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5회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 5 - 연(憐)
2020년 3월 1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マタイの福音書 5章7節
“あわれみ深い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あわれみを受けるからです。”

한국어 동영상
https://youtu.be/FxoP20dtISo

일본어 동영상
https://youtu.be/w3DF2wtnJAQ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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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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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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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 主が望まれる人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는 다섯 번째 시간으로서 <긍휼히 여기는 자>(あわれみ深い者)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보에는 한자 한 글자. 연민할 때의 ‘연(憐)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이제 팔복 중에서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다섯 번째의 시간입니다. 특별히 오늘 살펴볼 이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그리고 일곱 번째의 말씀은 우리와 우리 이웃 간에 있어서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여러분과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만, 우선 이 말씀의 성격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오늘 말씀을 읽고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오늘 이 말씀을 보시고 혹시 성경의 다른 구절이 떠오르신 분이 계신가요?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잘 들으시고 이 내용이나 길이가 비슷한 구절이 어디 있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마태복음 5장 7절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マタイの福音書 5章7節
“あわれみ深い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あわれみを受けるからです。”

저는 이 말씀을 읽고 누가복음 6장 31절이 떠올랐습니다.


누가복음 6장 31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人からしてもらいたいと望むとおりに、人にしなさい。

어떠세요? 왠지 좀 비슷하지 않으세요? 저는 맨 처음에 이 두 구절이 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니까 분명히 이 두 말씀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차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우선 누가복음에 나온 말씀은 어떻습니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신 말씀. 이는 분명히 서로가 대등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렇잖아요? 예를 들어서 어느 가난한 사람이 큰 회사 사장님한테 대접을 받고 싶어요. 그러면 가난한 사람은 돈이 없으니까 돈을 꿔서라도 그 회사 사장님을 대접하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걸까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내가 상대방을 대접할 수 있을 정도로 상대방 또한 나를 대접할 수 있는, 그와 같이 서로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의 말씀이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반면에 오늘 말씀은 어떻습니까. 먼저 <긍휼>이라는 단어, 여러분께서는 금방 이해가 되시나요?

혹시 또 몰라서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사전을 찾아보기 전에 저는 이렇게 예상을 했었어요. <긍휼>이라는 뜻을 찾으면 아마도 <불쌍히 여김> 뭐 이렇게 나와있지 않을까. 이렇게 예상을 하고 찾아보았더니, 아, 참으로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인터넷에서 <긍휼>을 찾아보았더니 표준국어대사전에 어떻게 나와 있었냐 하면 <불쌍히 여김>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이라고 나와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 해석을 보고 난 다음에 느낀 것은, 와, 정말 어떤 때는 세상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보다도 훨씬 더 단어를 잘 이해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제가 하고자 했던 말이 여기 다 들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자, 먼저 하나하나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긍휼히 여긴다는 말을 좀 쉬운 표현으로 하자면 불쌍하게 여긴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누가복음 6장 31절 말씀에서 나오는 <대접>은 대등한 관계에 있을 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불쌍하게 여긴다는 경우에는 대등한 관계에 있을 때는 아니겠지요.

내가 지금 안 좋은 상황에 처해 있는데, 다른 사람을 보고 불쌍하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누군가를 보고 불쌍하다고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 사람보다는 덜 불쌍한 경우라고 하겠지요. 쉽게 말해서 안 불쌍한 사람과 불쌍한 사람, 안 어려운 사람과 어려운 사람, 아니면 적어도 덜 불쌍한 사람과 아주 불쌍한 사람, 덜 어려운 사람과 아주 어려운 사람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대등한 관계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일방통행과도 같은 감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은 <긍휼> 즉 불쌍히 여기는 상황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때에 불쌍하게 느낄까요.


이에 대해서 성경에는 매우 적절한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3절~3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3절~35절
23.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장 23절~35절

ですから、天の御国は、王である一人の人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その人は自分の家来たちと清算をしたいと思った。
清算が始まると、まず一万タラントの負債のある者が、王のところに連れて来られた。
彼は返済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その主君は彼に、自分自身も妻子も、持っている物もすべて売って返済するように命じた。
それで、家来はひれ伏して主君を拝し、『もう少し待ってください。そうすればすべてお返しします』と言った。
家来の主君はかわいそうに思って彼を赦し、負債を免除してやった。
ところが、その家来が出て行くと、自分に百デナリの借りがある仲間の一人に出会った。彼はその人を捕まえて首を絞め、『借金を返せ』と言った。
彼の仲間はひれ伏して、『もう少し待ってください。そうすればお返しします』と嘆願(たんがん)した。
しかし彼は承知せず、その人を引いて行って、負債を返すまで牢に放り込んだ。
彼の仲間たちは事の成り行きを見て非常に心を痛め、行って一部始終を主君に話した。
そこで主君は彼を呼びつけて言った。『悪い家来だ。おまえが私に懇願(こんがん)したから、私はおまえの負債をすべて免除してやったのだ。
私がおまえをあわれんでやったように、おまえも自分の仲間をあわれんでやるべきではなかったのか。』
こうして、主君は怒って、負債をすべて返すまで彼を獄吏(ごくり)たちに引き渡した。
あなたがたもそれぞれ自分の兄弟を心から赦さないなら、わたしの天の父もあなたがたに、このようになさるのです。」


이 말씀 중에서 주요 등장인물은 셋입니다. 주인과 그 주인에게 빚진 종A, 그리고 그 종에게 빚진 동료 종B입니다.

그리고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편의를 위해 여기에 등장하는 화폐 단위도 정리를 해볼까 합니다.

먼저 달란트라고 하는데, 금 한 달란트라고 하면 금 34킬로라고 합니다. 한 달란트가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데나리온이라는 단위가 나옵니다만, 이는 달란트의 6000분의 1일입니다. 금 1 달란트가 34킬로였으니까 그것의 6000분의 1이라고 하면, 1 데나리온은 5.7그램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하면 잘 감이 안 옵니다. 조금 다르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었다고 합니다. 이를 요즘 화폐로 바꾸어본다면 편의상 일당 5만원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1 데나리온이 5만원이라고 한다면, 1달란트는 1 데나리온 그러니까 5만원의 6000배, 단순계산으로 3억원입니다.

그러면 만 달란트는 얼마겠습니까. 1 달란트가 3억원이니까, 3억원 곱하기 10,000입니다. 계산을 하면 자그마치 3조원이라는 말이 됩니다. 하루 5만원 버는 노동자나 3조원을 벌려고 하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하루 5만원 버는 노동자가 365일 일하면 1년에 18,250,000원. 3조원 나누기 18,250,000원을 하면, 164,384년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즉 16년도 아닌 16만년 이상을 돈 한 푼 쓰지 말고 모아야 되는 액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 데나리온은 어떻게 될까요. 1데나리온이 하루 노동자 일당 5만원이라고 한다면 5만원 곱하기 100이면 500만원입니다.

자, 그러면 이를 염두에 두고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결산할 때가 왔습니다. 주인이 장부를 보니 종A가 갚아야 할 돈이 만 달란트 그러니까 3조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종을 끌고 와서는, 자, 네가 갚아야 할 돈이 3조원이니까, 너와 네 가족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갚아라. 이렇게 명령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일당 5만원 받는 사람이 가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이 아무리 가족 모두를 동원해서 평생 동안 노예로 산다 하더라도 3조원 중에서 얼마나 갚을 수 있겠습니까. 16만년 동안 갚아야 되는 돈인데요. 이건 정말 대대로 돈을 갚아도 절대로 갚지 못하는 금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듣고 종A는 사정합니다. 엎드려 절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다 갚을 테니 용서해달라고 애원을 하지요.

이 모습을 보고 주인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냥 불쌍히 여기고 말았던 것이 아니라 3조원 빚을 그 자리에서 모두 탕감해주였습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한 두 푼도 아니고, 3조원을 탕감해주었다는 것입니다. 16만년 이상 일을 해야 갚을 수 있는 돈을 단 한 순간에 탕감해주었습니다. 자칫하면 평생 동안 돈 한 푼 못 받으면서 온갖 힘든 노동을 해야 했을 수도 있겠지만, 주인이 이 모두를 탕감해줌으로 인해서 이제 그와 그의 가족은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 된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겠습니까.

그가 과연 몇 년에 걸쳐서 그처럼 거액의 빚을 졌는지는 모릅니다만, 분명 하루 이틀에 그런 큰 빚을 지진 않았겠지요. 적어도 십 년 이상, 몇 십 년에 걸쳐서 조금씩 돈을 빌리다 보니 그렇게 많은 빚을 떠안게 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괴로웠던 것은 방금 주인 앞에 끌려갔을 때만이 아닙니다. 그 빚을 자신이 갚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을 안 질 수가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주인이 돈을 갚으라고 할 텐데, 갚을 방법은 없고 어쩌면 좋을까. 잘못하면 자기만 아니라 자기 가족들까지도 평생 동안 종살이를 하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이 문제는 그를 몇 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인이 그 많은 빚을 모두 탕감해준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불안에 떨 필요가 없습니다. 당당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이제 몇 십 년 동안 맛보지 못했던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합니다. 눈앞에는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할 자기 아내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떠오릅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마침 동료인 종B를 길거리에서 만납니다. 그런데 이 동료인 종B는 종A보다 더 딱한 처지입니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넉넉하지 못한 종A에게 돈을 꾸었어요.

종A가 자신에게 돈을 꾸었던 종B를 만났습니다. 얼마나 꾸었다고요? 예, 100 데나리온, 대략 500만원 정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을 보면 참 예수님도 절묘한 액수를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여러분, 500만원이 적은 돈인가요? 아니요. 우리 같은 서민들에게 있어서 500만원은 큰 돈이지요. 내가 누구한테 돈을 빌려줬는데, 상대방이 갚을 돈이 없다고 해요. 그게 뭐 천원이나, 이 천원, 그래도 뭐 큰 맘 먹고 만원, 이 만원 정도를 꿔졌는데, 갚으라고 하니까 상대방이 정말 엎드려 절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말 자기가 요즘 돈이 없어서 너무나도 어렵다고 하면 뭐, 그래 주는 셈치고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500만원인데, 500만원을 꿔줬는데 상대방이 못 갚는다고 해서, 그래 그럼 알았어. 안 갚아도 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느 정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잊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탕감을 받았어요? 천 만원이요? 이 천 만원이요? 아니요. 3조원입니다. 500만원이라고 하면 하루 5만원 씩 3개월하고 열흘 정도 일하면 벌 수 있는 돈이에요.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는 3개월이 아니라 16만년 동안 일을 해도 갚지 못할 큰 돈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알았다면 그는 얼마든지 500만원 정도를 탕감해준다 하더라도 아깝지 않았겠지요.

만약에 종A가 생각하기를 내가 3조원이나 탕감 받았는데, 내 가족이 평생 동안 노예살이를 할 수도 있었는데, 이를 모두 용서 받았는데, 그깟 500만원이 대수겠냐. 이렇게 생각하고 종B에게 말하기를, “됐어. 안 갚아도 돼” 만약에 이렇게 했다면, 그 소식을 전해들은 주인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래. 3조원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탕감해준 보람이 있구나. 참으로 기특하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종A는 잊었습니다. 내가 탕감 받은 3조원은 잊어버리고 내가 받아야 할 500만원만을 기억했습니다. 종A는 종B의 목을 잡고 따집니다. 너 나한테 500만원 갚을 것 있지? 빨리 갚아! 그러자 종B는 종A에게 엎드려서 사정을 합니다. 용서해달라고, 꼭 갚겠다고 애원을 합니다.

그러자 이 종A가 어떻게 했습니까. 500만원을 갚지 않는다고 종B를 옥에 가두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종A가 주인에게 3조원이나 되는 돈을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야박하게 구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습니까. 이를 주인에게 고하자 주인이 당장 종A를 잡아오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주인은 말합니다.

마태복음 18장 32절~34절
32.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そこで主君は彼を呼びつけて言った。『悪い家来だ。おまえが私に懇願(こんがん)したから、私はおまえの負債をすべて免除してやったのだ。
私がおまえをあわれんでやったように、おまえも自分の仲間をあわれんでやるべきではなかったのか。』
こうして、主君は怒って、負債をすべて返すまで彼を獄吏(ごくり)たちに引き渡した。

종A에게 부족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부족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몰랐나요? 아니요. 알았습니다. 왜요? 자신이 주인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았지 않았습니까. 모르고 한 일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긍휼히 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본인이 주인에게 그토록 긍휼히 여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이웃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3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37절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ある人が、エルサレムからエリコへ下って行ったが、強盗に襲われた。強盗たちはその人の着ている物をはぎ取 り、殴りつけ、半殺しにしたまま立ち去った。
たまたま祭司が一人、その道を下って来たが、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同じようにレビ人も、その場所に来て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ところが、旅をしていた一人のサマリア人は、その人のところに来ると、見てかわいそうに思った。
そして近寄って、傷にオリーブ油とぶどう酒を注いで包帯をし、自分の家畜に乗せて宿屋に連れて行って介抱した。
次の日、彼はデナリ二枚を取り出し、宿屋の主人に渡して言った。『介抱してあげてください。もっと費用がかかったら、私が帰りに払います。』
この三人の中でだれが、強盗に襲われた人の隣人になったと思いますか。」
彼は言った。「その人にあわれみ深い行いをした人です。」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も行って、同じようにしなさい。」

이 말씀에 보면 누군가가 강도를 만나 큰 부상을 입고 길가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이를 본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제사장이요, 둘째는 레위인이요, 셋째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누구입니까. 백성들의 신앙적 지도자급 인사였습니다. 율법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했습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지요. 사실 초대 제사장인 아론부터 시작해서 모든 제사장은 레위인이었습니다.

율법에는 뭐라고 기록합니다.


레위기 19장 18절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あなたは復讐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民の人々に恨みを抱い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わたしは主である。

그와 같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율법에 이와 같은 구절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아니요. 알았습니다. 그것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 쓰러진 사람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예, 불쌍하게 생각했겠지요. 아이구, 쯧쯧쯧. 어쩌다가 저런 꼴을 당했을까. 안 됐구만. 가엾구만……. 하지만 어떻게 했대요? 예, 그렇습니다.

제사장은 31절 마지막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레위인도 32절 마지막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그들은 몰라서 피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목격한 사마리아인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말도 안 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취급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쓰러진 그를 보고 어떻게 생각했다고 합니까.


33절 마지막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その人のところに来ると、見てかわいそうに思った。

그렇습니다. 불쌍히 여겼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를 치료하고 숙소로 가서는 그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 큰 돈이에요? 한 10만원 정도 되는 돈입니다. 그것을 주면서 이 사람 좀 돌봐 달라고 부탁을 해요. 그것만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디를 가는 길인데, 돈이 더 든다면 돌아오는 길에 들러서 갚아주겠다고까지 합니다.

아무리 레위인이면 뭘 하고 제사장이면 뭘 하겠습니까.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아무리 목사나 신학교 교수면 뭘 합니까. 교회 직분자면 또 뭘하겠습니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도 우리의 죄를 탕감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 탕감 받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탕감해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조원이 아니라 아무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돈과 재물을 합한다 하더라도 어찌 예수님의 보혈과 생명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은 단순히 우리에게 착한 일을 해서 착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도움을 준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내 죄를 모두 탕감 받았다, 내 죄로 인해서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고통 속에 시달려야 마땅한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신흥종교집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면 이단의 특징들을 여러 가지로 정리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지당한 말씀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많은 분들이 간과하고 계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 이웃사랑인 것입니다.

신흥종교집단들도 사회사업이나 봉사활동 같은 것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나라나 단체로부터 상도 많이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이웃 사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집단이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말하자면 이웃을 위한 하나님 말씀의 실천이 아니라 자신들의 현실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그 신흥종교집단들을 보면 대부분 전도를 열심히 합니다. 혼자 다니거나 아니면 몇몇이 함께 전도를 한다고 하는데, 정말로 집요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계획적으로 전도를 해서 자신이 속한 집단으로 끌어들이고는, 만에 하나 빠져나가려고 하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철저하게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그러면 그 영혼을 위해서 하는 일인가요? 아니요. 단순합니다. 자기가 자신이 속한 그 종교집단에서 인정받기 위해서인 것이지요. 그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긍휼함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일이 비단 신흥종교집단에서만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아닙니다.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가 아무리 복음적인 정통교회라 하더라도,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의 목사님이 아무리 성경적인 말씀을 전하신다 하더라도, 단지 내가 인정 받기 위해서 전도를 하고, 단지 내가 인정 받기 위해서 봉사를 할 뿐이고, 내 안에 이웃 사랑이 없고, 내 안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에 대한 진정한 긍휼함과 도움의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내 신앙이 주님 앞에 올바로 서 있는지 다시 한 번 점검을 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으로부터 탕감을 받은 종을 그의 동료들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도 주님께서 분명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あわれみ深い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あわれみを受けるからです。”

우리 모두,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마음에 품고, 우리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예수님께서 모두 다 갚아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감사하면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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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