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회 소금을 두라
2018년 10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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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50절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소금을 두라” 塩気を保て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에 소금이 필요하다고 하면 슈퍼에 가서 언제든지 저렴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옛날에 소금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치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고대 로마 군인들은 봉급을 소금으로 받았을 만큼 그 값어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온 말이 요즘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회사원들을 다른 말로 샐러리맨이라고 하는데, 이 샐러리라는 말은 월급, 봉급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이 샐러리라는 말이 소금을 뜻하는 영어 솔트……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즘 회사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받는 월급이 바로 과거에는 소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에는 이 소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겠습니까.

복음서에 보면 소금에 대한 흥미로운 비유가 나옵니다.

먼저 마태복음을 봅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気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もう何の役にも立 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다음은 누가복음 14장 34절~35절 말씀입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塩は良いものです。しかし、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それに味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
土地にも肥やしにも役立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ます。聞く耳のある者は聞きなさい。」

이 두 말씀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금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소금이 음식에 들어가면 맛이 변합니다. 그 이유는 소금에 짠 맛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소금에 짠 맛이 없다면 아무리 소금을 넣더라도 음식 맛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맛이 싱거워요. 그렇다면 뭣 하러 소금을 넣겠습니까. 그런 소금은 필요가 없지요 그저 버림을 받아서 사람들한테 밟힐 뿐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인 마가복음을 보면 조금 다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9장 50절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塩は良いものです。しかし、塩に塩気がなくなったら、あなたがたは何によってそれに味をつけるでしょうか。あなたがたは自分自身 のうちに塩気を保ち、互いに平和に過ごしなさい。」

오늘 말씀에는 다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없는 부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속에 소금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이 소금을 우리 안에 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충만하게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서 살펴본 마태복음 5장 13절과 누가복음 14장 34절, 그리고 오늘 말씀, 마가복음 9장 50절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말씀은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味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의 말씀에 보면 짠 맛을 잃은 소금은 버림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시는데, 오늘 말씀 마가복음에 보면 버림을 받게 된다는 말씀 대신 우리 안에 소금을 두라고 하십니다.

즉, 이렇게 본다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소금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음식에 소금을 넣었을 때 소금으로 말미암아 음식 맛이 좋게 변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인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짠 맛을 잃어버리면 버림을 당한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속에 소금을 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앞서 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말씀에서는 대외적인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고, 마가복음은 우리 안의 모습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소금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습니까. 예, 대부분의 소금은 바다에서 얻습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군마현은,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바다가 없다는 것이 좀 아쉽습니다. 일본에는 47개 지자체가 있는데 그 중에서 8개 현, 야마나시현, 나라현, 기후현, 토치기현, 시가현, 나가노현, 사이타마현, 그리고 군마현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이 여덟 개 현을 바다가 없는 현이라고 해서 이른바 우미나시현이라고 합니다만, 이건 좀 여담입니다만, 군마현은 비록 바다는 없지만 그래도 강은 참 많습니다. 물이 얼마나 깨끗한지 몰라요.

아무튼 그건 그렇다고 치고, 대부분의 소금은 바다에서 얻어집니다만, 바닷물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우선 대단히 넓죠. 지구 표면 비율로만 본다면 무려 70% 이상을 바다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못이나 저수지를 보면 이끼가 끼기도 하고 안 좋은 냄새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다는 그렇지 않지요.

연못과 바다를 비교한다면 그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연못은 왜 이끼가 끼기도 하고 악취가 나기도 하는데 바다는 그렇지 않을까요.

여기에 있어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소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연못은 민물이기 때문에 소금이 없습니다. 그런데 소금에는 부패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바닷물은 썩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닷물을 연상하면 곧바로 이 짠 맛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닷물에서 소금이 얼마나 함유되어 있을까요. 10%? 20%? 아니요. 불과 3.5% 정도라고 합니다. 다른 물들과 바닷물의 차이가 고작 3.5%의 차이 밖에 없는데, 이 작은 차이로 인해서 민물은 썩어가지만 바닷물은 썩는 일이 없다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지요. 바란다 하더라도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예, 작은 것, 아주 작은 것만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일주일 내내 하나님만 생각하고 살아가기를 원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출애굽기 20장 8절~10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安息日を覚えて、これを聖なるものとせよ。
六日間働いて、あなたのすべての仕事をせよ。
七日目は、あなたの神、主の安息である。あなたは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や娘も、それにあなたの男奴隷 や女奴隷、家畜、またあなたの町囲みの中にいる寄留者も。

예, 일주일, 7일 중에서 더도 말고 하루만 나를 기념하고 나를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7분의 1도 많으십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4: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あなたは毎年、種を蒔いて畑から得るすべての収穫の十分の一を、必ず献げなければならない。


말라기 3장 8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マラキ書 3章8節
人は、神のものを盗む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だが、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ものを盗んでいる。しかも、あなたがたは言う。『どのようにして、私たちはあなたのものを盗んだでしょうか』と。十分の一と 奉納物においてだ。

이 십일조가 참 야박하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네 수입 중에서 다 바치지 않고, 7분의 1도 아닌, 10분의 1만 나한테 바쳐라. 그것으로 내가 만족하겠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10분의 1 만으로 만족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10분의 1만 나한테 바치면 모든 것을 바친 것으로 쳐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여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지켜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짐승도 바쳐야 했고 속죄제(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다 속건제(代償のささげ物)다 요제다 소제다 해서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율법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 받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부족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ヘブル人への手紙 9章12節
また、雄やぎと子牛の血によってではなく、ご自分の血によって、ただ一度だけ聖所に入り、永遠の贖(あがな)いを成し遂げられました。

히브리서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ヘブル人への手紙 9章26節
もし同じだとしたら、世界の基(もとい)が据えられたときから、何度も苦難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でしょう。しかし今、キリストはただ一度だけ、世々の終わりに、ご自分をいけにえとして罪を 取り除くために現れてくださいました。

히브리서 10장 10절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ヘブル人への手紙 10章10節
このみこころにしたがって、イエス・キリストのからだが、ただ一度だけ献げられたことにより、私たちは聖なるものとされています。

과거에 양이나 소들을 제물로 드린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우리의 죄를 우리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대신해서 짐승들을 죽이고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너무나 부족해요. 완벽한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단 한 번의ただ一度 완벽한 제사를 드려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더 이상 짐승으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게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모두 완벽하게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됩니다.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しかし、この方を受け入れた人々、すなわち、その名を信じた人々には、神の子どもとなる特権をお与えになった。
この人々は、血によってではなく、肉の望むところでも人の意志によってでもなく、ただ、神によって生まれたのである。

더도 말고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믿음의 분량을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17장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すると主は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に、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れば、この桑の木に『根元から抜かれて、海の中に植われ』と言うなら、あなたがたに従います。

여러분, 겨자씨를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도 실제로는 본 적이 없어서 인터넷으로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더도 말고 딱 좁쌀이더군요. 지름이 1미리 정도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기도 했고 물위를 걷기도 하셨습니다. 병자들을 치료하기도 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 천 명을 먹이시기도 하셨지요. 하지만 그런 기적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나만이 할 수 있다……라고는 단 한 번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도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7분의 1일이요? 10분의 1이요? 아닙니다. 좁쌀만한 겨자씨만큼만 믿음만 있으면 능히 이룰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만큼만 믿으면 다 믿는 것으로 쳐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기도원이나 부흥회에 가서 은혜를 받거나, 아니면 놀라운 기도 응답을 맛보았을 때에는 할렐루야! 주여! 감사합니다! 라고 하지요. 그런데 조금 지나면 어떻습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 탓하고 세상 탓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 어디서 많이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주었던 모습입니다.

출애굽기 14장 30절~31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こうして主は、その日、イスラエルをエジプト人の手から救われた。イスラエルは、エジプト人が海辺で死んでいるのを見た。
イスラエルは、主がエジプトに行われた、この大いなる御力を見た。それで民は主を恐れ、主とそのしもべモーセを信じた。

홍해가 갈라지고 바다 한 가운데를 걸어오고, 뿐만 아니라 애굽의 정예부대가 홍해에서 모두 죽은 것을 보았을 때에는 그들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세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믿음 충만, 성령 충만이었겠지요.

다음 장 출애굽기 15장 20절~21절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そのとき、アロンの姉、女預言者ミリアムがタンバリンを手に取ると、女たちもみなタンバリンを持ち、踊りながら彼女について出て来た。
ミリアムは人々に応えて歌った。「主に向かって歌え。主はご威光を極みまで現され、馬と乗り手を海の中に投げ込まれた。」

보십시오. 완전히 축제 분위기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하지만 이게 오래 갑니까. 바로 다음 구절을 봅니다.


출애굽기 15장 22절~24절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モーセはイスラエルを葦の海から旅立たせた。彼らはシュルの荒野へ出て行き、三日間、荒野を歩いた。しかし、彼らには水が見つからなかった。
彼らはマラに来たが、マラの水は苦くて飲めなかった。それで、そこはマラという名で呼ばれた。
民はモーセに向かって「われわれは何を飲んだらよいのか」と不平を言った。

좋은 일, 놀라운 일이 있을 때 아무리 기뻐해도 무슨 소용입니까. 1장도 아니고 1절도 못 가서 조금 어려운 일이 닥치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새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모습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보잉 747 같은 여객기 조종사들을 보면 비행기가 이륙하고, 정상궤도에 들어서고 난 다음에는 별로 할 일이 없대요. 왜냐하면 컴퓨터들이 알아서 자동적으로 조종을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좀 극단적인 말로, 그 상황에서 옷만 잘 입혀놓고 자리에 앉혀놓는다면 그 사람이 진짜 조종사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데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하지만 진짜 차이가 나는 것은 돌발상황 때입니다. 갑자기 난기류가 발생했어요. 아니면 비행기의 어디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럴 때에 조종사들은 자동운전에서 수동으로 전환을 해서 대처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그 사람이 진짜 조종사와 가짜 조종사가 차이가 바로 나는 것이지요. 믿음이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3.5프로의 믿음이 있는지,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는지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러나 언제 차이가 나요?

예, 시련이 닥칠 때 차이가 압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진정한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가 곧바로 드러납니다.

믿음의 사람은 3.5프로에 불과한 작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썩어가는 물들을 물리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큰 역사를 행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과거에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수님을 원망합니다. 세상을 원망합니다. 신세를 한탄합니다. 3.5프로의 믿음을 갖기 전에, 겨자씨만한 믿음이 채워지기 전에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포기하고 맙니다. 절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 이끼가 낍니다. 냄새가 납니다. 썩어져 갑니다. 그러면서 그 때부터는 완전히 마귀들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노릇입니까.

바다와 비율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 드릴까 합니다. 흔히 우리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합니다. 빙산의 일각……즉, 이는 물위에 드러나 있어서 보이는 빙산은 전체 빙산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부분이 훨씬 더 많다는 뜻으로 쓰입니다만, 그렇다면 한 가지 문제를 내겠습니다.

실제 우리 눈으로 보이는 빙산은 전체 빙산에 비해서 몇 프로나 될까요. 빙산이라고 해서 무슨 작은 빙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남극에도 무척이나 많은 빙산들이 있고, 북극에는 이는 땅덩어리가 아닙니다. 북극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100% 모두 빙산입니다.

자,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바다 위에 드러나 있는 빙산은 전체 빙산 중에서 몇 프로나 될까요. 20%? 30%? 사실 바다 위로 보이는 빙산은 8.3%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나머지 91.7%는 모두 바다 속에 있다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실 때의 모습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 48절~50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ナタナエルはイエスに言った。「どうして私をご存じなのですか。」イエスは答えられた。「ピリポがあなたを呼ぶ前に、あなたがいちじくの木の下にいるのを見ました。」
ナタナエルは答えた。「先生、あなたは神の子です。あなたはイスラエルの王です。」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あなたがいちじくの木の下にいるのを見た、とわたしが言ったから信じるのですか。それよりも大きなことを、あなたは見ることになります。」

나다나엘은 그가 저 멀리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너를 알아보았다고 말씀하시자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보고 예수님께서는 이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계기는 각자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맛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아직 시작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전체 축복 중에서 고작 8.3%밖에 맛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받을 축복은 아직 91.7%가 남았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삶 속에서 3.5프로만 바뀐다면 우리는 썩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 속에 믿음의 소금을 두어, 썩지 않는 믿음,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갖고 주님께서 주시는 8.3프로의 축복이 아니라, 나머지 91.7프로의 축복, 크고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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