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회 주를 바라보라
2018년 10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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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절~10절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를 바라보라” 主に目を注ぎなさい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이름 없는 한 사람입니다. 편의상 이 사람을 A씨라고 하지요. 이름도 없는 이 A씨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먼저, A씨에 대해서 성경에는 어떻게 설명되어 있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2절을 한 번 볼까요? 사도행전 3장 2절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すると、生まれつき足の不自由な人が運ばれて来 た。この人は、宮に入る人たちから施しを求めるために、毎日「美しの門」と呼ばれる宮の門に置いてもらっていた。

이 A씨에 대한 설명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부실해 보입니다. 무엇보다 이름도 없습니다. 그저 나면서부터 다리에 장애가 있었다고 합니다. 상황이 그랬으니 일을 할 수도 없었겠지요. 장애가 가볍다면 지팡이라도 짚고 걸을 수도 있었겠으나, 이 A씨는 장애가 너무나도 심해서 아예 일어서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무슨 사회복지제도 같은 것도 없었을 테니, 이 사람을 불쌍하게 여겼던 주변 사람들이, 구걸이라도 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으로 데려다 주었던 것입니다.

이 A씨의 이름은 안 나오지만, 나이는 나옵니다. 사도행전 4장 22절에 보면 40세가 넘었다고 합니다. (四十歳を過ぎていた。)

그러니까 태어나서부터 마흔이 넘도록 이 A씨는 한 번도 걸어보지도 못하고, 어느 정도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저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루 이들이 아니라 무려 40년 넘도록 말입니다.


그날도 다른 날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루에 3번 예배를 드렸었는데, 그 날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성전 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항상 앉았던 곳은 미문이라고 합니다. 미문, 아름다운 문입니다. 이는 정식명칭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서울의 동대문이나 남대문이 정식명칭이 아니지요? 동대문은 흥인지문, 남대문은 숭례문이라고 합니다만, 그저 편의상 동대문이나 남대문이라고 하는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의 어떤 문, 아마도 대단히 아름다운 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아름다우면 “미문”이라고 했겠습니까.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 밑에 앉아서 성전에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구걸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비록 매일같이 그처럼 아름다운 문가에 앉았으나, 그는 꿈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남들처럼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서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꿈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저 하루하루 굶지 않고 살아갈 수만 있다 하더라도 감지덕지였을 것입니다.

그가 바랬던 것은 단 하나입니다. 아침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성전에 나갈 때, 무엇을 바랬겠습니까. 그저 오늘은 좀 돈을 넉넉하게 얻을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꿈도 없고 희망도 없고 계획도 없습니다. 그저 오늘도 한 푼 두 푼 얻는 것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는 아마도 정해져 있었겠지요. 벌써 수 십 년을 그 곳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 날도 항상 있어왔던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는 돈을 달라고 부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1절에 보면 제 구 시라고 합니다. 이는 유대식 시간인데 요즘 우리 식으로는 오후 3시입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하루도 끝나가려는 그 때, 이 A씨는 사람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한테도 구걸을 합니다. 한 푼 줍쇼……한 푼 줍쇼……라고 했을 지도 모르겠지요.

右や左の旦那様…哀れな私にお恵みを…

자, 이제 여기서부터 실제로는 대단히 짧은 시간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좀 슬로모션, 느린 그림으로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볼까 합니다.

이 A씨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한 푼 줍쇼……라고 구걸을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을 합니다. 4절을 봅니다.

사도행전 3장 4절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ペテロは、ヨハネとともにその人を見つめて、「私たちを見なさい」と言った。

이 말을 들었을 때 A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음? 아니 뭘 주는 사람들은 그냥 아무 말 없이 돈을 던져 주거나,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데, 이 사람은 자기들을 보라고 하네? 뭔가 대단할 걸 주려나? 하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A씨는 잔뜩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이는 제 상상이 아닙니다.

3장 5절을 볼까요?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彼は何かもらえると期待して、二人に目を注いだ。

여기서 <바라보았다>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만, 베드로와 요한을 본 것은 이게 처음이 아닙니다. 3절에서도 한 번 봤어요.


3절을 다시 한 번 볼까요?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彼は、ペテロとヨハネが宮に入ろうとするのを見て、施しを求めた。

이처럼 베드로와 요한을 본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원문에 의하면 3절의 <보다>라는 것과 5절의 <보다>라는 단어는 분명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냐 하면, 5절 나오는 동사 <보다>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집중해서 보았다는 뜻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3절에서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이 사람 저 사람 쳐다보는 김에 베드로와 요한도 보았습니다만,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라고 하자, 정말 무슨 큰 돈이라도 줄줄 알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집중해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 슬로모션이에요.

6절을 기, 승, 전, 결……이렇게 4개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6철 처음, <기>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すると、ペテロは言った。「金銀は私にはない。……

아니, 이게 지금 무슨 말이에요? 심각한 표정으로 자기를 보라고 하기에, 글쎄요. 요즘 식으로는 신사임당 몇 장 줄까? 하는 생각으로 잔뜩 기대하고 봤더니만, 베드로가 기껏 하는 말이 뭐예요? 이것도 요즘 식으로 한다면

“내가 가진 돈은 없지만……”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이 A씨는 어땠을까요? 온갖 폼은 다 잡았으면서 기껏 한다는 말이 돈이 없대? 이 양반아 무슨 장난 하나…… 안 그랬겠습니까.

자, 그 다음에 6절 두 번째, <승>의 부분입니다. 승……이니까, 앞부분에 이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しかし、私にあるものをあげよう。……

이건 또 무슨 말이에요? A씨는 지금 잔뜩 돈을 받을 걸 생각하고 있었는데, 앞에서는 돈이 없다고 했으면서, 이번에는 자기가 가진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제 기, 승, 전, 결 중에서 <전>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ナザレの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

베드로의 말을 듣는 A씨의 혼란은 최고조에 달합니다. 돈은 가진 게 없지만 자기가 가진 것을 준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예수님의 이름을 말합니다. 불과 얼마 전 예루살렘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십자가 사건을 A씨도 듣고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A씨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두고, 그저 하나의 사건,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인식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의 입에서 <예수>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A씨는 이 말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마지막에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일어나 걸으라”라고 합니다.

立ち上がり、歩きなさい。

그리고는 7절에 보니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고 해요. 그렇겠죠. 지금 A씨는 뭐가 뭔지도 모릅니다. “일어나 걸으라”라는 말을 들어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힘껏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彼の足とくるぶしが強くなり、躍り上がって立ち、歩き出した。

이제야 이 A씨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하루하루 구걸해서 얻을 푼돈만을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몇 푼이나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을 하면서 40년 넘게 살아왔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보라고 했을 때에도 A씨는 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닙니다. 멀쩡한 몸으로 생활하다가 다쳐서 장애를 갖게 된 것도 아닙니다. 태어나서 40년 이상 동안 걷는다는 것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몸이었습니다. 그런 자신이 불과 몇 초 뒤에 일어나서 걷게 될 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기에게 돈 대신 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이 이름을 받게 되자 그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단순히 걷지 못했다가 걷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이제 그는 꿈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고 나서 그가 처음 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8절을 봅니다.

사도행전 3장 8절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躍り上がって立ち、歩き出した。そして、歩いたり飛び跳ねたりしながら、神を賛美しつつ二人と一緒に宮に入って行った。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어쩌면 그 동안 성전 바깥 문턱에만 앉았다가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성전 안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릅니다.

성전 바깥에 앉아 있을 때에는 오직 한 푼 두 푼, 세상적인 소망에만 젖어 살았습니다. A씨도 유대인이니까 하나님은 알았겠지요. 때로는 성전 문턱에 앉아 어쩌면 한 두 번, 기도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기도제목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오늘은 좀 돈을 많이 받게 해주세요……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돈을 많이 받아봐야 얼마나 받았겠습니까. 하지만 이 사람은 그 외에 어떤 희망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걷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돈 몇 푼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두 발로 걷게 되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자신을 억누르고 모든 굴레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그가 처음 한 일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눈물이 났겠습니까. 얼마나 기쁨으로 충만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 이 A씨가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라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집중을 해서 바라보았을 뿐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

どんなしもべも二人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一方を憎んで他方を愛することになるか、一方を重んじて他方を軽んじることになります。あなたがたは、神と富と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

이는 재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재물을 바로 <세상>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도 믿으면서, 믿음과 상반되는 세상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과 상반되는 세상적인 생각을 가진 생태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A씨를 생각해볼 때, 오늘날에도 이 A씨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A씨도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습니다. 그저 교회 문턱에 앉아서 바라는 것은 이 세상 속에서 얻어지는 <한 푼, 두 푼>이었습니다. 기도를 해도 돈을 더 많이 벌게 해 주시옵소서, 새 차를 주시옵소서, 새 집을 주시옵소서……그 이상의 희망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기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기도를 안 해요? 그건 이상한 자존심이지요. 주님께 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돈이 없거나 건강이 안 좋다면 돈도 구해야 하고 건강도 구해야죠.

하지만 그것이 최종목표인가요? 그렇다면 가난할 때 기도했다가도 돈을 어느 정도 벌게 되면 이제 기도도 그만 하고, 예수님도 그만 믿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건강? 몸이 아플 때에는 열심히 믿다가, 건강이 회복되면 이제 안 믿어도 되는 건가요?

이와 같은 믿음은 성전 안에 들어가지 않고 그 문턱에 앉아 한 푼 두 푼 달라고만 하고 있는 믿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겠습니까. 1~2년이 아니라 40년 넘게 교회를 다녔으면 뭘 합니까. 하나님께서 주실 크나큰 축복을 꿈꾸지도 않고, 그저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하는, 그와 같은 믿음은 성전에도 들어가지 않고, 여전히 성전 문턱에 앉아서, 한 푼 두 푼 달라고 하는 믿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믿음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믿음의 성전 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놀라운 축복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적인 생각을 끝까지 버리지 못하고, 성전 문턱에 앉아 한 푼 두 푼 구걸하면서 인생을 마치시겠습니까.

예레미야 33장 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エレミヤ書 33章3節
『わたしを呼べ。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に答え、あなたが知らない理解を超えた大いなることを、あなたに告げよう。』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 모두 살아있는 믿음을 갖고, 흔들림 없이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놀라운 축복,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크고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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