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회 우리들의 시선
2018년 10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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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14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들의 시선” 私たちの視線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하나는 세리입니다. 우리가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좀 안 좋은 이미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사실 바리새인, 바리새파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어떻게든지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을 잘 믿어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은 세금을 로마한테 갖다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로마에 바칠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로마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시켰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금을 내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방법이었습니다.

지금은 세금을 국가나 지자체에서 결정하고 그렇습니다만, 당시는 세리한테 그 권한이 있었다고 합니다. 복잡한 당시 상황을 생략하고 단순하게 본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관할 지역에서 임의로 세율을 상정하고, 그들에게는 이를 징수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징수한 세금 중에서 일부를 로마에 바치고 나면 그 나머지는 모두 자기 차지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들은 규정보다도 훨씬 많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금을 누구한테 징수한다고요? 예,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세리들은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징수하고는, 이 중 일부는 로마에 갖다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의 배를 불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같은 이스라엘 민족들의 피를 빨아서 로마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악랄한 일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당시 세리라는 말은 죄인의 대명사로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세리를 보면, 그들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이를 보더라도 그들은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바리새인은 기도합니다. 그 기도 내용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우선 좋은 점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 중에서 좋은 점을 기준으로 보면, 일단 이 바리새인은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토색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억지로 강제로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불의는 부정한 일을 하는 것, 다른 사람들을 속이거나 하는 것을 말합니다. 간음도 안 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먼저 토색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7절을 봅니다.

출애굽기 20장 17절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あなたの隣人の家を欲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隣人の妻、男奴隷、女奴隷、牛、ろば、すべてあなたの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

다음은 불의입니다. 바리새인은 불의함을 저지르지 않았다. 즉, 내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속이거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레위기 19장 36절을 보겠습니다.

레위기 19장 36절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正しい天秤、正しい重り石、正しい升、正しい容器を使わなければならない。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した、あなたがたの神、主である。

마지막으로 간음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출애굽기 20장 14절에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즉, 바리새인의 이 감사 기도는 단순한 나열이 아닙니다. 이는 바로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모두 지키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음 구절, 누가복음 18장 12절을 봅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私は週に二度断食し、自分が得ているすべてのものから、十分の一を献げております。』

나는 금식도 자주 합니다. 십일조도 드립니다……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에 대한 명령은 있었으나, 금식에 대한 명령은 없습니다. 다만 금식은 자진해서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바리새인은 “나 말이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한 모든 것을 다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것도 모두 다 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 기도에 문제가 있나요? 솔직히 지금 이 바리새인치럼 자신 있게 기도를 드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반면에 세리는 어땠습니까. 세리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어떤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누가복음 18장 13절을 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一方、取税人は遠く離れて立ち、目を天に向けようともせず、自分の胸をたたいて言った。『神様、罪人の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

그렇죠. 세리도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글쎄요. 요즘 식으로 본다면 성전 앞에 있는 십자가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저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만 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감사기도를 드렸던 바리새인보다도 이 세리가 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오늘 이 말씀에 등장하는 두 인물, 즉 바리새인과 세리 중에서 주인공은 누구일까 하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린다면 바리새인이 드린 기도가 바로 오늘의 핵심 내용이 되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自分は正しいと確信していて、ほかの人々を見下している人たちに、イエスはこのようなたとえを話された。

즉, 오늘 이 말씀의 제목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것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이 바리새인입니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참으로 독특하고 흥미롭습니다. 아마도 성경에 이처럼 독특한 기도에 대한 기록은 또 없지 않을까 할 정도로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먼저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만, 질문을 드리기 전에, 질문을 위한 질문을 잠깐 먼저 드리겠습니다.

11절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누가복음 18장 11절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조금 바꾸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게 해주시니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奪い取ったり、不正をしたり、姦淫しないようにして下さり感謝します。


이 두 기도는 어떻게 다를까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그리고 바꾼 기도는 이렇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게 해주시니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奪い取ったり、不正をしたり、姦淫しないようにして下さり感謝します。



차이가 있지요? 예, 제가 바꾼 구절에는 <나는 다른 사람들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는 부분을 뺐습니다.

이로 인해서 어떠한 차이가 일어나는가 하면, 여러분, 상상력을 한번 발휘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부터 진짜 질문에 들어갑니다.

자, 우리 한 번 눈을 한 번 감아보시기 바랍니다. 저기 앞에서 바리새인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보니까 그 바리새인이 하는 기도 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리새인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자, 상상이 되시나요? 그럼 이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바리새인, 지금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 기도를 할 때 바리새인은 과연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세리를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앞서 제가 살짝 바꾼 것처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게 해주시니 감사하나이다 『神よ。私が奪い取ったり、不正をしたり、姦淫しないようにして下さり感謝します。”라고 했더라면 이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바리새인의 시선은 하나님이 아닌 세리한테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짐작이나 추측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에 보면 분명히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리> 즉, 바리새인의 시선은 분명히 하나님이 아니라 세리를 향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한 말은, 얼핏 보기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기도처럼 보입니다만, 이는 기도가 아니라 실제로는 세리를 향한 멸시, 세상 사람들을 향한 멸시였던 것입니다. 비난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가장한 비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가장한 멸시를 하나님께서 어찌 기뻐하시겠습니까.

로마서 13장 9절을 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姦淫してはならない。殺してはならない。盗んではならない。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戒め、またほかのどんな戒めであっても、それらは、「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ことばに要約されるからです。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를 바꾸어 말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지킨다 하더라도, 거기에 이웃에 대 한 사랑이 빠진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에 우리가 이 바리새인이 드리는 잘못된 기도. 그렇죠. 이건 분명히 잘못된 기도입니다만, 이 기도를 보고, “그래, 저 바리새인은 참 잘못됐어. 나쁜 사람이야.”라고 끝나버린다면, 우리는 이 바리새인이 세리를 멸시한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이 바리새인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에 오늘 말씀 중에 등장한 바리새인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비유>로서 자기를 예로 들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이 바리새인이 반성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아니, 뭐가 문제인데? 나 하나님 말씀 잘 지켰잖아? 저 세리처럼 죄를 짓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는데 그게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나 일요일에 교회 빼 먹은 적도 없고, 십일조나 감사헌금도 꼬박꼬박 드렸어. 봉사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아? 그 정도면 된 거 아냐?”

혹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

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켰다고 생각해도 이로 인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백 년이 아니라 백 만년 동안 율법을 지키려고 해봤자 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한테 돈을 바치지 않으면 하나님이 굶으신 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가난하시답니까.

역대상 29장 11절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歴代誌第一 29章11節
主よ、偉大さ、力、輝き、栄光、威厳は、あなたのものです。天にあるものも地にあるものもすべて。主よ、王国もあなたのものです。あなたは、すべてのものの上に、かしらとしてあがめられるべき方です。

라고 다윗은 고백합니다.

온 천하 만물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헌금을 많이 냈다고 주님 앞에서, 또는 사람들 앞에서 자랑을 해요?

이사야 1장 11절~12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イザヤ書 1章11節~12節
「あなたがたの多くのいけにえは、わたしにとって何になろう。──主は言われる──わたしは、雄羊の全焼のささげ物や、肥えた家畜の脂肪に飽きた。雄牛、子羊、雄やぎの血も喜ばない。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に会いに出て来るが、だれが、わたしの庭を踏みつけよとあなたがたに求めたのか。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무리 많은 돈과 재산을 하나님께 바쳤다 하더라도, 아무리 봉사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의로운 행위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훌륭한 기도를 드렸다 하더라도, 그 시선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 안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없다면, 이는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은 그 시선과 그 마음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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