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회 소금의 변화
2019년 10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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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マタイの福音書 5章 13節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気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もう何の役にも立 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소금의 변화”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이는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서 종교혁명이 시작한 날인 것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을 기념하는 의미는 우리 믿음의 기준을 확고하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믿음이 있고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 중에서도 신교와 구교의 구분을 잘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원래 하나님을 믿는 종교는 구교, 그러니까 카톨릭이었는데, 새로운 교리를 주장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개신교다……이런 말씀을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종교개혁, 종교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구교가 잘 하고 있었는데, 마틴 루터가 마치 무슨 신흥종교집단처럼 일어나서 그 때까지 없었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구교가 성경에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오직 말씀’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것이 바로 종교혁명의 핵심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멀어지는 믿음을 다시 성경으로 되돌리는 것, 성경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종교혁명을 이끌었던 이들이 추구했던 믿음이었던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개신교의 기본정신은 변화와 회복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성경입니다. 성경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경 안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성경 안에 구원이 있으며 성경 안에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이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또한 예수님 스스로 보여주신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이 모두를 믿는 이유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 만약에 아무리 좋은 말, 아무리 아름다운 말,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이라 하더라도 성경에 없다면 이는 우리 믿음 속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변화란 성경에서 벗어난 옛 것들을 본래 자리로 옮겨놓는 것,
우리에게 있어서 회복이란 성경에서 멀어진 옛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소금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マタイの福音書 5章 13節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気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もう何の役にも立 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여기서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변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소금이 의미하는 변화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변화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음식에 소금을 넣으면 일어나는 변화를 우리는 두 가지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음식에 소금을 넣으면 그 맛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소금은 일반적으로 싱거운 음식에 넣습니다. 소금은 본래 짠맛이 납니다. 그 소금을 음식에 넣게 되면 싱거운 음식 맛이 짠 맛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상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소금이 그 맛을 잃게 되면 아무 쓸 데가 없어져서 밖에 버려지고는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소금이 그 맛을 잃는다는 것은 물론 소금을 가만히 놔두었는데 소금을 이렇게 손가락으로 찍어먹어 보니까 전혀 안 짜게 되었어요. 그렇게 된다면 이는 음식에 넣어볼 필요도 없지요. 그야말로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에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소금을 찍어먹어 보니까 분명히 짠 맛이 나요. 그런데 음식에 넣어보았더니 이유는 모르겠으나 음식이 전혀 짜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 짠 소금을 넣어도 맛이 그대로예요. 만약에 이렇게 되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짠 소금을 싱거운 음식물에 넣어도 음식이 짜지지 않고 싱거운 맛 그대로 있었다면, 이는 분명 그 싱거운 음식에 의해서 오히려 처음에는 짰던 소금이 싱거워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면, 이는 소금이 그야말로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라면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는 너무나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보면, 한국 젊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미국인과 연애를 하게 되면 영어가 빨리 는다는 말을 합니다. 조금 있으니까 정말로 미국 여성과 연애를 하는 한국사람이 생기더라니까요. 거 참 대단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났냐 하면 정말로 한국사람의 영어가 늘면 좋을 텐데, 어디서 뭐가 어떻게 잘 못됐는지, 한국인 남자는 영어가 거의 안 느는데, 오히려 미국인 여성의 한국어 실력이 나날이 늘어난다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안타깝다고 해야 하는지 대단하다고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소금이 안 들어가서 싱거운 음식을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소금’이라고 한다면, 이 싱거운 세상 속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가 ‘소금’으로서 들어가게 된다면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앞서 우리가 가진 상식으로 본다면 싱거운 음식에 짠 맛이 나는 소금이 들어가면, 그 음식이 짜진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공식이 사실이라면 ‘싱거운 음식 같은 세상’ 속에 ‘소금으로서의 나’라고 하는 존재가 들어가게 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들도 싱거운 곰탕국물을 드셔보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들여서 우려낸 곰탕국물이라고 해도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이게 곰탕인지 맹물인지 모를 정도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금이 조금만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그 넓은 그릇에 담긴 곰탕 국물에 소금이 조금만 들어가도 맛이 완전히 바뀌어서 멋진 음식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도 우리로 인해서 멋진 세상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짠 맛이 들어가서, 그 때까지는 싱겁고 맛도 없는 밋밋한 세상이 놀라운 맛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항상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분명히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나와 내 주변을 보니까, 내가 세상에 살아가면서,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언제부터인지 내가 세상에 의해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분명 이건 아닌데, 분명 이건 성경에 적혀있는 방법이 아닌데, 분명 이건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아닌데……이처럼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적인 방법, 신앙적인 방법을 버리고 언제부터인지 세상에 물들어 가고 있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또한 소금이 그 맛을 잃게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マタイの福音書 5章 13節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気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もう何の役にも立 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소금이 그 맛을 잃게 되면 밖에 버려질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한테까지도 버림을 받게 된다는 뜻이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일본보다도 몇 배나 많은 기독교인인 있는 한국 교회들을 보면 가끔 부끄러워질 때가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성실하고 그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금의 역할을 다 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교회가, 오히려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도 더 심각한 일들을 저지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 일들이 한국에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일본 어떤 지역에서 제게 상담을 하는 전화가 걸려왔었습니다만, 이 분은 일본 목사님이셨는데, 이 목사님이 계신 지역에서도 일본 교회들 사이에서 참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밟힘을 당합니다. 우리가 변화시키지 못하면 세상이 우리를 삼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는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되라는 것도 아닌 이미 우리는 소금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이미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힘을 이미 주셨다는 말씀이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세상으로부터 삼킴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 시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변화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식에 소금을 넣으면 일어나는 두 번째 변화, 이는 음식 안에 소금을 넣으면 그 소금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사라지게 됩니다. 녹아서 그 모습이 안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소금을 곰탕국에 넣었는데 맛이 좋아졌어요. 그러면 그 곰탕을 먹는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다. 곰탕을 먹으면서 보통은 “아, 이 곰탕이 참 맛이 좋다”라고 하지, “아, 이 소금이 참 맛이 좋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소금이 그 안에 들어가면 녹아서 없어지고, 그러면서 본래 음식 맛을 높여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음식에 소금을 넣었더니 온통 소금맛 밖에 안 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음식이 맛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그런 음식은 역시 바깥에 내버려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세상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소금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나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여주는 지혜가 필요한데, 가끔 어떤 경우를 보면, 그 때까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일을 했었는데, 일이 잘 되면 그 공로를 다 자기한테로 돌리는가 하면, 일이 조금 안 되면 자기 탓은 안 하고, 다 남의 탓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소금이 제대로 음식 안에 녹아 들지 않고는, 소금 덩어리가 되어서 둥둥 떠다니는 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남의 탓만 하는 원조가 어디에 나옵니까. 예, 창세기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에 있는 어떤 열매든지 따먹어도 좋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따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이 하와를 유혹해서 따 먹게 되고, 자신만 먹은 게 아니라 아담한테까지 줘서 결국 아담도 이 열매를 먹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이유를 물으십니다. 그 때 아담과 하와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창세기 3장 12절~13절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人は言った。「私のそばにいるようにとあなたが与えてくださったこの女が、あの木から取って私にくれたので、私は食べたのです。」
神である主は女に言われた。「あなたは何ということをしたのか。」女は言った。「蛇が私を惑わしたのです。それで私は食べました。」

지금 하와는 그 열매를 따먹은 이유가 뱀이 꾀어서 먹었다고 말하면서 뱀 탓을 합니다.

그리고 아담은 어떻습니까.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 아담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창세기 2장 23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人は言った。「これこそ、ついに私の骨からの骨、私の肉からの肉。これを女と名づけよう。男から取られたのだから。」

그런데 이제 아담은 그 열매를 먹은 것을 여자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담은 한술 더 떠서 하나님, 당신이 나한테 주신 여자 때문에 먹었다, 라고 하면서, 열매를 자기한테 준 하와만이 아니라 하나님 탓까지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갈은 아담의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하와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된 것이 화가 나서 그랬을까요?


로마서 5장 12절을 봅니다.

로마서 5장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人によって罪が世界に入り、罪によって死が入り、こうして、すべての人が罪を犯したので、死がすべての人に広がったのと同様に──

그들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던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열매의 성분이 어쩌구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열매를 먹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고 하는 죄가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가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사랑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그리고 내게 있어서 가장 가까운 사람, 내가 가장 아껴야 하는 사람한테 대한 사랑마저도 잊어버리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이제 아담과 하와는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금방 남의 탓, 하나님 탓, 그리고 이웃 탓을 하게 변하고 말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요한복음 12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一粒の麦は、地に落ちて死ななければ、一粒のままです。しかし、死ぬなら、豊かな実を結びます。

여기서 죽는다고 하는 것은, 그 생명이 다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한 알의 밀알 크기가 커 봤자 얼마나 하겠습니까. 그런데 자기만 옳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 탓, 환경 탓, 세상 탓만 하고 있으면 그것은 자신을 낮춘다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게 계속 하고 있으면 아무런 발전도 성장도 없습니다. 작은 한 알의 밀알은 영원히 그대로입니다.

제가 학원 강사를 하고 있을 때에도 느꼈던 것이 바로 이런 점입니다. 어떤 선생님들을 보면 학생이 줄어들고 그러면, 학원에서 이런 걸 안 해준다, 저런 걸 안 해준다. 요즘 정치인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요즘 공부를 안 한다……등등 이런 불만 저런 불만을 하시는 분들이 가끔 계십니다. 하지만 다른 선생님들의 학생들은 늘어요. 그 선생님 반만 줄어들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선생님의 학생 수가 줄어드는 게, 환경 탓이겠어요? 아니에요. 그 원인을 자기 자신한테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는 어떤 경우나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설령 정말로 환경에 문제가 있다거나, 다른 곳에 원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남의 탓, 환경 탓만 한다면 아무 것도 안 변합니다.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지만 발전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변화와 회복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 사정은 잘 알 수가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사정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내가 좋은 소금으로 살아왔을까. 아니면 나쁜 소금으로 살아왔을까.

좋은 소금은 주님을 믿는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금이요,
나쁜 소금은 주님을 믿는대도 내가 세상에 물들어버리는 소금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좋은 소금이면서 나쁜 소금?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면서 내가 세상에 물들어버린다? 아니요. 여기에 중간은 없습니다. 좋은 소금이냐 아니면 나쁜 소금이냐. 이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제 종교개역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스스로의 변화와 회복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벗어난 모든 것들을 본래 믿음의 자리로 돌려놓고, 성경에서 벗어나서 세상적으로 물들었던 모습을 믿음의 모습으로 회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세상에 물드는 나쁜 소금이 아닌, 주님을 믿는 우리가 우리 주변을 변화시키고 우리 세상을 변화시키는 좋은 소금으로 변화되고 회복되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능히 감당하고, 마지막 날에 예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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