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회 세 가지 기쁨
2019년 5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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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편 115편 9절~10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詩篇115篇 9節~10節
“イスラエルよ主に信頼せよ。主こそ助けまた盾。アロンの家よ主に信頼せよ。主こそ助けまた盾。”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만약에, 다행히” もしも、幸いにも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일기를 써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일기라고 하면 정말 어찌 보면 작심삼일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지나 않을까 해요. 다른 것도 그렇지만 일기라고 하는 것은 정말 꾸준히 하기가, 글쎄요. 윗몸 일으키기보다도 힘든 것 같습니다. 이 윗몸 일으키기도 매일 꾸준히 해보려고 해도 이게 참 오래 하기가 힘든데 이보다도 더 힘든 게 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뭐, 윗몸 일으키기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요즘 제가 꽤 꾸준히 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전거를 타는 일입니다. 하루에 1시간 정도 거의 매일 타고 있어요. 저희 집 근처에는 자전거도로가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어서, 30분쯤 쭈욱 갔다가 그 길을 다시 되돌아옵니다. 아침에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저도 뭐, 일기를 꾸준히 쓰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가끔 문득 생각이 날 때에는 몇 자 적어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오늘은 한번 제 짧은 일기, 자전거를 탔을 때를 적은 짧은 일기 이틀 치를 한 번 들려드릴까 합니다. 이건 실제로 제가 쓴 일기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직접 제가 느꼈던 일입니다.

지금부터 제 짧은 일기 이틀 치를 읽어드리겠습니다만, 그냥 가만히 듣고 계시면 재미가 없겠지요? 여기서 한 가지를 찾으셔야 합니다. 무엇을 찾으시냐 하면, 분명히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말하지 않은 것, 이 일기에 나오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실제로는 분명히 있었던 것인데 이 일기에는 나오지 않는 것, 그것을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자, 읽겠습니다.

첫 번째 일기.

오늘은 아침에 바람이 많이 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은 맞바람 때문에 고생했지만, 돌아오는 길은 바람이 안 불어서 힘들지는 않았다.

짧죠?

자 그럼 두 번째 일기입니다.

오늘은 가는 길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다. 자전거 속도도 제법 빨랐다. 그 동안 운동을 꾸준히 한 성과가 있었나 보다. 하지만 자전거를 돌려서 오는 길에는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몹시 힘이 들었다. 시간도 평소보다 많이 걸렸다.

자, 이게 다입니다. 지금 읽어드린 이틀 치 일기 속에는, 양쪽 모두 분명히 있었던 것이지만 제가 적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짧으니까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일기.

오늘은 아침에 바람이 많이 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은 맞바람 때문에 고생했지만, 돌아오는 길은 바람이 안 불어서 힘들지는 않았다.

두 번째 일기

오늘은 가는 길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다. 자전거 속도도 제법 빨랐다. 그 동안 운동을 꾸준히 한 성과가 있었나 보다. 하지만 자전거를 돌려서 오는 길에는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몹시 힘이 들었다. 시간도 평소보다 많이 걸렸다.

아시겠어요? 이 일기 속에는 분명히 있었지만 적혀 있지 않은 것.

예, 정답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풍입니다. 등 뒤에서 나를 밀어주는 바람이죠.

첫 번째 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아침에 바람이 많이 불었다. 가는 길은 맞바람 때문에 고생했지만, 돌아오는 길은 바람이 안 불어서 힘들지는 않았다.”

가는 길에는 맞바람, 즉, 앞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힘들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바람이 안 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안 분 게 아닙니다. 바람은 같은 방향으로 계속 불고 있었어요. 다만 제가 가는 방향이 반대가 되니까, 아까는 맞바람이었던 것이 지금은 나를 내 등뒤에서 밀어주는 바람, 순풍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지만 바람과 제가 가는 방향이 같으니까, 저는 그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지요.

두 번째 일기는 어떻습니까.

오늘은 가는 길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다. 자전거 속도도 제법 빨랐다. 그 동안 운동을 꾸준히 한 성과가 있었나 보다. 하지만 자전거를 돌려서 오는 길에는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몹시 힘이 들었다. 시간도 평소보다 많이 걸렸다.

이번에는 반대로 갈 때는 바람이 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전거를 돌려서 오려고 하자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고 하는데, 이도 역시 마찬가지로 바람은 계속 불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번에는 갈 때는 바람과 같은 방향이었고 올 때는 바람과 반대방향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일기는 어때요? 가는 길, 내 등뒤에서 나를 밀어주는 순풍이 불고 있을 때에는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전거 속도가 제법 빨랐던 것은 나를 밀어주는 순풍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운동 성과였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돌아올 때에는, 이번에는 자기의 운동 부족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맞바람 때문에 몹시 힘들었다고 털어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좋은 것, 잘 된 것은 다 내 탓, 안 좋은 것, 잘 안 되 것은 모두 남의 탓, 환경 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런 발전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 삶을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일이 잘 풀릴 때는 내가 그 동안 열심히 노력을 해서, 내가 머리를 잘 써서 해온 덕분이고, 일이 잘 안 풀릴 때, 삶이 조금 어려울 때, 우리는 경기가 안 좋아서, 물가가 올라서……이러면서 너무나도 쉽게 우리 환경 탓을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간혹하나님 탓을 해버리는 경우도 봉 수 있습니다.

애굽을 탈출하고 광야를 통과해서 이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로 앞에 두고 열두 정탐꾼들을 보냈는데, 그 중 열 명은 절망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강해서 절대로 우리가 이길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했습니까.


민수기 14장 1절~3절

1.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すると、全会衆は大声をあげて叫び、民はその夜、泣き明かした。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 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 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이제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의 명을 따라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낸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면서 대성통곡을 합니다.

여러분, 지금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벌을 내렸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복을 받기 직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몇 백 년간 해왔던 지긋지긋한 노예생활에서부터 해방시켜주시고, 이제 풍요로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놀라운 땅, 놀라운 축복을 주시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해도 모자랄 판입니다만,, 하나님의 뜻을 몰랐던 그들은 지금 감사와 찬송은커녕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민수기 14장 27절~33절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いつまで、この悪い会衆は、わたしに不平を言い続けるのか。わたしは、イスラエルの子らがわたしにつぶやく不平を聞いた。
彼らに言え。わたしは生きている──主のことば──。わたしは必ず、おまえたちがわたしの耳に語ったとおりに、おまえたちに行う。
この荒野におまえたちは、屍をさらす。わたしに不平を言った者で、二十歳以上の、登録され数えられた者たち全員である。
エフンネの子カレブと、ヌンの子ヨシュアのほかは、おまえたちを住まわせるとわたしが誓った地に、だれ一人入ることはできない。
おまえたちが『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と言った、おまえたちの子どもについては、わたしは彼らを導き入れる。彼らはおまえたちが拒んだ地を知るようになる。
しかし、おまえたちはこの荒野に屍をさらす。
おまえたちの子どもは、この荒野で四十年の間羊を飼う者となり、おまえたちがみな、屍となるまで、おまえたちの背信の責めを負わなければならない。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는데, 너희들 지금 뭐라고 했어?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니? 좋아. 내가 니네들 소원대로 해줄게.

그러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를 헤매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40년 뒤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아닙니다. 당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던 어른들은 그들이 말한 대로, 그들이 원했던 대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광야에서 모조리 죽고 말게 된 것입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歴史にもしもはタブー 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만, 저는 이 주장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대해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요. 역사도 그렇고 우리 인생도 그렇고 단 한 번 뿐입니다.

하지만 이 "만약에"라는 것은 사실 모든 학문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문은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해서 <미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외우기만 하는 것은 학문이 아닙니다. 학문을 위한 기초작업이지요.

예를 들어서 음악이나 미술 또는 예술은 <지금>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음악학, 미술학, 예술학......이 되는 순간 <만약>이라고 하는 <미래>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천지 만물을 모두 창조하시고, 이를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이는 너무나도 큰 은혜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천지 창조를 위해서 무엇 하나 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를 창조하시고 이 모든 것을 아담과 하와에게 그냥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이와 같은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금하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善悪の知識の木の実) 를 따 먹었습니다. 너희는 이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마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던 것입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처럼 되었나요? 아니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타락이었습니다.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알고 감사를 드렸다면, 그리고 마귀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축복된 삶을 누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가나안 땅 정복을 바로 눈앞에 두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순종했었다면 그들은 곧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축복의 땅 가나안을 정복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도,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와 순종 대신 불순종으로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되었다구요? 그렇습니다. 타락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는 비단 아담과 하와,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죄가 너무나도 무겁게 우리를 짓누릅니다. 이를 우리 힘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도 역시 타락과 죽음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희생해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십자가에 의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우리 삶 속에서 힘들어 하기도 합니다. “예수 믿기 힘들다”, “예수 믿어봤자 별거 없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나아졌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일요일에 교회 갈 시간에 일을 더 하던가 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아졌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해보신 일이 없으신가요? 바로 이 생각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애굽을 탈출한 것을 후회하고 다시 애굽으로, 다시 노예 생활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도 비참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3차원 세계에 사는 우리는 <시간>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습니다. 이는 무슨 수를 써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3장 8절을 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イエス・キリストは、昨日も今日も、とこしえに変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

이는 실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3차원 세계에 존재하는 시간이라고 하는 한계를 초월한 분이라는 사실을 지금으로부터 2천년 가까이 전에 적힌 히브리서에서 이미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한계를 초월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알고 계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르는 <만약에>를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죄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그저 가축 몇 마리 바치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그저 헌금 얼마 내면 우리의 죄는 모두 해결되고 천국에 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봅니다.

마태복음 24장 38절~39절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洪水前の日々にはノアが箱舟に入るその日まで、人々は食べたり飲んだり、めとったり嫁いだりしていました。
洪水が来て、すべての人をさらってしまうまで、彼らには分かりませんでした。人の子の到来もそのように実現するのです。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면 자신들은 멸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세상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즐겁게 지냈습니다. 이 정도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무지했습니다. 이는 마치 얼마 있으면 낭떠러지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자동차로 힘껏 달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이 이와 같은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아셨습니까.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 인간 모두가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누가 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아셨습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장 48절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ゲヘナでは、彼らを食らううじ虫が尽きることがなく、火も消えることがありません。

이 얼마나 끔찍합니까. 하지만 이 죽음을 향한 질주, 무지한 질주는 단순히 가축 몇 마리, 헌금 몇 푼 가지고는 해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를 막기 위한 유일한 방법. 단 한 가지 방법.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방법 밖에는 없었던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불타는 지옥,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던 운명입니다. 우리는 몰랐지만 예수님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져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죽음을 감당해 주셨던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지금과 그리 큰 차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믿음이 약해지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아셨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결과가 되는지를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15편 9절~10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イスラエルよ主に信頼せよ。主こそ助けまた盾。
アロンの家よ主に信頼せよ。主こそ助けまた盾。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맞바람은 예민하게 느껴도, 우리를 순탄케 하는 순풍에는 둔감합니다. 이렇게 되면 불평과 불만만 쌓이게 되고 감사도 없고 기쁨도 없어집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의 은혜를 알아야 감사와 기쁨과 찬송이 나오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아 그래. 예수님의 은혜를 지금도 누리고 있다.

만약에 예수님이 안 계셨더라면 나는 더욱 비참하게 되었겠지만, 다행히 예수님 덕분에, 예수님의 십자가 덕분에 지금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고 깨닫는 것, 오히려 우리가 어려울 때에는 가나안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순간이다, 넘치는 축복을 받기 직전이다 라는 사실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 이것이 감사와 순종의 근본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형통할 때 주님께 감사 드리고, 우리가 어려울 때 주님께 순종함으로 인하여,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축복, 믿음의 축복, 구원의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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