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회 새로운 삶
2019년 7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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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8절~31절
“28.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マタイの福音書 21章28節~31節
“ところで、あなたがたは、どう思いますか。ある人にふたりの息子がいた。その人は兄のところに来て、『きょう、ぶどう園に行って働いてくれ』と言った。
兄は答えて『行きます。お父さん』と言ったが、行かなかった。
それから、弟のところに来て、同じように言った。ところが、弟は答えて『行きたくありません』と言ったが、あとから悪かったと思って出かけて行った。
ふたりのうちどちらが、父の願ったとおりにしたのでしょう。」彼らは言った。「あとの者です。」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 取税人や遊女たちのほうが、あなたがたより先に神の国に入っているのです。”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삶” 新しい人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사실 이 부분은 번역본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번역본에는 한쪽이 맏아들이고 다른 한쪽이 동생이라고 되어 있는데 또 어떤 번역본에는 형과 동생이 뒤바뀐 경우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어 성경을 보면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전 신개역판은 현재 한글성경과 같은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만, 얼마 전에 새로 나온 신개역2017판에는 한글성경과는 뒤바뀐 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어느 쪽이 형이고 동생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구분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편의상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 성경을 기준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 길이로 보면 4절 밖에 안 되는 말씀입니다만, 여기에 담긴 내용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그 중 한 가지 부분에 주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깨닫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두 아들의 대답과 행동의 차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하지요.

어느 날 아버지가 맏아들한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맏아들은 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결국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 아주 당돌합니다. 좀 있다 가겠습니다, 도 아닙니다. 가긴 가야 할 텐데 제가 좀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요…….라고 변명도 안 합니다. “싫습니다(行きたくありません)”라고 아주 단호하게 거절을 하지요.

친구가 부탁을 하는데 이를 거절할 때에도 좀 핑계를 대거나 아니면 좀 우회적으로 부드럽게 거절할 법도 한데,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부탁하는데도, “싫소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는 아무리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들어도 좀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딱 잘라서 거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 말씀에 따르겠다고 대답은 했어요. 하지만 결국 가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반면에 둘째 아들은 어땠냐 하면 아주 버르장머리 없게 거절을 하긴 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는 포도원에 가서 일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우선 맏아들입니다.

아버지가 말씀을 하셨을 때, 이를 따르겠다고 대답을 해놓고는 결국 안 따랐습니다.

다음은 둘째 아들이지요.

역시 아버지가 말씀을 하셨을 때, 이를 거절한다고 대답해 놓고서는 결국 따랐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가라고 했을 때, 예, 가겠습니다, 하고 갔다거나, 아니면 싫습니다, 하고 안 갔다거나 하면 이는 구분하기 쉽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 두 아들의 대답과 행동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맏아들의 경우 포도원에 가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에 대해서, 가겠다고 대답한 다음 결국 안 갔습니다. 자세히 보면 <가겠다>라는 ‘대답’과 <안 갔다>는 ‘행동’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말만 하고 안 간 것이지요.

반면에 둘째 아들의 경우를 보면, 처음에는 <안 가겠다>는 ‘대답’과 <갔다>는 ‘행동’ 사이에는 어떤 말이 하나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 잊어버리셨을 수도 있으니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0절 말씀입니다.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それから、弟のところに来 て、同じように言った。ところが、弟は答えて『行きたくありません』と言ったが、あとから悪かったと思って(思い直し)出かけて行った。

그렇습니다. 맏아들의 경우에는 간다고 말만 해놓고는 대답과 안 갔다고 하는 행동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의 경우에는 안 가겠다는 대답과 갔다고 하는 행동 사이에 바로 이 ‘뉘우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이 마음이 바뀌어서, 변덕을 부려서……가 아닙니다. 이 <뉘우침>에는 중요한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는 후회이고, 다음은 회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자랑스러우십니까. 내 인생 돌아보면 조금도 후회가 없습니까. 부끄러운 점이 없습니까. 글쎄요.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후회되는 거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끄러웠던 경험이요? 정말 많지요. 아마 뭐 그래도 지금 기억하는 것들은 전체 후회되는 일이나 부끄러운 일들 중 극히 일부일 것입니다. 까먹은 것도 많겠지요.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것 같다가도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면 정말 참, 너무도 후회가 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아예 지워버리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 저만 그래요? 모르겠어요. 여러분은 어떠신지 제가 한 분 한 분 여쭤볼 수는 없겠지만, 성경에 보면 역시 저처럼 그렇게 생각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창세기 12장 10절~2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기껏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주셨는데도, 잠깐 기근이 들었다고 해서 자기 멋대로 이집트로 갔다가는 하마터면 자기 아내를 빼앗길 뻔한 위기를 겪고 맙니다. 이는 남자로서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 왕은 어떻습니까. 사무엘하 11장을 보면 자신의 충신 우리아(ウリヤ)의 아내를 빼앗아서 자기의 아내로 삼고, 우리아는 전쟁터에서 고의로 죽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이 씻을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성경에 너무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어떤 책입니까. 몇 천년 동안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대 베스트셀러 아닙니까. 전세계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읽혀지는 책 속에 자신의 무용담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이 적혀 있다면 그 기분이 어떻겠어요. 제가 만약에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이나 예수님한테 부탁을 해서, 아무도 모르게 그 부분 좀 어떻게 빼주실 수 없느냐고 부탁했을 지도 모르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신약에도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주님을 3년이나 따라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떠나자 곧바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0절 이후에 보면 형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다른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예수님한테 데려와서는, 나중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거든 우리 아들 좀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것도 참 요한이나 야고보가 나중에 생각하면 부끄러울 수도 있는 노릇이지요. 아휴, 그 때 우리 엄마 좀 말릴 걸. 괜히 따라가가지고는 몇 백 년, 몇 천년 동안 창피를 당하고 있지요.

도마(トマス)는 어떻습니까. 그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자, 그는 끝까지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하지요.

요한복음 20장 25절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そこで、ほかの弟子たちは彼に「私たちは主を見た」と言った。しかし、トマスは彼らに「私は、その手に釘の跡を見て、釘の跡に指を入れ、その脇腹 に手を入れてみなければ、決して信じません」と言った。

하지만 8일 뒤에 예수님께서 도마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렇다고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본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니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 자기가 그런 고집을 부렸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마태는 어떻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기 전은 세리였습니다. 세리라고 하는 것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을 때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해가면서 동족의 피를 빨아먹던 매국노였습니다.

어쩌면 마태는 그와 같은 부끄러운 과거를 지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도들은 괜찮았습니까? 부끄러운 점이 없었을까요? 오늘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지켰던 사도가 누구였을까요.

성경은 충격적인 한 구절을 남겨놓았습니다. 마가복음 14장 50절입니다.

마가복음 14장 50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皆は、イエスを見捨てて逃げてしまった。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예수님과 그렇게 오랫동안 지내왔으면서, 그렇게 은혜로운 말씀들을 수도 없이 들어왔으면서, 놀라운 기적들을 수도 없이 봐왔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버렸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당연한 말입니다만 그 때는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이 장차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しかし、助け主、すなわち、父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は、あなたがたにすべてのことを教え、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話したすべてのことを思い起こさせてくださいます。


성령님이 오시면 그 때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든 것들이 생각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갈은 능력으로 인하여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러면 또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미리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지금도 그럼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성경을 읽지 않아도 달달달달 외우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성경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씀을 우리 안에 머물게 해주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펴서 말씀을 공부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말씀을 담아둘 수가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이나 신학교 교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녔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위기가 닥치면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예수님도 버려두고 도망쳐버리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더라도 정말 우리들처럼 부끄러운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면 역시 당시 본인들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아 그때는 정말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한탄도 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거절을 하였으나, 후에 뉘우치고 아버님 말씀대로 포도원에 갔다고 기록합니다. 앞서 이 <뉘우침>에는 <후회>와 <회개>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렇다면 후회와 회개는 무엇이 다를까요.

우리 이해하기 쉽게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두 사도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다름아닌 베드로와 가룟 유다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드리는 말을 나중에 베드로 선생이 알게 된다면, 제게 좀 서운하다고 말씀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뭐 나중이고, 제 기준으로 본다면, 사도 베드로도 가룟 유다도 역시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배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말했지요. 그리고 마태복음 26장 74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26장 74절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するとペテロは、噓ならのろわれてもよいと誓い始め、「そんな人は知らない」と言った。すると、すぐに鶏が鳴いた。

그냥 모른다고 하는 게 아니라 저주하고 맹세까지 해가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뗐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 구절 마태복음 26장 75절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ペテロは、「鶏が鳴く前に、あなたは三度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と言われたイエスのことばを思い出した。そして、外に出て行って激しく泣いた。

그렇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가 부인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35절

“33.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すると、ペテロがイエスに答えた。「たとえ皆があなたにつまずいても、私は決してつまずきません。」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あなたは今夜、鶏が鳴く前に三度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
ペテロは言った。「たとえ、あなたと一緒に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としても、あなたを知らないなどとは決して申しません。」弟子たちはみな同じように言った。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던 베드로의 부인은, 장도 바뀌지 않은 똑 같은 마태복음 26장 70절부터 시작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부족해서 라기보다도, 사람이란 참 이처럼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뜻도 되겠지요.

흥미로운 점은 베드로가 부인할 것도 미리 말씀하셨던 것처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이라는 점도 이 마태복음 26장 21절~25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비슷한 점이 많이 있지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그렇게 심히 통곡했다고 하니, 대단히 후회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배반한 다음에 후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어떻게 됐을까요.

마태복음 27장 3절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そのころ、イエスを売ったユダはイエスが死刑に定められたのを知って後悔し、銀貨三十枚を祭司長たちと長老たちに返して、言った。

여기서 유다도 뉘우쳤다고 나옵니다만, 이는 회개가 아닌 후회일 뿐입니다. 그는 결국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27장 5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そこで、彼は銀貨を神殿に投げ込んで立ち去った。そして出て行って首をつった。

사람이 후회를 하게 되면 나 자신이 참으로 싫어집니다. 후회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싫어지고, 그리고 세상이 싫어집니다.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도 그렇고,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후회를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가 달랐습니다. 가룟 유다는 거기서 멈춰버렸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움 속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땠습니까. 심히 통곡할 정도로 자신이 부끄러웠을 것이지만, 거기서 멈춰서지 않았습니다. 회개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주님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후회에서 멈추면 주님 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회개를 하고 돌아온다면 주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 대한 말씀을 마치시고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질문내용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1절 초반부입니다.

“31.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二人のうちのどちらが父の願ったとおりにしたでしょうか。

참으로 오묘한 질문이십니다. 보통 우리 같으면 맏아들과 둘째 아들 중 누가 더 착한 아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을 법도 한데, 그게 아니라,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라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요? 정말 착한 사람은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정말로 간 사람이겠지요. 그러나 굳이 예수님께서 그런 모범적인 사람을 예로 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예, 그렇게 착한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예 그런 무리한 말씀은 하지 않으신 것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 이유,

누가복음 5장 32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わたしが来たのは、正しい人を招くためではなく、罪人を招いて悔い改めさせるためです。」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람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한테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누가복음 15장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それと同じように、一人の罪人が悔い改めるなら、悔い改める必要のない九十九人の正しい人のためよりも、大きな喜びが天にあるのです。

누가복음 15장 10절
“1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それと同じように、一人の罪人が悔い改めるなら、神の御使いたちの前には喜びがあるのです。」

죄인 한 사람의 회개가 하나님께 진정한 기쁨이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거입니다.

후회되는 것이 있습니까. 후회 하십시오. 하지만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회개를 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너무 늦은 것 같으십니까. 아직은 괜찮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면 아직은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후회하고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과거의 내 모습을 뉘우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오늘 지금 이 시간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은 바로 그 기회는 영원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24장 42절~44절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主が来られるのがいつの日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次のことは知っておきなさい。泥棒が夜の何時に来るかを知っていたら、家の主人は目を覚ましているでしょうし、自分の家に穴を開けられることはないでしょう。
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用心していなさい。人の子は思いがけない時に来るのです。

마가복음 13장 33절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気をつけて、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時がいつ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からです。


요한계시록 3장 3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だから、どのように受け、聞いたのか思い起こし、それを守り、悔い改めなさい。目を覚まさないなら、わたしは盗人のように来る。わたしがいつあなたのところに 来るか、あなたには決して分からない。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심판의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 전에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과거를 더 이상 부끄러워할 것 없습니다. 주님이 모두 받아주십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뉘우침,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순종으로 나아가는 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28장 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自分の背きを隠す者は成功しない。告白して捨てる者はあわれみを受ける。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 모두 내가 지금까지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들을 주님 앞에 모두 내려놓고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함으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순종하는 삶,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통하여 주님께 기쁨과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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