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회 믿음의 현역선수
2018년 9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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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9절~10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현역선수” 信仰の現役選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특히 신약 중에서 바울 서신을 보면 마지막 부분에 안부인사가 적혀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중요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 안부인사 속에도 얼마나 많은 은혜가 숨겨져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바울은 젊은 동역자 디모데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제국의 폭군 네로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는데, 그 시기를 대략 서기 67년~68년 정도로 추정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8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第二テモテへの手紙 1章 8節
「ですからあなたは、私たちの主を証しすることや、私が主の囚人であることを恥じ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神の力によって、福音のために私と苦しみをともにしてください。」

이 구절에 의하면 바울은 현재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디모데후서는 바울서신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기록되었다고 하여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성격을 띤다고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8절을 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第二テモテへの手紙 4章 6節~8節
「私はすでに注ぎのささげ物となっています。私が世を去る時が来ました。
私は勇敢に戦い抜き、走るべき道のりを走り終え、信仰を守り通しました。
あとは、義の栄冠が私のために用意されているだけです。その日には、正しいさばき主である主が、それを私に授けてくださいます。私だけでなく、主の現れを慕い求めている人には、だれにでも授けてくださるのです。」

6절에 보면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내가 이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질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 디모데후서는 나이 들어 몸이 쇠약해진 바울이 어두운 감옥에 갇혀서 사형에 처해질 날을 기다리며 쓴 서한이라고 할 것입니다.

먼저 오늘 말씀 중 4장 10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デマスは今の世を愛し、私を見捨ててテサロニケに行ってしまいました。また、クレスケンスはガラテヤに、テトスはダルマティアに行きました。

이 짧은 구절에는 무려 3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디도(テトス)는 바울과 함께 한 동역자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를 대단히 사랑하여 바울서신 중에는 디도에게 보내는 디도서(テトスへの手紙)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는 달마디아(ダルマティア)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레스게(クレスケンス)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그는 신약성경 중에서 단 한 곳, 이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만 등장합니다. 따라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왜 갈라디아(ガラテヤ)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서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레스게(クレスケンス)가 갈라디아(ガラテヤ)로 가고 디도(テトス)가 달마디아(ダルマティア)로 갔다는 점에 대해서 바울은 질책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레스게(クレスケンス)라는 인물과 디도(テトス)는 각각 바울의 뜻에 따라 갔을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 점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는 부분이 바로 제일 앞에 나오는 데마(デマス)입니다. 오늘은 이 데마에 대해서 주목해보려고 합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데마는 데살로니가로 갔는데, 그냥 간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고, 나이 들어 쇠약해지고 감옥에 갇힌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다는 심하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된 점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데마가 늙어서 감옥에 갇힌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간 이유는 바로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데마에 대해서는 성경에 여기 말고 다른 곳에 두 번 등장하는데, 하나는 골로새서와 또 하나는 빌레몬서입니다.

먼저 골로새서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4장 14절입니다.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コロサイ人への手紙
「愛する医者のルカ、それにデマスが、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그리고 빌레몬서 1장 24절을 봅니다.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ピレモンへの手紙
「私の同労者たち、マルコ、アリスタルコ、デマス、ルカが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이처럼 데마는 그냥 일반 성도가 아니라 그도 역시 바울을 도와 함께 주님의 일을 감당했었으며, 바울이 쓴 편지 마지막 문안인사에 데마도 함께 문안한다고 적었던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바울이 그를 인정해서 적었을 정도가 아닙니다. 아무리 바울이 데마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편지를 받는 사람이 데마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아마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즉, 이 데마라고 하는 사람은 바울이 아끼는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도, <데마>라는 이름을 들으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총애를 받으면서 함께 주님의 일을 감당했던 데마가 왜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을까요. 어떤 일이 그에게 있었기에 바울은 그가 세상을 사랑했다고 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데마는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도 버리고 떠났다고 분명히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 먼저 세상을 사랑한다(今の世を愛し)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에 대한 오해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세상을 사랑한다> 말씀을 들으면 어떤 구절이 떠오르십니까.. 예,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モーセが荒野で蛇を上げたように、人の子も上げ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れは、信じる者がみな、人の子にあって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す。」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하나님께서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게 함으로 인해서 우리 인간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도록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세상을 사랑하셨다는데,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럼 좋은 것이잖아요. 그런데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버리고 떠났다? 이게 무슨 차이냐 하는 것이죠.

먼저 앞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이 세상을 피조물,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까지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적인 쾌락, 세상적인 편법, 세상적인 구습에 젖은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을 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ヤコブの手紙 4章4節
節操のない者たち。世を愛することは神に敵対することだと分からないのですか。世の友となりたいと思う者はだれでも、自分を神の敵としているのです。

여기서 <간음한 여인들>이라고 나오는데, 이 말씀은 단순히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간음>이라고 함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상숭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적인 구습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돈이지요. 돈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유함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잠언 10장 2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

人を富ませるのは主の祝福。人の苦労は何も増し加えない。

모든 재물이 축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귀 사탄도 때로는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귀 사탄이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가 잘 되기를 바래서 그러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마귀들이 주는 재물은 사람을 타락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괴롭게 만듭니다.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듭니다. 마귀 사탄은 천만분의 일이라도 우리의 기쁨이나 행복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우리의 타락만을 원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속아 넘어가서 마귀 사탄이 주는 재물을 덥석 쥐게 되면, 이제 평온이 사라집니다. 인간관계가 틀어집니다. 다툼이 생겨납니다. 자나 깨나 불안합니다. 인생이 꼬입니다. 근심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부유함은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다도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한 푼이라도 돈을 모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이 없더라도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세상을 사랑하는 우상숭배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재물을 숭배하는 자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だれも二人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一方を憎んで他方を愛することになるか、一方を重んじて他方を軽んじることになります。あなたがたは神と富と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

여러분, 하나님과 재물이 동등합니까? 아니, 비교할 걸 비교해야죠. 어떻게 하나님과 재물이 동등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굳이 하나님과 재물을 비교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과 재물을 동등하게 생각하는 착각을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던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평소에는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 거룩한 척 좀 했다가, 이 돈 문제만 엮이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눈에 불을 켜고 열을 냅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 전세계를 돌아 보면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21세기가 된 지금도 식량문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천지가 창조된 이래 이 세상에는 식량이 부족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예, 전체적으로 보면 이 세상에는 식량이 충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뭐가 문제였냐 하면 분배를 하지 않아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지 않아서 이러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미국에서 하루에 버려지는 음식만으로 아프리카에서는 1년을 먹을 수 있는 식량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식량문제로 어려움을 곀고 있는 사람들은 굳이 아프리카나 개발도상국까지 안 가더라도, 한국이나 일본에도 대단히 많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자기가 게을러서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고 하겠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부유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잠시 인터넷을 찾아보았더니 부자들이 가진 재산들을 보니까 무슨 1조원 2조원이 아니더라구요. 글쎄요. 참 진부한 생각이긴 합니다만, 그분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좀 지갑을 열어서 도움을 줄 수만 있다면 상당히 많은 빈곤문제가 해결될 텐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세상에는 돈이 없는 것이 아니에요. 분배가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정치를 보더라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대통령이라고 하면, 한구이 비록 작은 나라이긴 합니다만,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는 제왕적 대통령이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임기가 끝나고 나면 대부분의 경우 본인이나 가족들이 불행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재임 중에 그 큰 권력을 잘못 사용했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한국의 대통령은 그렇게 큰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임기가 끝나면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인가요? 아니요. 자신이 가진 힘을 잘못 썼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그렇게 큰 힘이 있다면, 얼마나 많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하지 않고 그 몇 년 안 되는 임기 동안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이웃이나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임기가 끝나고 난 다음에 그와 같은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만이 아니라 반드시 이웃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마음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방법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야기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경우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제가 말씀 드리면 어떤 분은 또 이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면, 그럼 아플 때 병원에도 가지 말고 기도만 하라는 거야? 혹시 그런 생각 안 해보셨나요?

이건 그냥 농담이 아니라 가끔 정말 진지하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 믿는 사람은 의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약사나 간호사도 마찬가지죠.

어디 그 뿐인가요? 기술자들이 집을 왜 져요? 집이 세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밥을 왜 먹어요?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그렇게 따지면 배부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밥을 먹는 사람들은 믿음이 적은 사람들이에요?

또한 그렇게 본다면 바울은 참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복음이 전파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되지 왜 그렇게 고생을 해가면서 전도를 다녔어요. 안 그래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더러 그냥 산에 올라가서 기도만 하고 있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버리는 일이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 일을 위해서 바울은 오늘 말씀 디모데후서 4장 9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あなたは、何とかして早く私のところに来てください。

라고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 후사를 디모데에게 부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한국에서 교회에 있을 때 보니까 어떤 분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 믿기 참 힘들대요. ㅎㅎ 여러분께서는 어떠세요? 예수님 믿기 쉬우세요? 아니면 힘드세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참 힘들지요. 저라고 그런 생각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얼마 전에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야구를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꼭 야구가 아니라도 좋아요. 운동 선수들이 훈련하는 곳에 가봤다고 생각해보세요. 거기 보니까 선수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공을 던지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무거운 것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고된 훈련을 해요. 지난 여름은 얼마나 더웠습니까. 그런데 그런 더위 속에서 쉬지 않고 열심히 훈련을 합니다. 그런데 저쪽에 보니까 훈련을 안 하는 선수가 있어요. 그냥 그늘에서 왔다 갔다 어슬렁거릴 뿐이에요.

여러분께서는 어느 쪽이 부러우십니까. 얼핏 보기에는 저렇게 땡볕에서 땀을 흘려가면서 몇 시간이나 훈련을 하는 선수들이 불쌍하고, 그늘에서 훈련도 안 하는 선수가 부러워 보일 수는 있습니다만, 알고 보니 그늘에서 훈련을 안 하는 선수는 이번에 전력외 통보를 받았던 것입니다. 전력외 통보가 무엇이냐 하면, 한국에서는 지명할당……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고 하는데, 쉽게 말하자면 이것입니다. 너는 이제 우리 팀의 전력, 힘이 못돼. 그러니까 뭐예요? 예, 쉽게 말하자면 모가지입니다. 너는 이제 1군에서 뛸 수 없으니까 2군으로 내려가든지 아니면 나가든지 알아서 해……이것이죠. 야구 같은 데에 보면 한국이나 일본은 1군과 2군, 미국은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가 있는데, 텔레비전에서 중계도 하고 그러는 것은 모두 1군입니다. 그러니까 잘하는 사람들이죠. 똑 같은 팀이라 하더라도 1군과 2군 대우를 보면 그야말로 천지차이라고 합니다. 1군은 자기 유니폼, 헬멧 이런 것들이 잘 갖춰져 있지만 2군은 대부분 그런 것도 없대요. 당연히 받는 보수도 큰 차이가 납니다.

야구선수들, 특히 프로야구 선수들을 보면 어떤 인생을 살아왔겠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평생동안 야구를 해보면서, 몇 십 년 동안 수 백 번, 수 천 번 되는 시합도 해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말 그 나라에서 제일 야구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프로야구입니다. 그렇잖아요?

사실 그 정도 되면, 이제 훈련 안 해도 되는 것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수라 하더라도 훈련을 게을리하면 금새 뒤쳐집니다.

현역으로 활약을 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노련한 선수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프로의 세계인 것이지요. 감독도 마찬가지입니다. 가혹한 훈련을 시키는 것은 그만큼 그 선수한테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에, 다음 시합에서 활약 하기를 바라기 때문인 것이지요. 기대를 하지도 않은 선수한테는 훈련도 안 시킵니다. 그냥 전력외 통보. 너는 우리 팀에 전혀 도움이 안 되니까 나가……라고 은퇴시켜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예수 믿은 게 몇 년인데, 이 정도 믿었으면 이제 시련 좀 그만 겪어도 되는 것 아니야? 그런데 이렇게 문제가 끊이질 않아……이렇게 생각되신다면 우리 한 번 마음을 바꾸어보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나를 은퇴시키지 않으시려고, 다음 시합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고 현역으로 뛰게 하시려고, 내 활약을 기대하시기 때문에 지금 나를 이렇게 훈련시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말장난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주님의 진심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난 데마는 믿음 안에서 은퇴를 하고 말았습니다. 운동선수들에게 있어서는 뛰어난 성적을 내고 은퇴를 하는 것이 명예로울 수 있겠으나, 믿음 안에서의 은퇴는 영적인 죽음을 뜻합니다. 믿음 안에서 명예로운 것은 오직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현역의 믿음을 가지고 달려가는 삶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은퇴선수의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현역선수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녹슬지 않는 현역선수의 믿음을 갖고,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과 함께 달려가서, 마침내 바울처럼 의의 면류관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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