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회 이슬과 거듭남
2020년 6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1절~3절 신약 62페이지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マルコの福音書6章1節~3節
“イエスはそこを去って郷里に行かれた。弟子たちもついて行った。安息日になって、イエスは会堂で教え始められた。それを聞いた多くの人々は驚いて言った。「この人は、こういうことをどこから得たのだろう。この人に与えられた知恵や、その手で行われるこのような 力あるわざは、いったい何なのだろう。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その妹たちも、ここで私たちと一緒 にいるではないか。」こうして彼らはイエスにつまずいた。”

한국어 동영상
https://youtu.be/zThCYL_J-ec

일본어 동영상
https://youtu.be/AbEQUH_4GFE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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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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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슬과 거듭남” 露と生まれ変わ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여기 저기를 다니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시기도 하고, 천국 복음을 말씀해주시기도 하고, 병자들을 고쳐주시기도 하고, 그리고 폭풍 가운데에서 파도를 잠재우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면 이제 예수님은 이제 고향을 방문하십니다. 이는 그렇다고 무슨 명절날에 귀성을 하셨다거나 하는 것이 아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하시는 과정에서 방문을 하셨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이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본래 그곳에 살고 있던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 2장 4절에 의하면 나사렛에 살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때 호적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는데, 말하자면 주민등록신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우리 식으로 본다면 멀리 떨어진 본적지로 가서 주민신고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계보에 의하면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야곱의 후손 중에서 유다 지파에 속하게 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누가복음 2장을 한 번 살펴볼까요?


누가복음 2장 1절~7절

1.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そのころ、全世界の住民登録をせよという勅令が、皇帝アウグストゥスから出た。
これは、キリニウスがシリアの総督であったときの、最初の住民登録であった。
人々はみな登録のために、それぞれ自分の町に帰って行った。
ヨセフも、ダビデの家に属し、その血筋であったので、ガリラヤの町ナザレから、ユダヤのベツレヘムというダビデの町へ上って行った。
身重になっていた、いいなずけの妻マリアとともに登録するためであった。
ところが、彼らがそこにいる間に、マリアは月が満ちて、
男子の初子を産んだ。そして、その子を布にくるんで飼葉桶に寝かせた。宿屋には彼らのいる場所がなかったからである。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곳은 창세기에서부터 나오는 대단히 오래된 지역입니다. 여기에는 야곱의 아내 중 한 명인 라헬이 묻힌 곳이기도 합니다만, 성경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가뭄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버리고 이방 지역으로 갔다가 남편도 잃고 아들 둘마저도 잃어버린 나오미. 이제 그 집안은 누가 보더라도 망한 집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갈 곳도 없고 의지할 사람조차 없습니다. 둘 있던 며느리 중 하나는 떠나 보내고, 또 한 며느리인 룻도 떠나가라고 하는데 끝까지 안 갑니다.

요즘 사회에서는 그래도 여성의 역할이 많이 늘어가고는 있습니다만, 당시는 여자 둘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굶어 죽느니 우리가 한 번은 버렸던 고향으로 돌아가자 하고 돌아간 곳이 바로 베들레헴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보신 여러분께서는 잘 아시겠지만, 그 곳에서 룻이 보아스(ボアズ)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오벳(オベデ)이고, 오벳 아들이 이새(エッサイ)이고, 이새 아들이 바로 다윗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한편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은 유다 지파 그것도 다윗의 계보에 속한 자손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본적지가 베들레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그의 약혼녀 마리아는 베들레헴까지 와서 주민등록을 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그 거리가 얼마나 되냐 하면 지도상으로 보면 직선거리로 150킬로가 넘는 거리라고 합니다. 성인 남성이 걷는 속도가 시속 4킬로 정도라고 하니, 단순계산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를 쉬지 않고 4킬로로 걸었다고 하더라도 40시간 정도, 거의 이틀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하지만 사람이 이틀 동안 걷기만 하나요? 식사도 해야지요, 잠도 자야 합니다. 하루에 부지런히 10시간을 걸었다고 하더라도 40킬로, 그렇다면 대략 4일 정도 걸리는 거리라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어디 그 뿐인가요? 당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이었지만 이미 성령님의 능력으로 만삭이었습니다. 출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으니 그 여정은 아마도 4일보다 더 길고도 그리고 힘든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마침 도착을 했는데 그 때는 이스라엘 전체가 이 호적 하는 사람을 때문에 이동인구가 많았을 때였을 테니, 베들레헴에 도착을 했는데 여관이 없었나 봅니다. 그런데 또 하필이면 마리아한테 진통이 왔어요.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마리아도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간신히 출산을 하게 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는 당연히 본래 집이 아닙니다. 어서 호적을 마치고는 아이를 데리고 또다시 나사렛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만, 이미 구세주가 태어났다는 소식이 널리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멀리서 동방박사들이 와서 경배를 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당시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헤롯 왕에게까지 전해지게 됩니다.

이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 자신의 권력이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한 헤롯은 두 살 밑의 아기들을 모두 죽이라고 하는 무서운 명령을 내립니다.

마태복음 2장 13절 이하에 보면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천사가 나타나서 요셉에게 말하기를 어서 애굽으로 피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 몇 년 동안 지내고 있었더니 헤롯 왕이 죽게 되자 다시 돌아와서 본래 살던 나사렛으로 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이지만, 거기서는 태어나시기만 하셨고, 잠시 애굽으로 몇 년 갔다가 어린 나이에 본래 요셉과 마리아가 살던 나사렛으로 돌아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실질적인 고향은 나사렛이라고 할 수 있고,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뜻으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저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태어난 곳은 경기도 광주입니다만, 거기서는 아마 1년 정도 있었다가 서울로 올라오고, 거기서 7살 정도까지 살다가 일본으로 건너와서 동경에서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살았으니까 뭐 고향은 동경, 특히 초등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11년은 도쿄타워 있는 곳에 살았으니까 거기가 제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집도 좁았는데, 그 좁은 집에서 어떻게 셋이 그렇게 오랫동안 살 수 있었는지 참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자, 그러면 이 예수님께서 살았던 나사렛,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삼으셨을 정도이니까 꽤 대단한 곳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베들레헴은 구약 그것도 창세기부터 등장하는 대단히 유서 깊은 동네인데 반해, 나사렛은 어떠냐 하면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나사렛’이라고 하는 지역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곳이 마태복음 2장 23절입니다. 구약에서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이 나사렛이라고 하는 동네가, 역사는 그리 깊지 않지만 그래도 꽤 잘 사는 곳이었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46절을 보시면 예수님을 만났던 빌립(ピリポ)이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나다나엘(ナタナエル)과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46절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ピリポはナタナエルを見つけて言った。「私たちは、モーセが律法の中に書き、預言者たちも書いている方に会いました。ナザレの人で、ヨセフの子イエスです。」
ナタナエルは彼に言った。「ナザレから何か良いものが出るだろうか。」ピリポは言った。「来て、見なさい。」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역설합니다. 우리가 모세의 율법과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야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나사렛 예수야.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뭐라고 합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라고 개역개정에는 되어 있습니다만,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훌륭한 인물이 나올 수 있겠느냐?”

어떠세요? 대단히 직설적이지 않습니까. 이 말은 단순히 무슨 지역감정이다 뭐다가 아니라, 그 지역은 정말 볼 것이 없는 동네, 한국에도 뭐 그런 곳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지명을 말씀 드리면 좀 그렇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전통적으로 깡패들 출신이 많은 동네, 뭐 그런 것으로 유명한 동네라고 한다면, 하필이면 거기서, 예를 서울 뭐 강남이라거나, 아니면 적어도 사대문 안이라면 모를까, 저 지방 시골 촌구석에서 무슨 대단한 인물이 나오겠어? 말하자면 이러고 있는 것이지요. 그 정도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지역, 바로 그 곳이 나사렛이었던 것입니다.


자, 배경설명이 조금 길었습니다만, 이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난 다음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1절~3절
“1.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イエスはそこを去って郷里に行かれた。弟子たちもついて行った。
安息日になって、イエスは会堂で教え始められた。それを聞いた多くの人々は驚いて言った。「この人は、こういうことをどこから得たのだろう。この人に与えられた知恵や、その手で行われるこのような 力あるわざは、いったい何なのだろう。
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その妹たちも、ここで私たちと一緒 にいるではないか。」こうして彼らはイエスにつまずいた。

안식일에 사람들이 회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지금은 각 교회마다 목사님이 계셔서, 그 목사님이 예배시간에 성경말씀을 전하고 그렇습니다만, 당시에는 회당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회당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회당장이 직접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랍비라고 하는 선생을 지명해서 말씀을 전하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고향에 들어가셨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교회 목사님들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듣고도 많은 은혜를 받는데,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은혜가 되었겠습니까. 정말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쳐났던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또한 꼭 그렇지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때요? 감동을 했나요? 넘치는 기쁨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고 그랬나요?

오늘 본문 중에서 마가복음 6장 2절 후반부부터 3절까지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2절 중반부~3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それを聞いた多くの人々は驚いて言った。「この人は、こういうことをどこから得たのだろう。この人に与えられた知恵や、その手で行われるこのような力 あるわざは、いったい何なのだろう。
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その妹たちも、ここで私たちと一緒 にいるではないか。」こうして彼らはイエスにつまずいた。

그 놀라운 말씀을 듣고 감사로 받아들이면 될 텐데, 이 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3장 23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의 30세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까, 아마도 인간적으로 보아서 당시에는 그 자리에 예수님보다도 연배가 많은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입니다.


야아, 말씀 정말 놀랍고 은혜로운데……그리고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어쩌면 그 자리에서 병자들도 고치고 그러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참으로 놀라운 그 광경을 보고 이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냐 하면,

어? 잠깐, 지금 저 친구 거 마리아의 아들 목수였던 애잖아? 쟤네 집안은 잘 알지. 쟤 동생이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잖아. 그리고 누이들도 아직까지 우리 동네에 같이 살잖아. 아니, 그런데 쟤가 조금 못 보던 사이에 어디서 저렇게 성경을 공부했대? 어쭈, 그래도 말하는 것 보니까 공부 좀 꽤 했나 본데? ……아이구 웃기고 있네. ㅎㅎ

뭐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예수님께서 놀랍고도 은혜로운 말씀을 하신다 해도 이미 마음에 장벽을 쌓아 놓아버렸으니 그 말씀이 전혀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영접을 했었더라면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을 수도 있을 텐데,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그것을 거부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말씀. 어떠십니까. 그냥 뭐, 그런가 보다……정도이신가요?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적지 않게 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 지역에 어려서부터 자라고, 그리고 그 동네가 그리 큰 지역도 아니라고 한다면, 서로 집안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 형제 이름까지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참고로 말이 나온 김에 부연설명을 드리자면, 가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신성시하기 위해서 마리아를 영원한 동정녀, 영원한 처녀라고 해서, 여기에 나와 있는 형제를 친형제가 아니라 사촌 형제다, 아니면 이복형제다, 뭐 이런 주장까지 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마리아가 하나님의 부인이다, 마리아에게 기도를 하면 우리의 기도를 도와준다, 하물며 마리아가 나중에 예수님처럼 승천을 했다, 뭐 이런 주장까지 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그야말로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소설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은 주장이 왜 나오냐 하면, 예를 들어서 우리 개신교에서는 무엇보다도 성경의 권위를 유일하고도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 전혀 모순이 없는, 전혀 오류가 없는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목사님이나 아무리 유명한 신학교 교수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한다 하더라도, 그 말씀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맞는 내용이라면 받아 들이지만, 아무리 유명한 사람,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 아무리 말씀을 잘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경에 적힌 내용과 다르다면 이는 우리가 받아 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신앙의 기준이 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성경과 교회의 권위, 쉽게 말하자면 신부나 교황의 권위를 동등하게 다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적혀 있지 않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권위 있는 신부나 교황이 말을 하면, 그 내용이 성경만큼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영향으로 우리도 모르게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마리아가 나쁜 여성이었을 리는 없겠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과정으로 마리아를 통하게 하셨을 정도이니 믿음이나 성품도 좋은 여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낳으실 때에는 요셉과 결혼을 하기 전이었으나, 예수님을 출산하신 뒤에는 요셉과 결혼을 하고, 둘 사이에 자녀를 두었다 하더라도 이는 전혀 흠이 될 것이 없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야말로 좋은 아내에 좋은 어머니, 이상적인 여성이었을 것이라고 상상이 됩니다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참고로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이름에 보면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대체적으로 신학자들은 이 중에서 야고보가 성경 야고보서를 쓰고, 유다가 성경 유다서를 쓴 저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생들도 비록 육신으로는 자신의 형이지만, 신앙적으로는 그리스도 메시야로서 믿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나사렛 사람들, 이와 같이 서로의 집안 사정에 대해서 그토록 자세히 알고 있었다면, 그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어려서부터 봐왔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나요?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누구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 우리와 똑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셨는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아들로 인정을 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가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예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わたしは敵意を、おまえと女の間に、おまえの子孫と女の子孫の間に置く。彼はおまえの頭を打ち、おまえは彼のかかとを打つ。」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は自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呼ぶ。

마리아는 요셉과 동거를 하기 전에 이미 잉태를 했었고, 이 사실은 천사가 각각 요셉과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미리 알려주었던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족보상으로 본다면 요셉의 아들이지만 유전자적으로 본다면 요셉의 피는 섞여 있지 않고, 전무후무하게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나게 되신 것입니다.

미가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ベツレヘム・エフラテよ、あなたはユダの氏族の中で、あまりにも小さい。だが、あなたからわたしのためにイスラエルを治める者が出る。その出現は昔から、永遠の昔から定まっている。」

성경에서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출생한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 사실을 하늘의 별로 인해서 알아낸 박사들이 멀리 동방에서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었습니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와 함께 율법에 따라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는데 거기서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32절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そのとき、エルサレムにシメオンという人がいた。この人は正しい、敬虔な人で、イスラエルが慰められるのを待ち望んでいた。また、聖霊が彼の上におられた。
そして、主のキリストを見るまでは決して死を見ることはないと、聖霊によって告げられていた。
シメオンが御霊に導かれて宮に入ると、律法の慣習を守るために、両親が幼子イエスを連れて入って来た。
シメオンは幼子を腕に抱き、神をほめたたえて言った。
「主よ。今こそあなたは、おことばどおり、しもべを安らかに去らせてくださいます。
私の目があなたの御救いを見たからです。
あなたが万民の前に備えられた救いを。
異邦人を照らす啓示の光、御民イスラエルの栄光を。」

이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제 좀 쉬고 싶은데 자신이 그리스도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고 해요.

그래서 이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그저 메시야 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아기 예수를 보고 이 분이 메시야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보고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또한 같은 누가복음 2장 후반부에 보면 열두 살 된 예수님께서 율법 선생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 선생들이 예수님의 지혜에 놀랍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한참 전부터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그 말씀이 너무나도 은혜롭고 지혜롭고 놀라워요. 그러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때야만 자연스럽겠습니까.

와아, 그래. 내가 일찍부터 알아봤어. 어렸을 때부터 보통이 아니었다니까. 얼마나 똑똑했는지 몰라. 그래야 되지 않겠어요?

보통 이런 작은 동네라면, 지금도 그렇습니다. 공부를 조금 잘해도 금방 소문이 나고, 운동을 잘 해도 소문이 납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프로야구나 프로축구선수가 갑자기 그렇게 잘했겠어요? 다 어려서부터 자기 동네 지역에서는 소문이 자자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선수들을 어렸을 때부터 알았던 사람들은, 그래, 정말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참 잘했었다. 나중에는 프로가 될 줄 알았다……뭐, 이런 말을 대부분 듣고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조금 특별합니다. 그와 같이 놀라운 말씀을 보고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고는, 나중에는 결국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이 사실을 두고 당시 나사렛 사람을 비판할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만, 여기서 핵심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비판이 아니라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저는 당시 나사렛 사람들에 대해서 좀 동정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인 문제였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온 동방박사로부터 메시야 탄생 소식을 들은 헤롯 왕은, 그 막연한 정보만 가지고도 당시 베들레헴 지역에 사는 갓난아기들을 모조리 다 죽여버릴 정도로 권력에 대해서는 탐욕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권력에 대한 집착은 비단 헤롯 왕만이 아니라 모든 권력자들이 다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주변에서 조금이라도 내 권력을 위협할만한 세력이 있다고 눈치를 채면 곧바로 이를 짓밟아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경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이 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사무엘상 20장 31절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エッサイの子がこの地上に生きているかぎり、おまえも、おまえの王位も確立されないのだ。今、人を遣わして、あれを私のところに連 れて来い。あれは死に値する。」

사울은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자가 다윗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를 잡으려고 쫓아다녔습니다.

그와 같은 시대인데, 괜히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메시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소문이 퍼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은 한시도 평온한 생활을 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오기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정말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고향 사람 나사렛 사람들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지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일까요?

저는 사실 이 말씀을 보면서 다른 쪽으로 은혜를 더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고, 예정된 때를 기다리기 위해 그 동안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 채로 조용히 살아오시고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서 비로소 자신을 나타내시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구세주도 아닌 우리의 인생은 어떨까요.

오래 전부터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어갔습니다. 수많은 나라들이 탄생하고 멸망했습니다. 태정태세문단세, 한국도 그렇고 일본이나 여러 나라들을 보아도 수많은 왕들과 지도자들이 태어나고 사라져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꿈을 펼치려고 했었겠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쩌면 자신은 그렇게 큰 뜻을 품어보긴 했으나, 결국 아무도 모르게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가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그야말로 이슬과 같은 삶을 살다 가지 않았을까.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는 남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이 또한 이슬처럼 잊혀지고 말지 않았을까.

호세아 13장 3절
“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それゆえ、彼らは朝もやのように、朝早く消え去る露のようになる。打ち場から吹き散らされる籾殻のように、また、穴から出る煙のようになる。

자기들은 좋은 삶,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주장할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의미 없는 삶, 금새 잊혀지는 삶을 살다가 가는 것은 아닐까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 세상에서의 인생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 예수님을 영접했느냐, 안 했는냐, 예수님과 동행하느냐, 동행하지 않느냐,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이 차이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편 73편 20절
“20.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目覚めの夢のように 主よ あなたが目を覚ますとき 彼らの姿を蔑(さげす)まれます。


만약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가셨다고 한다면 이는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인생,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는 인생, 예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지 못하는 인생은 그가 이 땅에서 아무리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침 구름 같이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은 것이요, 잠에서 깬 다음에는 사라지는 꿈과도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의 삶은 성경에 거의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청소년기, 청년기를 어떻게 보내셨는지, 20대에는 무엇을 하시면서 보내셨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시작하셨을 때부터 비로소 성경은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 주목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메시야로서 본연의 삶을 펼치시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모세가 들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바로 지팡이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팡이가 갖는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4장을 보시겠습니다.

먼저 출애굽기 4장 2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主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が手に持っているものは何か。」彼は答えた。「杖です。」

출애굽기 4장 17절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また、あなたはこの杖を手に取り、これでしるしを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

출애굽기 4장 20절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そこでモーセは妻や息子たちを連れ、彼らをろばに乗せて、エジプトの地へ帰って行った。モーセは神の杖を手に取った。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부터 자기 지팡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전혀 매끌매끌하지도 않은 투박한 지팡이, 언제나 모세가 가지고 있었던 평범한 지팡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게 되자, 그 때부터 성경이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투박한, 여전히 평범한 지팡이처럼 보이지만 이제 그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어제까지의 삶은 어떠셨습니까. 아니, 방금 전까지의 삶은 어떠셨습니까. 불만족스러우십니까. 아쉬움이 많습니까. 후회가 됩니까. 아니면 너무나도 평범합니까. 부끄러운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성경이, 하나님이 나를 주목하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괜찮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넉넉하지 않습니까. 배경이 보잘 것 없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작은 동네 나사렛에서 자라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예수님과 동행하십시오. 예수님으로부터 쓰임 받으시기를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가 거듭나는 것,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아무런 의미 없는 삶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거듭난 삶,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주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이슬과 같은 허무한 삶이 아니라, 진정으로 거듭난 삶,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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