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7회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 7 - 화(和)
2020년 3월 29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マタイの福音書 5章9
“平和をつくる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神の子どもと呼ばれるからです。”

한국어 동영상
https://youtu.be/ykz_SJ3KWQs

일본어 동영상
https://youtu.be/Z6ilQaop-po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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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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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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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 主が望まれる人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는 일곱 번째 시간으로서 <화평하게 하는 자>(平和をつくる者)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보에는 한자 한 글자. 화평할 때의 ‘화(和)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인생인가 하는 질문을 누군가가 던진다면 여러분께서는 뭐라고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자신이 10대 20대라면 어떠한 삶을, 어떠한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싶을 것이며, 자신이 어른이라고 한다면,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어떠한 삶을 살아가라고 조언을 하시겠습니까.

이제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내가 사업을 해서 큰 돈을 벌어보겠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교수나 공직자가 되어 보겠다. 아니면 스포츠 선수가 되어 보겠다. 연예계에 진출해서 세계적인 스타가 되어 보겠다……등등 많을 꿈을 꿀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가 있다면 이런 사람이 되어보아라, 저런 삶을 살아보아라 하고 조언을 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삶을 살아보겠다” 또는 “너는 어떤 삶을 살아보아라”라고 하는 그 선택지 중에 “네 이웃과 사이 좋게 지내는 삶을 산다”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까.

“내 평생의 삶의 목표는 내 이웃과 사이 좋게 지내는 것입니다.” “내 자녀는 이웃과 사이 좋게 지내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을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뭐, 나쁠 건 없지만, 그래도 뭐 소년이여 큰 뜻을 품어라……라는 말도 있지 않나. 한 번 사는 인생, 좀 큰 꿈을 가져봐야지. 혹시 그렇게 생각이 안 드시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平和をつくる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神の子どもと呼ばれるからです。

이 말씀을 보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아니, 단순히 오늘 본문 말씀이 흥미롭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다름아닌 이 말씀이 위치한 부분이 흥미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 내용으로만 보자면 어쩌면 좀 흔한 말씀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굳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이웃간에 서로 사이 좋게 지내라……라고 하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는 말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은 팔복 중에서 일곱 번째에 있습니다. 팔복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한 시험, 하늘나라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팔차 시험이라고 말씀 드려 왔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7차 시험, 이 시험만 합격하면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최종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정말 대단하고 수준 높은 문제가 나와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문제지를 딱 펼쳐보니까 “사이 좋게 지내시오”예요.

어찌 보면 김이 빠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여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으로, 흔히 십자가 계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중요성은 모두가 다 알고 있지요. 하지만 문제는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사랑이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이웃 사랑이다……만약 이렇게 알고 계시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9절 전반부(中盤)에 보시면 “둘째도 그와 같으니”(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와 같으니” 라고 하는 말씀은 바로 앞 38절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37절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38절에서는 이 계명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重要な第一の戒め)이라고 하시면서 39절에는 둘째도 그와 같다(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고 하시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는 쉽게 말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닌,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만큼 크고 중요한 계명이라는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어느 쪽이 위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중요합니다. 40절에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 즉 성경말씀의 핵심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냐 하면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약을 읽다 보면 바리새인들이 무슨 악역처럼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사실 바리새인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가르침인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큰 오해였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누가복음 18장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0절~14절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0절~14절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二人の人が祈るために宮に上って行った。一人はパリサイ人で、もう一人は取税人であった。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 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私は週に二度断食し、自分が得ているすべてのものから、十分の一を献げております。』
一方、取税人は遠く離れて立ち、目を天に向けようともせず、自分の胸をたたいて言った。『神様、罪人の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が、義と認められて家に帰ったのは、あのパリサイ人ではなく、この人です。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のです。」

이 말씀에 보시면 등장인물은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가장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반면에 세리라고 하는 사람들은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의 앞잡이로서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합법적으로 돈을 뜯어내는 그야말로 죄인의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기도를 본다면 여러 종류의 기도가 있겠으나,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를 꼽으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감사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이것을 주시옵소서 저것을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드리는 기도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바리새인은 바로 지금 그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토색, 불의, 간음을 하고 있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합니다. 이를 쉬운 말로 본다면 자신은 욕심을 많이 부리거나 남을 속이거나 바람을 피우거나 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드립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얼핏 내용을 보면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정직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까. 거기다가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을 한대요. 십일조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바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모범적인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바리새인의 모습을 본받으라고 우리에게 하신 것일까요?

누가복음 18장 9절에는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自分は正しいと確信していて、ほかの人々を見下している人たちに、イエスはこのようなたとえを話された。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을 가리켜서, 믿음이 좋고 본받을만하다고 하신 것이 아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으로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말씀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 같으신가요?

오늘 이 말씀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먼저 11절~12절만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12절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 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私は週に二度断食し、自分が得ているすべてのものから、十分の一を献げております。』

11절에 에 의하면 그는 따로 서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것이 아니라,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합니다.

바리새인이 굳이 서서 기도를 드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싶어서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바리새인에 대한 또다른 말씀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5절
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また、祈るとき偽善者たちのようであっ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人々に見えるように、会堂や大通りの角に立 って祈るのが好きだ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彼らはすでに自分の報いを受けているのです。

바리새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드렸습니다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 시간에 바깥에 있을 때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 시간을 지키기 위해 바깥에서도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아, 저 사람은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이야. 저렇게 바깥에 있을 때에도 저렇게 시간에 맞춰서 기도를 드린다니 정말 대단하네.

자,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제 그들은 기도 시간만 되면 일이 없어도 바깥에 나갑니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 거리 한 가운데에서 남들한테 다 들리도록 소리를 내어서 기도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지요.

그리고 여기서 기도 내용을 보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 드린다고 합니다. 즉 이는 지금 세리한테 들으라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그냥 뒤에 갖다 붙였을 뿐입니다. 그는 지금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대놓고 자기를 높이면서 세리를 비난하고 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좋게 보실 리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 14절 후반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のです。」

여러분, 자기를 높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상대적인 의미이지요. 즉, 자기를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사람을 낮추는 방법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정치인들이 하는 선거를 보십시오. 자기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면서 반드시 빠지지 않고 하는 말이 다른 경쟁 후보들을 낮춥니다. 비판을 합니다. 비난을 합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한번 자전거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전거는 앞바퀴와 뒷바퀴가 있지요. 앞바퀴는 하나님 사랑이고 뒷바퀴는 이웃사랑이라고 생각해본다면,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직분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는 말하자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통해서 수 백 만원, 수 천 만원 짜리 앞바퀴를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 생활 속에서 이웃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반 자전거에 앞바퀴만 달려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앞바퀴가 비싼 것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배 노를 젓는데 한쪽만 노를 저어보세요. 아무리 있는 힘껏 노를 저어도 그 자리만 뱅글뱅글 돌 뿐입니다. 양쪽에 프로펠러가 달린 비행기인데 한쪽만 돌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수 백 만원, 수 천 만원 하는 비행기면 뭘 합니까. 아무리 비싼 엔진이라 하더라도 한쪽만 돌아간다면 이 또한 역시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 뿐이고 이륙은커녕 조금도 앞으로 갈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런데 비싼 바퀴가 아니에요. 아직 좋은 자전거 바퀴를 살만한 시간이 부족해서 만원 짜리 바퀴밖에 못 샀어요. 하지만 부족한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앞바퀴와 뒷바퀴를 간신히 마련할 수가 있었어요. 그러면 수 천만원은 하는 금빛으로 번쩍이는 앞바퀴만 있는 자전거보다도 만원짜리밖에 안 되는 앞뒤 바퀴 달린 자전거가 훨씬 빠른 속도로 달려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마태복음 19장 30절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しかし、先にいる多くの者が後になり、後にいる多くの者が先になります。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 보면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말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기면 행정명령에 벌금까지도 부과하겠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서 얼마 전부터 대부분의 많은 교회들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아니면 가정에서 별도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일부 교회에서는 몇 백 명 몇 천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주일에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수요예배도 드린다고 해요. 그래서 얼마 전 한국 뉴스를 보니까 그 예배에 참석하시는 어느 교인분에게 인터뷰를 했습니다. 지금 나라에서 집회를 금지하고 있는데 왜 교회에 나가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래요. 자기는 믿음이 있다. 이것이 내 믿음이다. 그래서 아무리 금지를 해도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린다……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 인터뷰를 마치고 이 기자는 이제 교회 주변에서 가게를 하는 분들에게 인터뷰를 합니다. 지금 이렇게 코로나 확산이 우려되고 있는 상황인데 저기 교회에서 예배를 한다고 하는데 어떠시냐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뭐라고 하시겠어요. 다들 불안하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좋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확진자가 늘어나고, 잘못해서 자신들도 감염이 되지나 않을까 불안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처럼 정부가 집회 금지를 하고 이웃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를 무시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입니까.

그러면 이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지요.

마가복음 16장 17절~18절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信じる人々には次のようなしるしが伴います。すなわち、わたしの名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新しいことばで語り、
その手で蛇をつかみ、たとえ毒を飲んでも決して害を受けず、病人に手を置けば癒やされます。」

이 말씀을 지금 이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 맞습니까. 이 말씀은 선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내용입니다. 지금 나라에서 집회를 금지하고 있는 이유가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한 것인가요?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든 믿음을 지켜야 하겠지만, 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이웃이 불안해하는데도 이를 무시한 채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겠냐 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을 도외시한 하나님 사랑은 그것 자체가 뒷바퀴 없는 자전거요, 한쪽 날개가 부러진 비행기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6장 39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イエスはまた、彼らに一つのたとえを話された。「盲人が盲人を案内できるでしょうか。二人とも穴に落ち込まないでしょうか。

베드로후서 3장 15절~16절
15.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また、私たちの主の忍耐は救いであると考えなさい。愛する、私たちの兄弟パウロも、自分に与えられた知恵にしたがって、あなたがたに書き送ったとおりです。
その手紙でパウロは、ほかのすべての手紙でもしているように、このことについて語っています。その中には理解 しにくいところがあります。無知な、心の定まらない人たちは、聖書の他の箇所と同様、それらを曲解して、自分自身に滅びを招きます。

이처럼 성경말씀을 제대로 풀지 못하고 그릇된 인도자가 서게 된다면 자기만이 아니라 성도들 모두가 구덩이에 빠져서 멸망하게 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자신의 수입에서 십분의 일을 십일조를 드리라고 합니다. 이는 구약에도 있고 신약에서 마태복음 23장 23절과 누가복음 11장 42절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를 바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マラキ書3章10節

十分の一をことごとく、宝物倉 に携えて来て、わたしの家の食物とせよ。こうしてわたしを試してみよ。──万軍の主は言われる──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天の窓を開き、あふれるばかりの祝福をあなたがたに注ぐかどうか。


라고까지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는 십일조를 드리고 싶은데, 내 남편이, 내 아내가 십일조를 바치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를 합니다. 아니면 또 더 쉬운 예로, 뭐 요즘 같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시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또는 내 가족이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는 것을 강하게 반대해요. 그냥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너 교회에 나가고 싶으면 나를 밟고 가라……뭐 이런 식으로 반대를 합니다. 내가 교회에 나가는 것으로, 내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으로 인해서 가정의 화목이 깨지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번. 그래도 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온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매주 교회에 나가고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2번. 가족의 화목을 위해 교회에 나가거나 십일조 드리는 것을 잠시 보류한다.

이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라고 하겠습니다만, 굳이 선택을 하라고 하면 저는 2번이라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성경을 좀 읽으신 분은 다음 구절을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38절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わたしよりも父や母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よりも息子や娘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い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을 누가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바로 신흥종교집단들이 좋아합니다. 너희 가족들이 반대를 하건 뭘 하건, 지금 있는 재산을 다 팔고 직장도 학교도 그만 두고 다 나한테 바쳐라. 나한테만 충성하라. 그게 진정한 믿음이다……그러면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러면 집안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 부모나 가족의 생활 전체가 엉망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모든 생활을 포기하고 이와 같은 신흥종교집단에 빠져서 가출을 한 자기 자녀들을 찾아 다니는 부모님이나 가족분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자신의 가족이나 이웃에게 불안감이나 고통을 안겨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눈물이나 슬픔을 안겨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생각에 있어서 우리 삶 속에서 그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족들이 반대한다고 신앙을 버리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족이 반대해서 잠시 교회에 못 나오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말씀과 기도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平和をつくる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神の子どもと呼ばれるからです。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혹시 이런 생각 드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예수님 뿐이 아닐까. 우리도 그럼 예수님이 된다는 말씀일까 하는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しかし、この方を受け入れた人々、すなわち、その名を信じた人々には、神の子どもとなる特権をお与えになった。


로마서 8장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神は、あらかじめ知っている人たちを、御子のかたちと同じ姿にあらかじめ定められたのです。それは、多くの兄弟たちの中で御子が長子となるためです。

디도서 3장 6절~7절
“6.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テトスへの手紙 3章6節~7節
神はこの聖霊を、私たちの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に豊かに注いでくださったのです。
それは、私たちがキリストの恵み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永遠のいのちの望みを抱く相続人となるためでした。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부활의 날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께서는 맏아들이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를 삼아 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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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