냐고, 왜 예수님을 믿느냐고 하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냥 뭐 믿는 거죠. 종교는 정신 건강에 좋아요. 부활이요? 구원이요? 십자가요? 기적이요? ㅎㅎ 뭐 그렇다기 보다는, 교회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러면 즐겁잖아요.”


그러시겠습니까. 왜요. 이제 좀 먹고 살만 하니까 체면 차리느라고 그러십니까.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지식이나 교양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주말에 심심해서 할 일 없으니까 교회에 나와서 사람들이나 만나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그것은 바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절박한 문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설레는 믿음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레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 기적을 바라는 믿음,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우리가 설레는 믿음을 회복할 때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세상은 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기적은 일어납니다.
우리 한 번 같이 해보시기 바랍니다.

v우리에게 기적은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기적은 일어납니다.
아멘!

설레는 믿음,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을 회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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