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회 창대한 축복의 시작
2019년 2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욥기 8장 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창대한 축복의 시작” 大いなる祝福の始ま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욥기 8장 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あなたの始まりは小さくても、あなたの終わりは、きわめて大きなものとなる。

참 좋은 말씀이죠? 이 말씀은 욥기에 적혀 있는 말씀입니다만, 욥기를 모두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도, 아니, 성경을 잘 모르시는 분들,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는 분들도 들어본 적이 있을 수 있을 만큼 상당히 익숙한 구절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용품점 곳에 가보면 이 구절을 크게 써서 걸어놓는 것이나 액자 같이 해서 팔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살입니다.

욥기는 그 내용 중 대부분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어려움을 겪는 욥에 대해, 그의 어려운 상황을 듣고 위로해준답시고 온 세 명의 친구들이 결국은 위로는커녕 그를 맹비난 하는 말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욥기 8장에 있는 내용인데 한 번 볼까요?


우선 욥기 8장 1절~6절까지를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1.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次に、シュアハ人ビルダデが答えた。
いつまで、あなたはこのようなことを語るのか。あなたが口にすることばは激しい風だ。
神がさばきを曲げられるだろうか。全能者が義を曲げられるだろうか。
もし、あなたの子らが神の前に罪ある者となり、神が彼らをその背きの手に渡されても、
もし、あなたが熱心に神に求め、全能者にあわれみを乞うなら、
もし、あなたが純粋で真っ直ぐなら、今すぐ神はあなたのために奮い立ち、あなたの義の住まいを回復されるだろう。


그리고 이 다음에 오늘 말씀인

7.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あなたの始まりは小さくても、あなたの終わりは、きわめて大きなものとなる。

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선 6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보도록 하면 이런 것이지요.

조금 길지만 일단 욥기 1장 13절~19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13.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6.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7.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8.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19.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


ある日、彼の息子、娘たちが、一番上の兄の家で食べたりぶどう酒を飲んだりしていたとき、
一人の使者がヨブのところにやって来て言った。「牛が耕し、そのそばでろばが草を食べていると、
シェバ人が襲いかかってこれを奪い取り、若い者たちを剣(つるぎ)の刃で打ち殺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神の火が天から下って、羊と若い者たちを焼き滅ぼ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カルデア人が三組になって、らくだを襲い、これを奪い取り、若い者たちを剣の刃で打ち殺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あなたのご子息やお嬢さんたちは、一番上のお兄さんの家で食べたりぶどう酒を飲んだりしておられました。
そこへ荒野の方から大風が吹いて来て、家の四隅を打ち、それがお若い方々の上に倒れたので、皆様亡くなられ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이 말씀을 보면 내용은 길지만 사실 정신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나누어 네 가지 재앙들이 있는데, 이를 보면 우리의 인생 중에서 하나만 일어나도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엄청난 재앙들이 네 개나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재앙에서는 큰 바람이 와서 건물을 쳤는데 그게 무너지는 바람에 자녀들이 몰사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하지만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서 이 수아 사람 빌닷이 말하기를, 당신의 자녀들이 죽은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다. 하나님은 언제나 공의롭지 않으시냐. 네 자녀들이 괜히 죽은 것이겠는가. 분명히 지은 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네가 회개하고 그러면 지금은 이렇게 모든 것을 잃어서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크게 축복해주실 것이다……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맞는 지적인가요?

욥기 1장 1절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ウツの地に、その名をヨブという人がいた。この人は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た。

욥기 1장 5절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宴会の日が一巡すると、ヨブは彼らを呼び寄せて聖別した。朝早く起きて、彼ら一人ひとりのために、それぞれの全焼のささげ物を献げたのである。ヨブは、「もしかすると、息子たちが罪に陥って、心の中で神を呪ったかもしれない」と思ったからである。ヨブはいつもこのようにしていた。

이와 같은 욥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욥기 1장 8절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主はサタンに言われた。「おまえは、わたしのしもべヨブに心を留めたか。彼のように、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る者は、地上には一人もいない。」

보십시오. 그리고 그의 아들이 하나님 앞에서 죽을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를 데려가신 것이라고 욥의 친구 비닷은 말하지만, 그의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말입니다. 완전히 잘못된 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이런 욥기 8장 7절 같은 구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걸어놓는 것은 너무나도 무지한 일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욥을 비난한 말이 아니냐.

이렇게 말을 했다는 글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성경 말씀을 인용할 때에는 조심해야지요. 무작정 성경에 적힌 말이라고 해서 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면서 믿으라고 한다면 이는 안 됩니다. 최소한 전후맥락은 이해하고 인용을 해야겠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이 말씀을 걸어놓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잘 아는 요한 3서 2절 말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이 문구는 요한이 편지를 쓸 때 맨 처음에 안부인사를 쓴 것일 뿐이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글쎄요. 요즘 잘 지내십니까. 안녕하십니까……회사 공문으로 본다면,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라는, 그저 형식적인 문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구절의 전후맥락을 살펴본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안부인사”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냐 하면, 아, 그렇구나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아서 우리의 영혼은 잘 되지만,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잘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도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주님께서 원하시고 계시구나……하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이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님이셨던 것이지요. 그 결과 그 분은 현재 70만이 넘는 세계 최대의 교회를 세우게 되셨습니다.

만약에 이 말씀을 그저 안부인사 만으로만 받아들이셨다면 그와 같은 어마어마한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즉, 비록 오늘 말씀은 아무런 잘못 없는 욥한테, 그의 친구가 아무런 근거 없이 비난하는 말이긴 합니다만, 그 내용에 숨겨진 뜻, 지금 우리는 미약한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심히 창대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이는 우리 안에서 엄청난 큰 축복으로 다가오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俵万智 1987년 サラダ記念日 3000부, 280만부


1992년 4월 11일, 한국 텔레비전의 어떤 음악 방송에 한 가수 그룹이 등장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때는 그들이 처음으로 방송에 등장한 날이었습니다.

이 곡을 들은 네 명의 심사위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분, “리듬은 좋은데 멜로디 라인이 약하다. 다른 곳에 비해 멜로디 라인 쪽은 신경을 좀 안 쓴 것 같다.”

두 번째 심사위원, “자신은 노래를 들을 때 습관적으로 노랫말부터 듣게 되는데, 이 때 생각하는 것이, 첫째로, 올바른 문장으로 되어 있는가, 둘째로 새로운 이야기인가 하는 점인데, 이 노래는 새로운 형식이긴 한데, 내용까지 새로움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새로운 형식의 노래이긴 한데 내용은 좀 새로움이 없다는 평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심사위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욕적인데, 동작 속에 노래가 좀 묻힌 것 같은 아쉬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심사위원은 그래도 그나마 좀 나았습니다. “새로운 형식인데, 평가는 우리가 아니라 시청자들이 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하면서 점수를 주는데, 네 명의 심사위원들이 준 점수가 8점이 3명, 7점이 1명, 평균점수 7.8점이었다고 하는데, 이게 역대 가장 낮은 점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혹평, 정말 낮은 평가를 받은 그룹이 누구였냐 하면,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불렀던 곡이 “난 알아요”였죠.

워낙 유명한 동영상이니 어쩌면 이미 보신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가요계는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적어도 80년대 생 이전의 세대라고 한다면 이 서태지와 아이들이 한국 가요계 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받은 상이나 음반 판매수 같은 숫자를 논한다는 거의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역대 신기록을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1994년 대한민국 학계와 언론계가 뽑은 〈광복 50년 한국을 바꾼 100인〉에 가수로서는 최초로 선정되기도 했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떻게 됐냐 하면 서태지는 역사적인 스타가 된 반면, 그 네 명의 심사위원 중 특별히 혹평을 했던 심사위원들은 온데 간데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있어서 가장 상처를 받을 때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라고 합니다. 나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나도 노력하고 있는데,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아요. 다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요. 이럴 때 사람들은 참 힘들어하고 외롭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그렇게 가치가 없는 존재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여기고 계실까요.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을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た。「あなたは、巻物を受け取り、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屠られて、すべての部族、言語、民族、国民の中から、あなたの血によって人々を神のために贖い、
私たちの神のために、彼ら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を治めるのです。」

예수님은 우리를 피로 사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로 그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떤 물건을 예를 들어서 1000원에 샀다고 하면, 그 물건은 1000원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100만원을 주고 샀다면 그 물건은 100만원과 동일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 비용으로 지불하신 것이 예수님의 피라고 하는데 이는 결국 우리의 가치가 다름 아닌 예수님의 피와 똑같은 가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피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신명기 12장 23절에서 피는 생명(血はいのち)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의 생명 그 자체인 것입니다.

즉 우리의 가치는 어느 정도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예수님의 생명처럼 여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이는 그냥 상징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15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15절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わたしは良い牧者(ぼくしゃ)です。良い牧者は羊たちのためにいのちを捨てます。
牧者でない雇い人(にん)は、羊たちが自分のものではないので、狼が来るのを見ると、置き去りにして逃げてしまいます。それで、狼は羊たちを奪ったり散らしたりします。
彼は雇い人で、羊たちのことを心にかけていないからです。
わたしは良い牧者です。わたしはわたしのものを知っており、わたしのものは、わたしを知っています。
ちょうど、父がわたしを知っておられ、わたしが父を知っているのと同じです。また、わたしは羊たちの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捨てます。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삯꾼과 선한 목자를 비유하고 계십니다. 똑같이 양을 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리가 양들을 공격해 왔을 때 삯꾼은 도망가지만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삯꾼 雇い人(にん),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자면 월급쟁이 사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서 공장에 불이 났어요. 그러면 월급쟁이 사장은 어떻게 합니까. 어차피 월급쟁이잖아요. 거기 공장에 있는 건 자기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내 목숨 하나 살기 위해서 도망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사장은 어떻습니까.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건지려고 끝까지 노력하겠지요. 만에 하나 그 안에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다면 끝까지 살려내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예전에 2014년에 일어났던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학생들은 그 안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만 먼저 살아보겠다고 나오는 선장을 보십시오. 이게 말하자면 삯꾼이지요. 하지만 그 아이들을 데리고 온 선생님들은 어땠습니까.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살려보겠다고 끝까지 사투를 벌이다가 결국 자신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 선생님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많은 분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목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스스로를 십자가 위에 매다셨습니다.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목숨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공격해온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실 것입니다. 왜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바치셨을 정도로 우리를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살다 보면 외로우신가요? 불안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불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앞이 안 보이기 때문에 불안한 거죠. 정말 내가 가고 있는 길,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것일까. 어쩌면 길을 잘못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불안한 것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을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です。その宝を見つけた人は、それをそのまま隠しておきます。そして喜びのあまり、行って、持っている物すべてを売り払い、その畑を買います。

이 말씀을 잠시 묵상해보았더니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숨겨두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하는데, 이 사람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한다면, 그 보화는 그 사람이 그 때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를 다 합한 것 보다 더 값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 그 보화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뭐, 여러 이유를 상상해볼 수는 있겠습니다만, 가장 확실한 이유, 이 사람이 그 보화, 값진 보화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 이전에 다른 사람이 그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사람 이전에 왜 다른 사람이 그 값진 보화를 발견할 수 없었을까요. 그것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그와 같은 값진 보화가 감추어져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잖아요? 그 사람보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발견했더라면 그 사람은 그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거기에 있는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 값진 보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처음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천국은 마치 감추인 보화와 같다”(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으면서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 정말 천국에 가는 길이라고, 이 땅에서도 창대한 축복을 받는 길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나만 이 길을 가요. 그래서 외롭게 느껴질 지도 모릅니다. 불안해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으로 가는 보화를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 군마도 마찬가지지요. 선교사들의 무덤이라고 하는 일본선교. 그래도 그나마 좀 하려면 동경이나 좀 큰 도시로 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 군마현, 그것도 군마 중에서 오지에 가까운 시부카와에 우리를 데려다 놓으셨는데……이게 맞는 길인지 아닌지 참 저도 불안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신다고요? 예, 우리가 가는 이 길이 바로 값진 보화를 얻는 길, 창대한 축복을 받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이건 저한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 속에서 외로울 때, 불안할 때, 주변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안 알아줄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아, 지금 나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것이다.
아, 지금 주님께서 인도해주신다.
아,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지금은 미약하더라도 마침내 창대하게 해 주실 것이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앞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첫 텔레비전 출연을 했을 때의 동영상이 지금도 유튜브 동영상 사이트에 올라와 있습니다만, 거기 댓글 중에 인상적인 글이 있었습니다.

전설의 시작임을 왜 그대들은 몰랐는가

이는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을 보고 혹평을 했던 심사위원들한테 한 말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처음 등장했을 바로 그 날은 전설의 시작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전설의 시작,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축복의 시작 시점에 서 이는지도 모릅니다.

불안하십니까.
불안해하지 맙시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두려우십니까.
두려워 하지 맙시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지켜주십니다.

초조하십니까.
초조해 하지 맙시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창대하게 해주십니다.


지금은 불안하고 두렵고 초초하고 미약한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의심을 물리치고 주님을 의지할 때에, 주님과 동행할 때에, 마침내 욥이 받은 축복의 축복을 받는, 끝내는 우리를 심히 창대하게 하시는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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