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회 우리들의 마음
2019년 3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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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잠언 4장 23절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들의 마음” 私たちの心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실 때, 교회는 몇 년 정도 다녀야 좀 제대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는 나 정도 믿음을 가졌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좀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좀 어려우세요?

그러면 좀 다른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대략 몇 년 정도 살면 좀 사람으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짐승들은 태어나자 마자 뛰어다니기도 하지요. 초식동물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풀을 뜯어먹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지요. 단순히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몇 개월이나 걸리고, 자기가 스스로 먹을 것을 자기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루 이틀 가지고는 안됩니다. 적어도 몇 십 년은 걸려야겠지요.

인간으로서 제대로 자립할 수 있는 나이다……라고 하면 단순한 기준으로서는 성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과거에는 성년 나이를 20세로 정했었습니다만, 요즘은 어느 정도로 낮추는 경향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 투표할 수 있는 나이를 20세에서 18세~19세로 조정을 하고, 그 외에 대한 부분도 모두 낮추는 추세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18세나 19세, 적어도 20세 정도 되면 사람으로서 성숙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아직 멀었어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요즘은 많은 분들이 면허를 땁니다. 그리고 운전을 하지요. 우리 교회가 있는 군마현을 본다면 일본 국내에서 운전면허 보유율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뭐, 면허를 따놓고도 실제로 운전을 하지 않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이 군마현은 면허 보유율 만이 아니라 자동차 보유율도 일본에서 가장 높다고 합니다. 사실 뭐, 이걸 뒤집어보면 그만큼 대중교통수단이 부족하다는 뜻이 되지만요. ㅎㅎ

그렇다면 운전, 한 어느 정도 하면 능숙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5년? 10년? 아니면 한 20년은 해야 그래도 운전 좀 한다고 명함을 내밀 수 있는 건가요?

참고로 한국은 그런 규정이 없다고 합니다만, 일본은 새로 운전면허를 땄다면 1년간은 초보자 마크를 부착해야 한다고 법적으로 아예 정해져 있습니다. 노랑색과 파란색으로 된 새싹을 나타내는 마크이죠. 그래서 면허시험에 합격하면 운전학원에서 초보자마크를 선물로 준다고 해요.

저도 운전면허를 처음 땄을 때의 일을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솔직히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면허를 땄으면 그토록 꿈꿔왔던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습니다. 차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많지요. 서울이나 대도시 같으면 일단 버스나 지하철을 타러 가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몇 번이나 갈아타고 그래야 하지만, 자동차가 있으면 곧바로 차를 타고 출발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편리하게 차를 운전할 수 있다면 안전운전을 해야 할 텐데, 안타깝게도 사고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사고가 가장 많이 나냐 하면,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는 면허를 따고 바로 직후가 아무래도 운전이 서툴기 때문에 사고가 많이 날 것도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물론 주차를 하거나 커브를 돌 때 긁히기야 하겠지만, 그건 사고가 아니죠. 그냥 뭐, 애교?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정말 피해가 심각한 교통사고는 언제 나냐 하면 운전을 시작하고 3년 정도에 가장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한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이렇답니다. 맨 처음에 면허를 따고 운전을 시작할 때에는 상당히 조심한다고 해요. 과속을 하지도 않죠. 법정 속도도 잘 지키고, 일시 정지 하라고 하는 곳에서는 정확하게 멈춥니다. 오른쪽 왼쪽도 자세히 보지요. 그렇게 하면, 그야말로 실수로 긁히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큰 사고는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3년 정도 지나고 나면, 아, 이제 조금 차를 알 것 같아요. 커브 같은 건 문제 없고요, 차선도 능숙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타서 쌩쌩 달릴 때에는 기분도 좋아요. 이제 그야말로 나와 차가 하나가 된 듯한, 내가 원하는 대로 차를 운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바로 그 때, 정말 능숙하게 차를 운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바로 그 때 대형사고가 날 확률이 제일 높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음주 같은 건 어떨까요. 얼마 전에 한국 뉴스를 보니까, 어떤 사람이 술을 먹고 주차요금을 징수하는 사람을 갑자기 폭행을 했다는 거예요. 그것도 참 안타까운 것은, 그 주차요금을 징수하는 분이 장애가 있으신 분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뭐냐 하면 제대로 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약자를 그렇게 심하게 폭행을 해서, 병원에 실려갔다고 합니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육체적인 부상도 부상인데, 그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너무나도 큰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다가 보면 자기를 그렇게 폭행할 때의 그 사람 얼굴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럼 가해자는 어떠냐 하면, 맨 처음에는 부인을 했는데, CCTV를 보여주니까, 그 때서야 인정을 하더래요. 하지만 인정을 하면 뭘 해요? 나는 술 마셨기 때문에 기억이 안 난다고 한답니다. 그리고 자기가 때린 사람한테 사과도 하러 가지 않았다고 해요.

술 드시고 그렇게 일을 저지르는 분들 보면, 평소에 자신이 술이 약하다고 해요? 아니요. 본래 술이 약하다고 하는 분들은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않습니다. 나 괜찮아. 나 술 쎄. 걱정하지 마……. 이런 분들이 그렇게 과음을 하고 사고를 저지르는 일들이 많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너무나도 비굴해지고 기죽어서 살아가는 것이 좋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너무 자신감이 넘치게 되면, 이는 자신감이 아니라 교만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보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진리를 논하고 정의를 논하고 철학을 논하고 윤리와 도덕을 논하는 사람들은 참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자기가 말을 한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 하면 이 또한 대단히 의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저도 이렇게 앞에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만, 목회자라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이 목회자야말로 어쩌면 교만이라고 하는 덫에 걸려들기 쉬운 직업인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서 한국의 대형교회라고 하면 한 번 예배에 몇 백 명, 몇 천 명씩 앉습니다. 그러면 그 앞에서 말씀을 전하지요. 그러면 다들 아멘 하고 경청을 합니다. 그리고 어딜 가나 목사님, 목사님 하지요. 세상에 어느 직업이 매주 그렇게 많은 청중들 앞에 서서 이야기하고, 그 많은 청중들이 경철을 하면서 감사를 합니까. 제아무리 큰 나라의 대통령이라 한다 하더라도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작년 2018년 9월에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본부에서 연설을 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연설 중에서 그는 자신의 성과를 나열하고 자화자찬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2년이 채 안돼 나의 행정부는 미국 역사에서 다른 행정부보다 많은 것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유엔본부에서 연설을 했더니, 그 앞에 앉아 있던 각국의 대표들이 어떻게 했냐 하면 갑자기 수군수군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웃음 소리도 들려와요.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트럼프 대통령은 대단히 당황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해요.

“아……이건 제가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반응이었다.”

이러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그가 연설하는 곳은 언제나 그들의 지지자들로 넘쳤습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람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연설을 들으러 가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는 항상 어디서든지 연설만 하면 박수갈채를 받아왔던 것이지요. 하지만 유엔본부가 자기 지지자들이 모여 있나요. 어찌 보면 요즘 세계는 미국 대통령이나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리 곱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 비웃음을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나라의 대통령이나 지도자라 하더라도 매주 그 많은 청중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경청하는 자리에 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항상 지지하는 사람이 있나 하면 비판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것이 바로 정치라는 세계의 특성입니다.

그럼 뭐, 판사들은 어떻습니까. 어떤 판결을 내렸을 때 원고와 피고로부터 똑같이 박수를 받는다? 아뇨. 그럴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긴 쪽한테 있어서는 명판결이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진 쪽에 있어서는 유감이다 뭐다 하겠지요.

그런데 반면에 앞서 목회자 이야기로 돌아오면, 매번 무슨 말씀을 전하면 아멘, 하고 경청을 해주십니다. 그러니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문제가 발생하냐 하면, 성도님을 경청을 해주시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분들이 왜 그렇게 경청을 해주십니까. 목회자가 앞에서 자기 자랑을 하는데 경청을 해줘요? 자기 생각을 말하는데 아멘 아멘 하고 경청을 해줍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그 교회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제대로 된 교회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역사가 선포되는 곳, 예수님의 십자가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성경 말씀이 전파되는 곳이야말로 진정한 교회, 주님께서 머리 되신 교회라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를 착각해서 주님한테 돌려야 할 영광을 자기가 차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오래된 목회자라 하더라도 소용 없습니다. 금새 교만이라고 하는 쓴 뿌리가 그 마음 안에 심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언 4장 23절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何を見張るよりも、あなたの心を見守れ。いのちの泉はこれから湧く。

참 이 말씀, 이 짧은 말씀이 알고 보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 잠언서는 여러분께서 잘 하시는 바와 같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쓴 것입니다. 솔로몬이 쓴 것이 시편에도 몇 편 있습니다만, 주로 잠언 외에 아가와 전도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잠언과 전도서를 읽으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또한 잠언은 지혜서 중의 지혜서라고 하지요.

열왕기상 4장 29절~34절에는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

神は、ソロモンに非常に豊かな知恵と英知と、海辺の砂浜のように広い心を与えられた。
ソロモンの知恵は、東のすべての人々の知恵と、エジプト人のすべての知恵にまさっていた。
彼は、どの人よりも、すなわち、エズラフ人エタンや、マホルの息子たちのヘマン、カルコル、ダルダよりも知恵があった。そのため、彼の名声は周辺のすべての国々に広まった。
ソロモンは三千の箴言を語り、彼の歌は千五首もあった。
彼は、レバノンにある杉の木から、石垣に生えるヒソプに至るまでの草木について語り、獣、鳥、這うもの、そして魚についても語った。
彼の知恵のうわさを聞いた世界のすべての王たちのもとから、あらゆる国の人々が、ソロモンの知恵を聞くためにやって来た。

하나님께서 넘치는 지혜를 허락해주셨기 때문에 이처럼 많은 성과를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솔로몬 자신의 인생을 어땠습니까. 정말로 자신이 했던 말처럼 지혜롭고 은혜로운 삶을 살았을까요.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이렇게 은혜로운 말씀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용납했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을 의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애굽>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여호와를 의지하라고 말해놓고서, 정작 자신은 세상을 의지한다고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때문에 어떻게 되냐 하면, 하나님께서 노하셨기에 솔로몬이 죽은 다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분단을 하시게 됩니다.

솔로몬도 이랬는데 솔로몬보다도 한참 부족한 우리가 솔로몬보다 더 잘할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ですから、立っていると思う者は、倒れ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

성경은 이처럼 항상 안심하지 말아라. 방심하지 말아라. 언제나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정말로 큰 교통 사고는 우리 운전이 서툴 때가 아니라, 우리가 방심했을 때 일어나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사람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우리는 몇 살쯤 되어야 제대로 철이 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미리 말씀 드리지만 저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적어도 40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 하면 아직까지도 보면 아……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내가 며칠 전에 왜 그랬을까……하는 후회도 하고 그러기 때문에 아직 완벽한 인간이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실 후회가 나쁜 것은 아니지요. 누구는 후회가 나쁘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후회를 해야 반성을 하고, 반성을 해야 개선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몇 살 정도 되어야 좀 능숙하고 성숙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삶은 평생 초보운전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좀 멋있게 말한 것이 아니에요. 실질적으로 그렇습니다.

아까 일본은 면허를 따고 1년간 초보운전 마크를 붙인다고 했는데,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자동차는 똑 같은 차를 2년째 3년째 운전하면 익숙해집니다. 왜냐하면 자동차는 그대로 있으니까 그렇겠지요.

하지만 사람은 어떻습니까. 내가 예를 들어서 올해 서른이에요. 만약에 내년에도 서른이고 그 다음 해도 서른이라면, 서른이라는 나이를 살아가면서 좀 능숙해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서른>이라고 하는 나이의 초보자딱지를 떼려고 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예. <서른 하나>라고 하는 새로운 초보자 딱지를 붙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른, 마흔이 아니라 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칠십, 팔십, 구십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나이를 살아가는 것은 항상 처음입니다. 그리고 그 나이의 초보 딱지를 뗄 때 쯤이면 다음 나이의 초보 딱지를 붙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나이가 많으면 젊은 사람들한테 좀 자랑을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지금 나이 40 먹은 사람이 나이 30 먹은 사람한테 자랑할 수 있을까요? 아니에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이 40 먹은 사람이 30살 인생을 살았던 것은 10년이나 전 일이에요. 그 사람이 2009년에 30세 인생을 살았을지는 모르지만, 2019년에 30세 인생에 대해서는 역시 그 사람 자신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믿음도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1년째 믿음은 1년째 믿음의 초보자이고, 10년째 믿음은 나에게 있어서 역시 10년째 믿음의 초보자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스스로가 매사에 초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낮아질 수가 있습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우리 마음을 교만이라는 위험으로부터, 유혹이라는 위험으로부터, 지킬 수 있다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은 저희 집 주변에 전도지를 돌리고 있습니다만, 전도지를 넣으려고 우체통을 보면요, 우체통은 그 안이 비어 있어서 전도지를 넣을 때 쓰윽 쓰윽 하고 잘 들어갑니다.

그런데 또 어떤 우체통을 보면요, 그 안이 꽉 차 있어서, 아무리 전도지를 넣으려고 해도 안 들어가요. 어떻게 좀 요렇게 조렇게 넣어보려고 해도 안 들어가서, 때로는 포기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을 비워야 우리 마음 안에 복음이 들어갑니다. 우리 마음 안에 겸손이 있어야 우리 마음 안에 복음이 들어갑니다. 믿음이 심어집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見よ、わたしは戸の外に立 ってたたいている。だれでも、わたしの声を聞いて戸を開けるなら、わたしはその人のところに入って彼とともに食事をし、彼もわたしとともに食事をする。

내 마음을 비우고 우리 마음을 주님 앞에 열어놓을 때, 주님께서 두드리는 노크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30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わたしは心が柔和(にゅうわ)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우리는 아직 우리 자신이 초보운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모두 우리 마음을 비우고,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면서 하루하루 살아갈 때에,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모셔 들이고, 주님과 함께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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