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회 부족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2019년 1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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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1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부족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劣る私を愛してくださ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베드로와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베드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도 그럴 만 하지요. 인간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영웅이나 혁명가처럼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과거 구약에 보면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민족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합니다. 그렇게 되자 이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일들을 사람들은 기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2천년 전 이 땅에 오셨을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라고 하는 강대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조국을 잃은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새로운 사사, 이 시대의 리더, 억압받는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구원해주실 통치자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열광했습니다. 지금으로 본다면 차기 대통령 최유력후보 정도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면 줄을 잘 서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19장 27절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そのとき、ペテロはイエスに言った。「ご覧ください。私たちはすべてを捨てて、あなたに従って来ました。それで、私たちは何をいただけるでしょうか。」

뿐만 아니지요. 제자들만이 아니라 이른바 치맛바람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일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0절~21절
“20.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そのとき、ゼベダイの息子たちの母が、息子たちと一緒にイエスのところに来てひれ伏し、何かを願おうとした。
イエスが彼女に「何を願うのですか」と言われると、彼女は言った。「私のこの二人の息子があなたの御国 で、一人はあなたの右に、一人は左に座れるように、おことばを下さい。」

세베대의 아들이란 사도 요한과 야고보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어머니까지 나서서 예수님께 와서는 자신의 두 아들에 대해서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어떤 부탁입니까. 예수님 당신이 왕이 되면, 요즘 식으로 본다면 대통령이나 총리가 된다면 우리 두 아들들한테 비서실장 자리나 장관 자리 같은 높은 자리 하나 마련해주세요……라는 뜻 아니겠어요?


이런 제의를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로 다음 구절인 마태복음 20장 22절 중반부에 보면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あなたがたは自分が何を求めているのか分かっていません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보면 참 딱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들을 너무 나무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당시는 아직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사람의 생각, 육의 생각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따라 나섰던 이유는, 물론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겠으나, 어쩌면 그 중에는 이 사람을 따라다니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닌 육적으로,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세상이 바뀌고 난 다음에는 벼슬 자리 하나 정도는 주어질 것이라는 점을 기대했을 법도 하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도 있고, 그리 비난 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어떻게 되었어요. 3년 정도는 지방을 순회하면서 예수님의 지지자들을 결집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진격해서 민중들을 결집시키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하자……뭐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 예루살렘에 도착하시고 얼마 있었더니, 맥없이 체포되고 맙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2장 5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22장 54절
“54.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彼らはイエスを捕らえ、引いて行き、大祭司の家に連れて入った。ペテロは遠く離れてついて行った。

예수님께서 체포된 후에도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멀찌감치에서나마 따라가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는 예수님이 걱정되었기 때문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탈출하시는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워낙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였으니 예수님께서 묶인 쇠사슬을 풀고 놀라운 기적으로 탈출하셨을 때 자기가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예수님께 보여드리면 얼마나 칭찬을 듣겠습니까.

어쩌면 베드로는 그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했던 말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35절을 봅니다.
“33.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すると、ペテロがイエスに答えた。「たとえ皆があなたにつまずいても、私は決してつまずきません。」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あなたは今夜、鶏が鳴く前に三度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
ペテロは言った。「たとえ、あなたと一緒に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としても、あなたを知らないなどとは決して申しません。」弟子たちはみな同じように言った。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던 베드로, 예수님을 끝까지 버리지 않겠다고 했던 베드로, 예수님께서 탈출하셨을 때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모습을 보여드리면서 칭찬을 받으려고 했을지도 모르는 베드로, 하지만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굳건한 고백과는 달리,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예수님도 눈치 챘다는 것을 베드로 자신도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 22장 55절~60절에 보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상황이 너무나도 자세히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55.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人々が中庭の真ん中に火をたいて、座り込んでいたので、ペテロも中に交じって腰を下ろした。
すると、ある召使いの女が、明かりの近くに座っているペテロを目にし、じっと見つめて言った。「この人も、イエスと一緒にいました。」
しかし、ペテロはそれを否定して、「いや、私はその人を知らない」と言った。
しばらくして、ほかの男が彼を見て言った。「あなたも彼らの仲間だ。」しかし、ペテロは「いや、違う」と言った。
それから一時間ほどたつと、また別の男が強く主張した。「確かにこの人も彼と一緒だった。ガリラヤ人だから。」
しかしペテロは、「あなたの言っていることは分からない」と言った。するとすぐ、彼がまだ話しているうちに、鶏が鳴いた。

이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부인할 때를 마가복음 14장 71절에서는 더욱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71절
“71.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するとペテロは、噓ならのろわれてもよいと誓い始め、「私は、あなたがたが話しているその人を知らない」と言った。

너도 저 예수라는 사람을 알지? 라고 물었던 그 상대방을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모른다고 했다는 말은, 이걸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그 말을 했던 사람한테 심한 욕설이라도 한 마디 하면서 모른다고 딱 잡아 떼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누가복음 22장 61절~62절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主は振り向いてペテロを見つめられた。ペテロは、「今日、鶏が鳴く前に、あなたは三度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と言われた主のことばを思い出した。
そして、外に出て行って、激しく泣いた。

아이고, 이렇게 민망할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何とばつの悪いことでしょうか). 이 때에 예수님과 눈이 맞은 베드로의 심정은 어땠겠습니까. 자신은 예수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지키겠다고 했는데, 그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예수님을 아느냐고 했던 사람을 저주하고 맹세까지 해가면서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噓ならのろわれてもよいと誓い始め

그런 베드로는 통곡을 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일말의 기대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제자들의 바램도 무색하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소망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지난 3년은 그저 한날의 추억으로 끝나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26장 32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しかしわたしは、よみがえった後、あなたがたより先にガリラヤへ行きます。」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던 것을 기억해서인지, 아니면 그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가는 자신들의 신변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해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이제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더니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 21장 3절~6절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シモン・ペテロが彼らに「私は漁に行く」と言った。すると、彼らは「私たちも一緒 に行く」と言った。彼らは出て行って、小舟に乗り込んだが、その夜は何も捕れなかった。
夜が明け始めていたころ、イエスは岸辺に立たれた。けれども弟子たちには、イエスであることが分からなかった。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子どもたちよ、食べる魚がありませんね。」彼らは答えた。「ありません。」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舟の右側に網を打ちなさい。そうすれば捕れます。」そこで、彼らは網を打った。すると、おびただしい数の魚のために、もはや彼らには網を引き上げ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어쩌면 베드로는 이 순간 몇 년 전의 일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누가복음 5장 3절~7절을 봅니다.


누가복음 5장 3절~7절
“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イエスはそのうちの一つ、シモンの舟に乗り、陸から少し漕ぎ出すようにお頼みになった。そして腰を下ろし、舟から群衆を教え始められた。
話が終わるとシモンに言われた。「深みに漕ぎ出し、網を下ろして魚を捕りなさい。」
すると、シモンが答えた。「先生。私たちは夜通し働きましたが、何一つ捕れませんでした。でも、おことばですので、網を下ろしてみましょう。」
そして、そのとおりにすると、おびただしい数の魚が入り、網が破れそうになった。
そこで別の舟にいた仲間の者たちに、助けに来てくれるよう合図した。彼らがやって来て、魚を二艘の舟いっぱいに引き上げたところ、両方とも沈みそうになった。

이것이 언제인가 하면 바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어? 나 이거 알아. 몇 년 전에 똑 같은 일이 있어. 그럼 저기 서 있는 사람이 혹시?


마침 그 때에 누가 말합니다.

요한복음 21장 7절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それで、イエスが愛されたあの弟子が、ペテロに「主だ」と言った。シモン・ペテロは「主だ」と聞くと、裸に近かったので上着をまとい、湖に飛び込んだ。

이 구절을 보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보통 바다로 뛰어 내릴 때에는 입고 있던 옷을 벗는 것이 자연스럽지요. 하지만 이 구절을 보면 베드로는 벗고 있던 곳을 입은 다음에 바다로 뛰어 내렸다고 합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를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데 아무리 남자라고는 하나 어찌 벗은 상태에서 뵐 수 있겠어요. 그래서 베드로는 겉옷을 입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예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흥미로운 점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1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シモン・ペテロは舟に乗って、網を陸地に引き上げた。網は百五十三匹の大きな魚でいっぱいであった。それほど多かったのに、網は破れていなかった。

이 구절을 우선 앞서 살펴보았던 구절,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록인 누가복음 5장 6절~7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6절~7절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そして、そのとおりにすると、おびただしい数の魚が入り、網が破れそうになった。
そこで別の舟にいた仲間の者たちに、助けに来てくれるよう合図した。彼らがやって来て、魚を二艘の舟いっぱいに引き上げたところ、両方とも沈みそうになった。

이 두 구절의 차이, 두 경우 똑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고기를 잡았는데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베드로, 예수님을 아직 잘 알지 못했던 시기의 베드로가 고기를 잡았을 때에는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잠기게 되었다고 합니다만, 나중 경우에는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물고기를 적게 잡아서인가요? 성경에는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それほど多かったのに、網は破れていなかった)>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많이 잡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찢어지지 않았다고 봐야겠습니다.

과연 이 두 구절의 차이, 이 두 구절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을 때, 나중에 물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에는 물고기 수가 백쉰세 마리, 그러니까 153마리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숫자를 가지고 사람들은 다양하게 해석합니다. 누구는 구약에서 율법을 가리키는 숫자인 10, 신약에서는 성령을 상징하는 숫자인 7, 이를 더하면 17이 되는데, 1+2+3……해서 17까지 더하면 153이 된다고 하는 설, 100을 이방인의 수, 50을 유대인의 수, 3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보는 설, 고대 동물학자들은 생선을 153종으로 분류를 했는데, 이는 인류 전체의 인종을 상징한다고 하는 설, 나아가서 어떤 분은 153은 한 교회에 가장 적당한 성도 수이기 때문에 153명이 넘어가면 교회를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성경을 바탕으로 해서 묵상을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양한 상상이나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을 모두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겠지요. 이런 해석을 들으면 어~그렇구나. 어~신기하네. 어~그런가보다 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의 주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성경구절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서 우리가 얻을 의미는 없는 것일까요? 굳이 153마리라고 기록하신 성경은 무의미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 기록으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베드로가 자신이 잡은 물고기 마리 수를 정확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어촌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팔 때에는 큰 고기 같은 경우에는 마리 수로 계산하지만 일반 물고기는 무게로 계산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더구나 당시 배들의 크기를 보아 무게가 아니라 마리 수로 셀만한 물고기를 150마리 이상이나 싣는다는 것은 어려웠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리고 설령 그 정도 물고기였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대략 100이나 200도 아닌 153마리라는 사실을 그렇게 빠르고도 정확하게 인식했다는 사실은 놀랍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예수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렸을 때 물고기를 많이 잡았는데 두 경우를 자세히 비교해보면, 앞에서는 첫째 그물이 찢어졌고, 둘째, 배가 가라앉을 것만 같았고, 셋째, 몇 마리를 잡았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잡았을 때에는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고, 배가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는 기록이 없는 반면, 잡은 물고기 수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축복을 담을 준비가 되어 있었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주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그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다면 이는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 내가 기도를 해서 너무 많이 주시면 재앙이 될 수도 있으니까 조금만 달라고 기도해야겠구나……이러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많은 축복을 바라는데 왜 안 주실까 하면 그 이유는 지금 내 상태에서 너무나도 많은 축복을 주시면 이를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마음껏 부어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크나큰 축복을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물이 찢어집니다. 배가 가라앉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많은 축복을 주고 싶으셔도 주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훌륭하고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하나요? 앞서 베드로의 삶을 잠시 돌아보았습니다만, 그가 우직하고 나서기 좋아하기는 했으나, 베드로한테는 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렇다고 칭찬 받을 만한 대단한 일을 한 기록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큰 축복을 받더라도 그의 그물은 더 이상 찢어지지 않았으며 그의 배도 가라앉지 않았고, 그는 자신이 받은 축복을 정확히 인식할 정도로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의 마음 안에는 언제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걷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에 풍덩 하고 빠져버렸지요.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고 하자,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심하게 꾸중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막판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고백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지요. 이것만 보면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나 베드로나 별반 차이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나중에는 유다도 베드로도 후회했지요. 적지 않은 수치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면서 후회하고 목숨을 끊은 유다는 버리셨으나, 부끄러워하면서도 수치스러워하면서도 후회하면서도 예수님께로 돌아온 베드로는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루하루가 예수님 앞에서 떳떳하십니까. 자랑스러우십니까. 아니요. 그렇지가 않으실 겁니다.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면서 때로는 화도 내고, 그리고 남들한테 민폐도 끼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가끔 저 자신이 제 모습을 생각하면 얼마나 부족한 점이 많은지, 그래서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로 가면 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품으면 됩니다. 우리 스스로는 많이 부족해도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품읍시다.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께 감사합시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우리의 그물은 찢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탄 배는 가라앉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을 모두 받아 안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새해 첫 주입니다. 주님을 사랑합시다. 주님께 감사합시다.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고,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을 받아주시는 주님, 부족함을 받아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모두 받아 안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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