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회 용서와 사랑과 소망
2019년 1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욥기 1장 8절~12절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용서와 사랑과 소망” 許しと愛と希望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이 포함된 욥기는 신구약 총 66권 성경 중에서도 대단히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 욥기를 몇 번이나 읽어보신 적이 있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직 한 번도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렇다면 몇 번이나 이 욥기를 읽어보신 적이 있으신 분들께 여쭙겠습니다. 이 욥기, 어떠십니까. 성경 전체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고 하는, 내가 다시 읽고 싶은 책이라고 하는 순서를 메긴다고 한다면 이 욥기, 총 66권 중에서 몇 번째 정도에 두시겠습니까.

저도 몇 번 읽어보았습니다만, 어쩌면 참 답답하고 암울하고 그런 내용일 수가 있습니다. 욥기 내용 중 대부분이, 글쎄요. 색깔로 표현하면 회색? 그것도 아주 짙은 회색빛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마저 받습니다. 참 암울한 내용이에요. 물론 사람들에 따라서 다르겠습니다만, 일반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본다면, 성경 66권 중에서 다시 읽고 싶은 순위가 10위 권에는 들기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가이고 작가일 뿐만 아니라 종교혁명가였던 마틴 루터는 이 욥기를 두고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탁월한 책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욥기에 대해서 오늘은 잠시 알아보려고 합니다.

에스더서와 시편 사이에 있는 이 욥기는 총 42장으로 구성된 꽤 긴 책입니다. 이 욥기의 주인공은 <욥>이라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욥기에 대해서는 다른 책에서 찾아보기 힘든 부분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이 욥기의 특징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욥기는 배경이 되는 시대가 언제인지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다른 성경들은 물론 지금처럼 서기 몇 년이다 하는 기록은 없을지라도, 당시 어느 나라가 있었다거나 아니면 어느 왕이 있었던 시대라거나 하는 식의 기록이 있어서, 대략 언제쯤의 이야기인지 가늠할 수가 있습니다만, 욥기는 그런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단서는 있지요. 예를 들어서 욥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만, 반면에 구약이라면 당연히 등장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 또는 <율법>이라는 단어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유대인> 또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말은 적어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후에 나온 말이기 때문에, 욥기가 적힌 시대는 아브라함 이전 시대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은 모세 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욥기가 아브라함 이전에 적힌 글이라면 당연히 모세가 태어나기 적어도 몇 백 년 전에 적혔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 점도 수긍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이 욥기에 적힌 시대배경을 대략적으로 창세기 11장 후반 정도로 보는 경향이 많다고 합니다.

둘째로 욥이 실존 인물이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처럼 시대 배경이 모호하기 때문에 어쩌면 욥은 실존인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픽션으로 만들어낸 가상 인물이고, 이 내용도 사람들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다 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에스겔 서를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겔 14장 12절~14절을 봅니다.

에스겔 14장 12절~14절
“12.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3.인자야 가령 어떤 나라가 불법을 행하여 내게 범죄하므로 내가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 기근을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
14.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次のような主のことばが私にあった。
「人の子よ。国が、わたしに対して罪あるものとなって信頼を裏切 り、そのためわたしがその国に手を伸ばし、そこのパンの蓄えをなくし、その国に飢饉を送り、人や家畜をそこから絶ち滅ぼすとき、
たとえ、そこにノアとダニエルとヨブの、これら三人の者がいても、彼らは自分たちの義によって自分たちのいのちを救い出すだけだ──神である主のことば──。

이 말씀은 어떤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노아와 다니엘은 성경의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근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다니엘과 함께 욥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실존했던 노아와 다니엘과 함께 실존인물이 아닌 욥을 말씀하셨다? 이는 대단히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이 세 사람, 즉 노아와 다니엘과 욥에 대한 말씀이 이 14절 만이 아니라 16절, 18절, 20절에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 사람을 대단히 비중 있는 인물로 보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욥은 노아와 다니엘처럼 실제로 존재했다고 성경은 인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 욥기에서는 대단히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세상에, 하나님께서 계신 자리에 사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탄이 대화까지 합니다. 이는 정말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의 논란이 아직 있습니다. 물론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과 사탄이 대화하는 장면은 나옵니다만, 이처럼 하나님과 사탄이 직접 대화하는 장면은 이 욥기 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특징, 이는 욥기의 가장 큰 특징이자 어쩌면 우리가 가장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특징일지도 모릅니다. 이는 욥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대단히 큰 불행을 겪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욥기 1장 1절 후반부에 보면 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この人は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た。

이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한테 욥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자랑까지 하십니다.

욥기 1장 8절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主はサタンに言われた。「おまえは、わたしのしもべヨブに心を留めたか。彼のように、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る者は、地上には一人もいない。」

그런데 나중에 보면 어떻게 되었냐 하면 욥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대단히 심각한 질병을 앓게 되고 맙니다. 이는 그야말로 큰 불행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오늘은 특별히 이 욥기의 네 번째 특징, 욥은 대단히 훌륭한 인물이었고 믿음도 큰 사람이었지만, 도대체 왜 이렇게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성경은 이와 같은 기록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욥기 1장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에 대한 자랑을 하십니다. 그러자 사탄은 하나님께 반박을 하지요.

욥기 1장 10절~11절
“9.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1.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サタンは主に答えた。「ヨブは理由もなく神を恐れているのでしょうか。
あなたが、彼の周り、彼の家の周り、そしてすべての財産の周りに、垣を巡らさ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か。あなたが彼の手のわざを祝福されたので、彼の家畜は地に増え広がっているのです。
しかし、手を伸ばして、彼のすべての財産を打ってみてください。彼はきっと、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違いありません。」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12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主はサタンに言われた。「では、彼の財産をすべておまえの手に任せる。ただし、彼自身には手を伸ばしてはならない。」そこで、サタンは主の前から出て行った。

하지만 사탄이 욥의 모든 소유물을 모두 빼앗았는데도 욥이 믿음을 버리지 않자 사탄은 하나님께 다른 제안을 합니다.

욥기 2장 5절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しかし、手を伸ばして、彼の骨と肉を打ってみてください。彼はきっと、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違いありません。」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제안도 받아들이십니다.

욥기 2장 6절~7절
“6.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7.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主はサタンに言われた。「では、彼をおまえの手に任せる。ただ、彼のいのちには触れるな。」
サタンは主の前から出て行き、ヨブを足の裏から頭の頂まで、悪性の腫物(しゅもつ)で打った。

지금까지 믿음이 좋은 분들 중에서 이 욥기를 처음 읽는 분들이 계시면, 이 시점이 되면 아마도 당황하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까지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탄한테 괜히 욥에 대한 자랑을 하셨다가, 사탄이 말하는 잔꾀에 흥분한 하나님이 넘어가서 멀쩡한 욥이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사탄이 한 이 말 한 마디에 흥분하셔서, 아무런 죄가 없는 욥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버리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마귀 사탄의 말에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분이실까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쉽게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신 것처럼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마귀 사탄의 두 번의 말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욥기 1장 11절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しかし、手を伸ばして、彼のすべての財産を打ってみてください。彼はきっと、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違いありません。」

욥기 2장 5절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しかし、手を伸ばして、彼の骨と肉を打ってみてください。彼はきっと、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違いありません。」


이 두 구절에서 사탄은 똑같이 한 가지 목적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에 토시 하나 차이 없이 등장한 문구가 있는데 이는 바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彼はきっと、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違いありません。)라고 하는 사탄의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사탄의 본심이 드러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는 사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こうして、その大きな竜、すなわち、古い蛇、悪魔とかサタンとか呼ばれる者、全世界を惑わす者が地に投げ落とされた。また、彼の使いたちも彼とともに投げ落 とされた。

사탄은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합니다. 사탄은 어떻게 꾑니까. 우리는 창세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善悪の知識の木)의 열매를 하와가 먹게 하기 위해서 사탄은 교묘한 말로 속입니다.

창세기 3장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이 사탄의 말은 완전한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로 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지,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꾀는 영, 속이는 영 全世界を惑わす者 인 사탄은 하와를 간교한 말로 속였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탄의 속임에 넘어간 하와와 아담은 결국 타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처럼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은 절대로 자신의 의도를 노출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목적을 숨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욥기 1장과 2장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마지막 목적을 실토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욕하게 만드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마귀 사탄의 충동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철저한 비밀을 자기 입으로 실토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귀의 꾀임에 넘어간 사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꾀임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 앞에 놓인 것은 철저한 징계였습니다. 그 때까지 머물렀던 에덴, 아무런 걱정 없이 영원히 지낼 수 있었던 하나님의 품인 에덴에서 추방 당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는 용서도 없었습니다. 사랑도 없었습니다. 소망도 없었습니다. 오직 징계와 절망 뿐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 입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을까요? 그와 같은 기록은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아들인 가인은 결국 자신의 동생을 죽이는 살인까지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그 가정에 사랑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가정이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탄의 계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만든 이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증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죄성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마귀 사탄의 마지막 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간의 거리가 멀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죄가 존재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가 용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이에 죄가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 죄가 있다면 결국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지옥행입니다. 우리는 지옥 외에 다른 곳으로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마귀 사탄이 바라는 것은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로 인해서 멀어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 하늘에서 땅끝까지 멀어진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깝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흘려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재물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마귀 사탄의 계획,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영원히 벌려놓으려고 했던 마귀 사탄의 계획은 철저하게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우리에게 알리려고 하셨습니다. 마귀 사탄의 계획을 다른 사람이 말해도 안 믿을 수 있으니까, 가장 정확하게 마귀 사탄 스스로 그 입으로 말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거리가 멀어졌던 것은 하나님과의 거리 뿐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도 너무나도 멀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 대해서도 욥기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욥기 2장 11절~13절을 봅니다.

“11.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12.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13.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さて、ヨブの三人の友が、ヨブに降りかかったこれらすべてのわざわいのことを聞き、それぞれ自分のところから訪ねて来 た。すなわち、テマン人エリファズ、シュアハ人ビルダデ、ナアマ人ツォファルである。彼らはヨブに同情し、慰めようと、互いに打ち合わせて来た。
彼らは遠くから目を上げて彼を見たが、それがヨブであることが見分けられなかった。彼らは声をあげて泣き、それぞれ自分の上着 を引き裂き、ちりを天に向かって投げ、自分の頭の上にまき散らした。
彼らは彼とともに七日七夜(なぬかななや)、地に座っていたが、だれも一言も彼に話しかけなかった。彼の痛みが非常に大きいのを見たからである。


욥이 질병 가운데에 있을 때 이 슬픈 소식을 듣고 위문하고 위로하려고 세 친구가 왔습니다만, 욥의 모습을 보고 그 상태가 얼마나 처참하고 가여웠던지 소리 질러 울고는 그와 함께 7일 동안 땅에 앉아 있었지만 너무나도 딱해서 아무도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세 친구들, 데만 사람 엘리바스(テマン人エリファズ), 수아 사람 빌닷(シュアハ人ビルダデ), 그리고 나아마 사람 소발(ナアマ人ツォファル)이라고 하는 친구들은 어떤 친구 같겠습니까. 사람이 좋을 때, 잘 나갈 때에는 모여들지만 조금 안 좋아지면 하나 둘 그 사람의 곁을 떠나가는 것이 세상 인정이겠지요. 하지만 이 세 친구들은 그래도 의리가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히 좋은 사람들이었지요.

7일 동안 잠잠히 있었더니 그 다음에 욥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는 말이었습니다. 참으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말을 들은 친구들은 일제히 욥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그냥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론하면서 욥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욥기 4장 7절~9절
“7.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8.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9.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さあ、思い出せ。だれか、潔白なのに滅びた者があるか。どこに、真っ直ぐなのに絶たれた者があるか。
私の見てきたところでは、不法を耕して害悪を蒔く者が、自らそれらを刈り取るのだ。
彼らは神の息吹(いぶき)によって滅び、御怒りの息によって消え失せる。

이러면서 마치 너한테 죄가 있으니 이런 일을 당한다, 분명 너한테 죄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징벌을 내리신다……이렇게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여기 한 부분만이 아니라 이 세 친구의 말 중에서 반복적으로 이와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자신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들 멋대로 하나님을 들먹거리면서, 마치 자신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욥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왔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위문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먼 길을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근거 없는 비판과 비난을 늘어놓았을 뿐이었고, 결국 그들의 입에서 위문과 위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사람 간의 거리를 멀어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마저도 멀어지게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은 남에게 충고하는 일입니다. 이는 쉬울 뿐만 아니라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충고가 어떻습니까. 알고 보면 대부분 어설픈 근거를 대면서 주장합니다.

세상에도 어설픈 근거를 대는 일들은 꽤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디서 대지진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일어나기 전에는 그런 예측은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어나고 난 다음에는 어떻습니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원인을 설명하는 주장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또 2016년에 있었던 미국 대통령 선거는 어떻습니까. 선거 전에는 대부분의 언론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우세하다고 보도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됐지요. 그랬더니 어떻게 됐어요? 여기저기 언론에서 트럼프가 당선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넘쳐납니다. 누구누구가 트럼프 후보 당선을 예측했었다 뭐 이런 일들을 대서특필합니다.

세상에서는 또 어떻습니까. 그 때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고 있었다가, 특히 어떤 사람한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이럽니다. “그래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 언젠가 그렇게 될 줄 알았어” 이런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 밖에서만 그런 가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 벌 받아서 저런다, 하나님이 징계를 해서 저런다 하고 함부로 말씀하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때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할 때도 있습니다. 뻑하면 하나님을 들먹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아~ 이런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아”, “아~ 이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야”

교회 좀 다녀보신 분들은 이런 말을 한 두 번 정도는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말들이 모두 근거 없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문제는 이런 지적이 성경에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100프로 성경에 바탕을 둔 근거가 있거나 하지 않으면 차라리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시는 편이 좋습니다. 만약에 이게 누구한테 하는 충고라고 한다면 차라리 그런 충고는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아무리 신학박사나 상담학 박사라 하더라도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욥기를 보면 이처럼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비판했던 욥의 친구들에게 하나님께서 꾸짖으십니다.

욥기 42장 7절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主がこれらのことばをヨブに語った後、主はテマン人エリファズに言われた。「わたしの怒りはあなたとあなたの二人の友に向かって燃える。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しもべヨブのように、わたしについて確かなことを語らなかったからだ。

라고 하나님께서는 함부로 말한 욥의 친구들 세 명에 대하여 엄한 말로 혼을 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충고나 비판으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충고나 비판으로 거리를 좁힐 수가 있었다면,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오셔서 충고나 비판과 비난만 하시고 가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순종이자 희생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내놓으셨던 것입니다.

이 희생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희생으로 말미암아 용서, 죄사함이 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대로 있을 때에는 소망이 없었으나, 죄사함이 임하면서 우리는 이제 천국을 꿈꿀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9절을 봅니다.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모든 이가 죄인이 되었으나, 예수님께서 순종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는 그의 이름을 믿고 구주로 영접함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충고와 비판은 단 한 사람도 위문과 위로를 줄 수가 없습니다. 충고와 비판, 비난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다 합니다.

하지만 충고와 비판보다도 순종과 희생을 먼저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순종과 희생이라고 해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리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죽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자존심을 죽여야 합니다. 자기 고집을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과 희생을 위한 출발점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兄弟たち。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私が抱いている、あなたがたについての誇りにかけて言いますが、私は日々死んでいるのです。


바울이 우리보다 못난 사람입니까. 우리보다 자존심이 없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매일 죽는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귀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희생과 순종은 다른 게 아닙니다. 상대방의 마음,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이 되는 것이 순종이고 희생인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사랑인 것입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마귀가 아닙니다. 단지 마귀에 속아 넘어간 사람일 뿐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게 될 때 진정한 순종과 희생이 싹트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와 사랑과 소망이 나오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す。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욥기, 특히 욥의 친구들 말이 답답하고 우울하고 회색빛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그들의 말 속에 희생도 순종도 용서도 사랑도, 그리고 소망도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욥기는 이처럼 희생과 순종뿐만 아니라 용서와 사랑 그리고 소망까지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너무나도 소중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줄여주신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줄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희생과 순종으로, 십자가의 용서와 십자가의 사랑, 그리고 천국을 꿈꿀 수 있는 소망을 널리 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65회 꾸짖으신 예수님 →

← 제163회 흔들리지 않는 믿음

 

이카호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