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회 부활은 사랑입니다
2018년 4월 1일 설교

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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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부활은 사랑입니다”復活は愛です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믿으시나요? 아멘, 예, 이 부활을 믿으신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신 것입니다. 왜 믿으시는 거죠?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성경에 써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이 천지를 말씀으로 만드셨습니다. 어떻게 믿느냐 하면 이도 역시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경입니다. 성경에서 벗어난 믿음은 이는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 생각이요, 성경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이는 사람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철저하게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철저하게 죄인으로서 모든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매장되었습니다. 이는 모두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철저하고 완벽하게 살아나셨습니다.

이는 육체가 썩어지고 무슨 귀신처럼 희미하게 살아나신 것이 아닙니다. 완벽하게 육신을 가지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렇게 살아나야 하셨을까요. 어차피 살아나실 것, 안 죽으시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죄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는 어떤 죄입니까. 교도소에서 몇 년 복역하면 해결되는 죄인가요? 아니면 채찍으로 몇 대 맞거나, 벌금을 얼마 내면 되는 죄인가요?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우리의 죄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입니다. 율법에 있어서 가장 엄한 벌이 죽음인데, 그 600가지가 넘은 율법 중에서 하나라도 어기면 모든 율법을 다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로 하니, 여기서 자유로울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아무리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제사를 드려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양이나 염소 몇 마리를 바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생각해보십시오. 죄인한테 무슨 선택의 여지입니까. 오직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다가 가는 죽음? 아닙니다. 이는 그렇게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재판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잘못을 저지르면 이 땅에 살아가고 있을 때에 받게 되지만, 영적인 재판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한 후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사형은 아무리 어린 나이에 확정되어봤자 결국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만 유효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형 판결은 100년이나 200년이 아닙니다. 영원한 사형 판결, 영원한 어둠으로 떨어지는 판결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와 주셨습니다. 영원한 사망으로 가는 우리들을 위로해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철저하게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죄의 짐을 모두 덜어주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누가 부탁했나요? 과거 구약에서 누군가가 하나님을 보고, 아~ 우리 죄가 너무나도 무거우니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게 해주세요. 라고 말하던가요? 아니요. 아무도 안 그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냥 양이나 염소 몇 마리 바치면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던 것이죠.

그러나 우리의 죄는 그런 호락호락한 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아야지만,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아야지만, 우리가 받을 대신 죽음을 대신 받아야지만 해결되는 죄,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죄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셔야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철저하게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사형수가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사형이 집행되어야 합니다. 죽어야 해요. 그래야 해결이 됩니다. 하지만 이미 죽은 상태인데 자신의 죄값은 치렀을지 모르지만, 그 죽은 사람한테 희망이 있습니까? 자, 이제 당신의 죄는 모두 해결되었으니까 어서 가서 자유롭게 사세요! 라고 하면 죽은 사람이 벌떡 일어납니까. 아니에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 바로 부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값을 모두 치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인 것입니다. 부활이야말로 용서의 증거입니다. 죄가 모두 해결되었는데 부활이 없다거나, 아니면 죄가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부활이 된다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죄의 용서로 말미암아 얻어진 것이 부활입니다. 이를 누가 얻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얻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값을 치르신 것처럼,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또한 사하심을 받았다는 증거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지만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활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죄의 해결과 부활. 하나님께서 가장 원했던 것은 어느 쪽일까요. 이렇게 질문을 하면 더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간단하게 두 가지 선택을 드리겠습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1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이 결과 우리가 부활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2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활을 원하셨고, 이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죄가 해결되도록 해주셨다.

1번은 죄 사함이 더 중요하다. 2번은 부활이 더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그거나그거나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아닙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부활을 간절하게 원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게 하시셨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다 보니 어쩌다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부활이라고 하는 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생명을, 예수님의 보혈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조금 화제를 바꿔볼까요? 여러분, 남녀가 만납니다. 그리고 사랑을 합니다. 그러면 결혼을 하고 싶어지죠. 같이 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결혼을 이미 하고 계신 여러분께서는,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배우자와 다시 결혼하시겠습니까? 사실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서 다른 생을 보낸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비유로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떠십니까. 다시 태어나도 지금 배우자와 함께 살겠다, 또는 아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배우자가 아닌 다른 배우자와 살겠다……. 여러분께서는 어느 쪽이신가요? 아, 물론 손을 드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를 비교한 데이터가 있는데 한국에서 작년에 인구보건복지협회가 남녀 95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하는데 남성 응답자는 45%가 다시 태어나도 현재의 부인을 선택하겠다고 했다는데, 반면에 여성 응답자 중에서 다시 태어나도 현재 남편을 선택하겠다고 응답한 사람은 불과 19.4%였다는 것입니다.

이거 좀 너무하지 않으십니까? 이를 두고 하물며 이를 보도하는 남성 앵커도 <우리나라 남성이 좀 더 분발해야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이 모든 책임이 마치 남성에게 있다는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뭐, 그게 사실일 수도 있겠지요. 아내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무심하다던가 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굳이 좀 남성들을 위해 변명을 좀 해볼까 하는데, 아무래도 이는 여성보다 남성이 좀 더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예측을 할 수 있는 것인 아닐까 합니다.

남자는 결혼을 하게 되면, 물론 이런저런 좋은 점도 많겠지만, 이런저런 점이 안 좋을 수 있겠다, 또는 불편할 수 있겠다는, 결혼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측을 이미 하고 난 다음에 결혼을 하기 때문에, 결혼 후에 부인에 대한 불만이 좀 적은 게 아닐까.

반면에 여성은 결혼이나 배우자에 대해서 너무 좀 좋은 부분만 생각하기 때문에 결혼을 한 다음에는 이것도 실망 저것도 실망……이렇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요즘 특히 한국에 보면 몇몇 나쁜 남자들 때문에, 죄 없는 대다수의 남성분들까지 좀 기운이 빠져있지는 않을까 해서 제가 애써 남성분들의 변호를 해보았습니다만,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ㅎㅎ

참고로 일본의 경우는, 여기도 남자보다 여자가 더 배우자에 대한 불만이 많다는 점은 비슷했습니다만, 남성은 40%가 다시 태어나도 지금 부인과 결혼하겠다고 대답한 반면에 여성은 33%였다고 해요. 그래도 한국보다는 좀 높죠? ㅎㅎ

이 숫자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무슨 절대적인 숫자가 아니라 그냥 재미 반으로 여러분께 말씀 드린 것입니다만, 어찌 되었든 다시 태어나도 지금 아내와, 또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 남편과 같이 살고 싶다고 한다면, 그만큼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고자 하셨던 것일까요. 여러분,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도,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날을 어린양의 혼인잔치라고 합니다. 신랑이 예수님이고 신부가 우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서로가 부부처럼 가까운 경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서로 다투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헤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 세상에서의 일입니다. 영적으로 예수님과 부활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私はこう確信しています。死も、いのちも、御使いも、権威ある者も、今あるものも、後(のち)に来るものも、力 ある者も、高さも、深さも、そのほかのどんな被造物も、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神の愛から、私たちを引き離すことはできません。

라고 사도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을 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가 신랑과 신부였다면 그렇다면 혼인서약은 어떤 것일까요.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전과가 있었지요.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ヨハネの子シモン。あなたは、この人たち以上に、わたしを愛しますか。
ヨハネの子シモン。あなたはわたしを愛しますか。
ヨハネの子シモン。あなたはわたしを愛しますか。

이 질문에 대해 면목 없다는 듯이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마지막에는,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はい。主よ。私があなたを愛することは、あなたがご存じです。」
「はい。主よ。私があなたを愛することは、あなたがご存じです。」
ペテロは、イエスが三度「あなたはわたしを愛しますか」と言われたので、心を痛めてイエスに言った。「主よ。あなたはいっさいのことをご存じです。あなたは、私があなたを愛することを知っておいでになります。」

평소에는 사도들 중에서도 언제나 나서기 좋아했던 베드로, 언제나 남들보다도 자신을 내세우려던 베드로, 그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당당했었습니다만,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구차한 자기 한 목숨 구해보자고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그런 기운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계속 물으시니까, 정말 마지막에는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휴, 예수님, 자꾸 물으면 물으실수록 제가 죄송해지잖아요. 아~정말 미치겠네……라는 생각까지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는 제 상상입니다만, 베드로가 예수님께 했던 말들 중에서 이 세 마디가 가장 작은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합니다.ㅎㅎ

하지만 아무리 작은 목소리였다 하더라도 이는 훌륭한 사랑 고백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혼인서약이었던 것이지요.

이 대답을 듣고 예수님은 그럼 어떻게 말쓸하셨어야 할까요.

“네가 나를 그렇게 사랑해? 그래. 나도 너를 사랑한다, 베드로야”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わたしの小羊を飼いなさい。」
「わたしの羊を牧しなさい。」
「わたしの羊を飼いなさい。

모두 예수님의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양을 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나를 사랑한다면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보이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왜요? 쫀쫀해요? 그냥 말로 하면 그런 줄 아시지, 꼭 보여드려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 말로 해서 안 들어서 직접 보여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셨습니다. 아무리 말로 해도 안 들어요, 선지자들을 보내서 해도 안 들어요,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다 동원해도 안 되니까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남녀가 마주보고 앉아 있습니다. 남자가, 또는 여자가……이러면 좀 불공평해질 것 같으니까 그냥 한쪽이……라고 합시다. 한쪽이, 사랑해……라고 말하니까, 다른 한쪽은 얼굴도 안 봅니다. 계속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어요.

보다 못해 또 말합니다. “사랑해.” 그러니까 상대방도 “나도 사랑해” 그러면서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스마트폰만 바라봅니다. 그래도 또 말해봅니다. “자기야, 사랑해.” 그러니까 상대방이 비로소 고개를 들고 말합니다. “나도 사랑한다니까, 왜 자꾸 귀찮게 굴어.”

이게 사랑인가요? 아니요,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무엇입니까. 행동이 있는 사랑입니다. 희생이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자신의 배우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상대방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행동하십시오. 먼저 희생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멋있는 말 같으세요? 사실은 제가 만들어낸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습이 바로 이것이었던 것입니다.

가짜 사랑과 진짜 사랑을 구분하는 방법은 쉽습니다. 가짜 사랑은 말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은 어떻습니까. 진짜 사랑은 반드시 희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떠셨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희생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를 위해 가장 힘든 일, 우리가 도저히 흉내 낼 수도 없는 십자가의 희생을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똑같이 십자가를 짊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천분의 일, 만분의 일만이라도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감당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며, 나아가 부활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믿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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