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7회 유혹과 은혜 4
2020년 6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절~2절 신약 4페이지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マタイの福音書 4章 1節~2節
“それからイエスは、悪魔の試みを受けるために、御霊に導かれて荒野に上って行かれた。そして四十日四十夜、断食をし、その後で空腹を覚えられた。”

한국어 동영상
https://youtu.be/f9kwFyiODUw

일본어 동영상
https://youtu.be/-dH29Onoslo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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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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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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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지난 주에 이어서 “유혹과 은혜 ” 誘惑と恵み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는 마지막 네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주까지 세 번에 걸쳐서 예수님께서 시험을 당하신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여기서 잠깐만, 우리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문제라기 보다는 여러분의 생각을 좀 여쭈어보고자 합니다. 이 성경구절을 잘 알고 계셨던 분들도 어쩌면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을 해보지 않은 부분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오늘이 좋은 기회 아니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가셔서 시험을 받으시면 됐잖아요. 그런데 40일간이나 금식을 하셨다고 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께 질문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40일 동안이나 금식을 하셨을까요.

1번. 예수님께서는 이제 3년 동안 공생애를 하신 후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엄청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사역과 십자가까지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40일 금식을 하셨다.

2번 기타.


물론 제가 내드리는 문제의 선택지 중에서 <기타>가 있으면 그게 정답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번 문제에 대해서는 1번이 그럼 정말 틀렸다……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꽤 많은 신학자들이 이처럼 이해를 하기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공생애를 앞두시고 40일 동안이나 금식을 하시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이런 말씀, 이상하게 느껴지시나요? 아니요.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점에 대해서 잠시 멈추어 서서, 조금 더 생각해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이나 금식을 하셨을까. 이 문제를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는 대원칙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대략 3년 정도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만, 이 기간은 그리 길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한 상황이 아니었고,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모든 여정을 대부분 두 발로 걸어 다니셨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기간 동안 시간 낭비는 전혀 없었다고 해야 하겠지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기간 동안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까지 하신 것이 아니라, 이 짧은 기간 동안에 반드시 꼭 필요하신 사역만 하셨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의 40일 금식도 그냥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했던 과정이라고 이해를 하여야만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공생애를 앞둔 간절한 기도였다……라고 하면 좋겠습니다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이에 대해서 기도를 드렸다……라고 하는 구절이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모든 내용들이 100% 다 나와 있다면 문제가 안 되겠으나, 항상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구체적으로 언급이 안 된 부분은,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짐작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중요한 일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금식을 해야 하나요? 예를 들어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금식을 하셨으니까 이제 신학교를 졸업하고 주님의 일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40일 금식부터 시작하여야 하나요?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예전 시간에 언급을 했던 에스더서의 기록을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스더서 4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먼저 에스더 4장 11절에서 에스더는 자신을 키워준 모르드게에게 말합니다.


에스더 4장 11절
“11.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エステル記 4章11節
「王の家臣たちも王の諸州の民も、だれでも知っているように、召されないのに奥の中庭 に入って王のところに行く者は、男でも女でも死刑に処せられるという法令があります。ただし、王がその人に金の笏(しゃく)を差し伸ばせば、その人は生きながらえます。私はこの 三十日間、まだ王のところへ行くようにと召されていません。」

그리고 에스더 4장 15절~16절
“15.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16.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エステルはモルデカイに返事を送って言った。
「行って、スサにいるユダヤ人をみな集め、私のために断食してください。三日三晩 、食べたり飲んだりしないようにしてください。私も私の侍女たちも、同じように断食します。そのようにしたうえで、法令に背くことですが、私は王のところへ参ります。私は、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したら死にます。」

숙적 하만이 자신의 민족 유다인들을 모두 죽이려고 하는 계획을 알아내고 이를 막기 위해 한 가지 각오를 합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왕에게 직언을 해야 하는데 당시의 왕실 규율에 의하면 왕이 부르지 않으면 아무리 왕비라 하더라도 함부로 왕에게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왕은 30일 동안이나 에스더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면 무슨 사람을 시킨다거나 아니면 카톡이라도 보내서, 잘 지내시냐고 안부라도 묻거나, 아니면 조금 더 공격적으로 요즘 왜 나한테 무관심하시냐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당시에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안부를 묻기는커녕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도 왕 앞에 나갔을 때, 왕이 가지고 있는 규를 내밀면 왕 앞에 나오는 것을 허락했다는 뜻이기에 생명을 보존할 수는 있지만, 만약에 왕이 이를 괘씸하게 여겨서, 아니,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감히 어디를 얼쩡거려! 라고 한다면, 아무리 왕비라 하더라도 목숨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민족이 멸망하게 생겼는데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죽음을 무릅쓰고 왕 앞에 나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금식을 해달라고 당부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어떻습니까. 지금 공생애를 막 시작하시려는 순간입니다.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3년 정도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께 있어서도 이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공생애를 마치시고 이제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인하여 체포되기 직전에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하십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를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드디어 고난의 시작이 다가왔습니다. 너무나도 괴로우셨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37절~38절
“37.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そして、ペテロとゼベダイの子二人を一緒に連れて行かれたが、イエスは悲しみもだえ始められた。
そのとき、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わたしは悲しみのあまり死ぬほどです。ここにいて、わたしと一緒に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

이 장면은 당시 에스더가 괴로워했던 장면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의 예수님 상황과 비교해본다면 비슷하다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조금 더 다른 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왜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을 하셨을까.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괜히 복잡하게 신학자들의 추측이나 주장이나 학설을 다루는 것이 아닌, 단순하게 오로지 성경 기록만을 보면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논리학에는 이른바 인과관계라는 말이 있지요. 인과관계라고 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 이를 줄여서 인과관계라고 합니다.

이 인과관계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A라고 하는 일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B라는 일이 일어났어요. 이 두 사건이 서로 별개이고 서로 연관된 것이 없이 일어난 일이라면 인과관계는 없다는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A가 일어났기 때문에 B가 일어났다고 이해하게 된다면 A라고 하는 원인 때문에 B라고 하는 결과가 발생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이는 서로간에 원인과 결과의 관계, 즉 인과관계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를 조금 더 생각해 본다면 A가 일어났기 때문에 B가 일어났다는 뜻은, 이를 뒤집어 본다면 A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B도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공식을 오늘 말씀에 대입을 시켜보면 어떻게 되냐 하면, 오늘 이 성경에도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A는 예수님께서 광야에 가시고는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B는 예수님께서 사탄에 의해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하셨기 때문에 사탄에 의해 시험을 받으셨다는 말이 됩니다. 이를 뒤집어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40일 금식을 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사탄에 의해 시험을 당하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라고 하는 뜻이 되는 것이죠.

이는 단순히 제 상상이 아니라, 이를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디에 가셨는데 거기에 마귀가 있었어요. 그러면 거기 있는 마귀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합니까.

마태복음 8장 29절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すると見よ、彼らが叫んだ。「神の子よ、私たちと何の関係があるのですか。まだその時ではないのに、もう私たちを苦しめに来たのですか。」


마가복음 1장 24절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ナザレの人イエスよ、私たちと何の関係があるのですか。私たちを滅ぼしに来たのですか。私はあなたがどなたなのか知っています。神の聖者です。」

여러분, 이건 지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한 말이 아닙니다. 마귀들이 예수님을 보고 한 말인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무슨 마귀들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귀들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마귀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거룩한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 사탄들은 예수님 앞에서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이 평소에는 예수님 앞에서 전혀 손을 쓸 수 없었던 마귀 사탄이 어떻게 해서 광야에서는 감히 대담하게도 예수님을 시험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누구는 주장합니다. 당시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는 사탄의 우두머리인 루시퍼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절절 맸던 마귀들은 졸개들이지만 사탄의 우두머리인 루시퍼 정도 되면 예수님까지도 시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에요.

여러분도 혹시 루시퍼라고 하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자, 오늘 두 번째 문제 나갑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마귀의 우두머리 이름이 루시퍼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없다?


간단하게 말씀 드립니다. 없습니다. 보통 사탄에 대한 언급이라고 한다면 이사야 14장 12절을 많이 듭니다.

이사야 14장 12절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明けの明星、暁の子よ。どうしておまえは天から落ちたのか。国々を打ち破った者よ。どうしておまえは地に切り倒されたのか。

여기서 이 “계명성”이라고 하는 것이 금성을 말합니다. 이 구절이 타락천사, 즉 사탄을 뜻한다고 하는데, 영어 성경 중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영어 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NIV에서는 이를 morning star, NASB는 star of morning, 이를 직역하면 “아침의 별”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유독 KJV에서만 이 계명성을 “Lucifer”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를 가지고 마귀의 이름이 루시퍼라고 한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적지 않은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예를 들어서 성경에 보면 많은 천사들이 등장하는데, 거기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천사들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이름이 나오는 천사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 이름은 두 개 뿐입니다. 하나는 천사장 미가엘이요, 또 하나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가브리엘입니다. 그런데 이 두 천사 이름이 등장할 때에는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상당히 구체적으로 이름을 언급합니다.


유다서 1장 9절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ユダの手紙 1章9節
御使いのかしらミカエルは、モーセのからだについて悪魔と論 じて言い争ったとき、ののしってさばきを宣言することはあえてせず、むしろ「主がおまえをとがめてくださるように」と言いました。

누가복음 1장 19절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御使いは彼に答えた。「この私は神の前に立つガブリエルです。あなたに話をし、この良い知らせを伝えるために遣わされたのです。

이처럼 구체적으로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귀 우두머리의 기록이 있다고 한다면 이도 역시 구체적으로 있어야 할 텐데, 영어 번역서 중 하나인 KJV나 라틴어 성경인 벌게이트역 ウルガータ訳 등 일부 번역서에 적힌 막연한 단어인 루시퍼라는 말을 가지고 이를 마귀의 우두머리 이름이라고 한다는 것은 이는 너무나도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 보 양보를 해서, 사실 이는 백 보가 아니라 단 한 발자국도 양보를 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굳이 백 보 양보를 해서,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 사탄이 마귀의 우두머리였다고 치고, 마귀의 우두머리쯤 되면 예수님을 시험할 수 있다 라고 한다면, 이 말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가끔 단어 때문에 혼란을 겪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과 악령. 이 둘은 대등하게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얼핏 보기에는 성령과 악령,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성령은 좋은 쪽, 악령은 나쁜 쪽, 이렇게 대등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크나큰 잘못입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삼위일체 교리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 성령님은 성령 하나님, 이것이 삼위일체 아니겠습니까. 즉,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도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아무리 천사장 미가엘이나, 제아무리 마귀 사탄의 우두머리라 하더라도 이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와 같은 피조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이 두 관계는 절대로 대등할 수 없는,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절대로 뒤바뀔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와 같이 절대로 넘볼 수 없는 창조주와 피조물인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마귀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마귀 사탄의 시험을 결과 B라고 한다면, 여기에 대한 원인 A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40일 금식이었던 것입니다.

저도 영화에서 가끔 40일 금식을 마친 예수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습니까. 제가 본 영화에서는 40일 금식을 마치신 예수님의 모습은, 여전히 멀쩡했습니다.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이 아주 건강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요?


여러분, 광야라고 하는 데가 어떤 곳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이 먹을만한 것은 고사하고 마실 물조차 없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애굽을 탈출해서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맨날 하나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했던 것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우리한테 먹을 것이 없다, 마실 물이 없다. 그러면서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걸어도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조차 없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40일 동안이나 계셨습니다. 거기에 누군가가 지어놓은 허름한 집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광야라고 하는 곳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허름한 초가집 같은 것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겠어요. 그야말로 바깥에서 노숙을 하셨을 것입니다. 만약에 숲 속이라면 그늘이라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광야에는 제대로 된 나무들도 없습니다. 그냥 햇빛이 내리쬐는 허허벌판에서 지내시면서 밤에는 그곳에서 주무셨을 것입니다.

40일 동안 식사는 물론이고 물 한 먹음도 못 마셨습니다. 그 동안 편안한 잠자리에서 주무시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전혀 괴롭지 않았어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100%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모두 똑같이 느끼셨습니다.

40일 금식이 끝난 예수님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40일 동안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시고, 잠도 편안하게 못 주무시고, 당연히 옷도 갈아입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온몸에서 체력은 완전히 고갈되고,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걷는 것조차 힘에 겨우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계속 입고 계셨던 옷은 지저분해지다 못해 여기저기가 찢어져서 너덜너덜해졌을 것이고, 얼굴은 입술이 부르트고,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마귀들이 나타납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悪魔に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

베드로전서 5장 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身を慎み、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敵である悪魔が、吼えたける獅子のように、だれかを食い尽くそうと探し回っています。

마귀들은 우리들의 틈을 노리고 우는 사자와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명기 28장 7절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主は、あなたに向かい立つ敵どもをあなたの前で敗走させる。彼らは一つの道からあなたを攻めて来るが、あなたの前で七つの道に逃げ去る。

우리에게 틈이 없다면 마귀들은 감히 덤벼들지 못합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우리가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며 소망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마귀 사탄과 맞선다면, 하나님께서 마귀들을 물리쳐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원수들이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의사 선생님들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건강하면 병에 걸렸다가도 자연히 낫는대요. 그리고 사람들마다 병균이 몸 속에 있다고 하는데, 건강하면 증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가 체력이 떨어지고 저항력이 약해지면 그 동안 가만히 있던 이 나쁜 병균들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결국 병에 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굳건하고 영육간에 건강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약해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평소 때에는 꼼짝도 못하던 마귀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보십시오. 평소에는 많은 제자들을 데리고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그럴 때에는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이 손도 못 대더니, 체포를 하고 나서 이제 자기들한테 유리하다고 판단되니까 이제 사람들이 예수님을 때리고 침을 뱉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채찍으로 때리고는 십자가에 매달기까지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게 다 마귀 짓이지 무엇입니까. 이처럼 마귀 사탄들은 상대방이 약할 때를 노려서 집요하게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예수님께서도 분명이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인과관계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굳이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신 이유는, 이로 인해서 영적으로 마귀 사탄에게 틈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마귀로 하여금 시험을 하도록 허락하셨다고 이해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이런 의문이 생기겠지요. 그래. 좋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이유가 마귀 사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시험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래서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여기서 잠깐 영화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가 뭐 그렇게 영화에 대해서 조예가 깊거나, 남들에 비해서 많이 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같은 세대 다른 사람들보다 좀 적게 본 축에 속하지 않나 합니다.

그런데 작년엔가에 본 영화가 있는데, 마지막 부분에 보면 왕과 왕의 호위무사, 그리고 배신자가 등장합니다만, 먼저 배신자와 호위무사가 싸움을 합니다. 왕의 호위무사니까 얼마나 칼 싸움을 잘하겠어요. 그래서 이 배신자를 수세에 몰지만, 막판에 이 배신자가 큰 칼 손잡이에 숨겨놨던 작은 칼을 뽑아서 이 호위무사를 공격합니다.

설마 그런 무기가 있다고는 예상을 못했던 호위무사는 어깨에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되는데, 그 다친 몸을 끌고 간신히 왕이 있는 곳까지 와서는 결국 거기서 쓰러집니다.

거기까지 추격해왔던 배신자와 왕이 이제 칼로 겨루게 되는데, 이 왕의 칼 솜씨가 대단합니다. 그래서 이 배신자가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왕한테도 수세에 몰리게 되는데, 역시 그 때 또다시 이 배신자가 자신의 큰 칼 손잡이에 숨겨놨던 비밀무기, 작은 칼을 뽑아 들고는 기습적으로 왕을 찌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왕이 그 기습공격을 피한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호위무사가 왜 여기까지 왔겠느냐.

호위무사가 심각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힘을 다해서 왕에게 왔던 이유는, 다름이 아닌 자신이 입은 그 상처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본 왕은, 배신자가 어떤 작전을 쓰는지를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그 기습공격을 미리 예측하고 피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제가 40일 금식을 한 분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힘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래도 그 분은 물을 마시면서, 그리고 잠자리도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주무셨을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마실 물도 없고 침대는 고사하고 마땅한 이불조차 없는 광야 허허벌판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셨다면 얼마나 힘이 드셨겠습니까.

그토록 힘이 드셨음에도 불구하고 금식을 했던 이유가 마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당하시기 위함이셨다고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단 하나, 마귀가 어떤 유혹으로 사람들을 넘어뜨리려고 하는지, 그 마귀의 수법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마귀의 수법이 무엇이었습니까. 세속적인 방법에 의한 재물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여기서 세속적이라고 하는 뜻을 보다 알기 쉽게 말씀 드리자면 “하나님 생각이 아닌 내 생각”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5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그러나 뱀의 모습을 한 마귀 사탄은 유혹을 합니다.


창세기 3장 4절~5절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すると、蛇は女に言った。「あなたがたは決して死にません。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어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떠셨습니까.

세속적인 재물에 대한 유혹, 명예에 대한 유혹, 그리고 권력에 대한 유혹까지를 모두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그토록 힘들게 40일 금식을 하셨던 이유가, 바로 이 마귀 사탄이 유혹하는 궤계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였다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이 사실이 얼마나 은혜로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애초에 말씀 제목을 “유혹과 은혜”로 붙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작전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아차린 마귀는 어쩌면 자신의 작전이 노출되었다고 땅을 치고 통곡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을까요? 아니요. 아마도 마귀는 땅을 치고 통곡을 하다가 문득 씨익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 걱정 없다는 것입니다. 괜찮다는 거예요. 아무리 들통났다 하더라도, 아무리 많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수법이 알려졌다 하더라도, 충분히 사람들을 유혹할 수 있다, 나는 자신 있다, 라고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짐작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을 보십시오. 성경에 이처럼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남들보다도 성경을 훨씬 더 많이 안다고 하는 신앙인이나 교회 지도자들조차도 잘못된 재물과 명예와 권력의 유혹에 의해 얼마나 많이 넘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합니다.

로마서 8장 5절~6절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に従う者は肉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 마귀 사탄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은 분명히 다릅니다. 육의 생각, 사탄이 주는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 주님이 주시는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오직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생각을 따르고, 주님의 능력으로 마귀 사탄을 물리침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승리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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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