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부활의 기쁨
2016년 3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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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편 103편 1절~5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부활절을 맞이해서 ‘부활의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여러분께 한 가지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기쁨을 맛보고 계십니까?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계십니까? 아니, 그 보다도, 부활의 기쁨이 무엇인지 와닿습니까.
저는 여러분께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습니다. 제가 어제 목욕에 다녀왔을 때의 일입니다. 물속에 들어가서 오늘 드릴 설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말씀 주제는 당연히 부활절 예배이니까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연히 주제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머리 속에서 성경책을 펼치고 그 주제에 맞는 구절들을 추려갑니다. 그리고 이것과 저것과 그것……서론 본론 결론……이렇게 설교 흐름을 잡았습니다. 그럼 이제 된 것입니다. 그 흐름대로 말씀을 이어가고 비어있는 곳을 메우면 됩니다. 설교를 쓰는 시간은 길어봤자 3시간 정도면 됩니다. 그렇다고 3시간만 생각하는 건 아니죠. 무슨 제가 베드로나 바울도 아닌데 설교가 그렇게 빨리빨리 나오나요. 일주일 동안 내내 틈만 나면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문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제도 여느때처럼 물속에 들어가서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도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제가 무슨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나요? 예, 그렇습니다. 부활절 설교말씀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발생한 심각한 문제라는 것은 바로, 저 자신한테 부활의 기쁨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활의 기쁨이 없어요. 느껴지질 않는 것입니다. 전혀 와닿지가 않아요. 그래서 아, 설교가 잘 못된 것 같구나. 다시 한 번 짜보자 하고, 다시 말씀을 묵상하고 구절를 추리고 서론 본론 결론……이렇게 생각을 해갑니다. 이건 자화자찬이지만, 설교 내용만으로 보면 완벽합니다. 전혀 문제가 없어요.

“여러분! 예수 십자가가 내 십자가, 예수 부활이 내 부활인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
“항상 부활의 기쁨으로 충만한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뭐 이러면 되는 것 아니에요? 그런 게 부활절 설교잖아요? 목욕탕 물속에 들어가서 거짓말 안 하고 완벽한 설교 두 회분을 짰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뭘해요? 저 자신한테 감동이 없는데 두 회분이 아니라 수 백편을 짠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오죽하면 저한테 이런 마음이 들더라구요. 요즘 제가 가는 온천 목욕탕의 노천탕 물이 얼마 전부터 좀 미지근해요. 노천탕의 묘미가 특히 날씨가 쌀쌀한 날에 들어가 있으면, 머리는 차갑고 몸은 따끈따끈한 게 묘미잖아요? 그런데 그 날 같은 경우에는 날씨도 쌀쌀한데 물까지 미지근하니까 뜨거운 물속에 들어가 있는데 추워요. 그게 저만 그런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다 미지근하다고 하면서 나가더라구요. 그래서 그 때는 사람도 많았는데 노천탕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안쪽에만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 저한테 든 생각이 뭐냐 하면, 부활의 기쁨은 고사하고 저 노천탕 물이라도 좀 따뜻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노천탕은 몸은 따뜻하더라도 머리는 시원하니까 꽤 오랫동안 들어가 있을 수 있어서 아주 목욕을 푹 할 수 있는데, 안쪽에 있는 물은 따뜻하지만, 물밖에 나와 있는 머리까지도 따뜻하니까 오래 못 들어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부활의 기쁨? 죽었다 살아나면 기쁠까? 아니, 그것보다도 저 바깥에 물이라도 좀 더 뜨거웠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나서 이제 물속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몸을 씻으려고 수도도 있고 거울도 있고 하는 자리에 앉으려고 했는데, 이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날은 한산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심하게 붐비는 날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제 물속에서 나와서 비누칠도 하고 머리도 감으려고 자리에 앉았었는데, 마침 제 바로 옆에 사람이 앉아요. 아니, 다른 데에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하필이면 몸집이 큰 제 바로 옆에 앉을 게 뭐예요? 그리고 거기서 샤워를 틀어놓고 비누칠도 하고 머리도 감고 하니까, 저한테까지 비누도 튀고 물도 튀고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다른 자리로 옮기려고 둘러봤는데, 빈 자리가 있어도 천상 다른 사람 바로 옆자리 밖에 없어요. 뭐, 그렇다고 제가 옆에 앉은 사람한테 뭐라 하겠어요? 그렇다고 설마 그 사람이 저한테 일부러 불을 끼얹거나 비누를 튀게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가만히 보니까 나름 조심한다고 하면서 하더라구요. 하지만 그래도 바로 옆에서 하고 있는데, 물이 전혀 알 튈 리는 없습니다.
그러고 있는 제가 한 생각이 뭐겠어요? 부활의 기쁨? 아니, 부활의 기쁨은 됐고 이 옆사람이나 빨리 하고 나갔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구요.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밥을 먹으려고 식당에 들어가는데, 제가 성격이 좀 유별 나서, 밥 먹을 때 쩝쩝 거리면서 심하게 소리를 내면서 드시는 분을 보면 밥을 잘 못 먹습니다. 이것도 다 제가 모자란 탓이죠. 그런데 꼭 그런 분 치고 제 자리 근처에 앉아서 식사를 하십니다. 그러면 아…어서 드시고 나가주셨으면……하는데, 어때요? 그런 분치고 빨리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천천히 쩝쩝 드시고 나가십니다. 제가 그 날 목욕을 할 때에도. 좀 어서 하시고 나가시면 좋을 것을, 머리는 왜 그리도 자주 감으시는지, 머리를 두 번 감고, 비누칠을 한 번 하고……그리고 다시 또 머리를 감더라구요. 그것 참 난감하더라구요. 빨리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제가 머리를 감아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리고 저 자신도 불편합니다. 아니, 그 사람이 씻으면 튀는 물이, 그럼 내가 씻는다고 그 사람한테 물이 안 튀겠어요? 그러다보니 저도 당연히 편안하게 목욕도 못하고 그렇습니다. 제가 이렇게 보니까 두 번 머리를 감고, 한 번 비누칠을 하고, 다시 한 번 머리를 감고는, 이제 나가겠지……하니까, 이제 타올을 빨고 꼭 짠 다음에 몸의 물기를 닦기 시작합니다. 아니, 몸의 물기를 닦으려면 저기 나가서 하면 얼마나 좋아요? 괜히 여기저기서 물이 튈 염려도 없고, 앉은 상태에서 닦는 것보다 서서 닦으면 더 닦이도 편할텐데. 그런데도 제 옆에 앉아서 몸을 구석구석 꼼꼼하게 닦습니다. 그러고는 드디어 그 분이 일어나 나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아이고, 할렐루야. 기도 응답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했는데, 근데, 잠깐. 이거 지금 부활의 기쁨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하고 다시 거울을 보고 샤워를 틀고 머리를 감았습니다. 그런데 머리에 샴푸를 하고 다시 샤워를 틀고서는 비눗물을 씻어내고 옆자리를 보았습니다. 어땠겠어요? 거기 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기도 응답을 받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또다시 시련이 닥쳐오다니요.
이런 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까 추려놓았던 성경구절은 제 머리속에서 다 사라지고는, 문득 요나서가 떠올랐습니다.

요나 4장 5절~8절을 살펴봅니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ヨナは町から出て、町の東の方にすわり、そこに自分で仮小屋を作り、町の中で何が起こるかを見きわめようと、その陰の下にすわっていた。
神である主は一本のとうごまを備え、それをヨナの上をおおうように生えさせ、彼の頭の上の陰として、ヨナの不きげんを直そうとされた。ヨナはこのとうごまを非常に 喜んだ。
しかし、神は、翌日の夜明けに、一匹の虫を備えられた。虫がそのとうごまをかんだので、とうごまは枯れた。
太陽が上ったとき、神は焼けつくような東風を備えられた。太陽がヨナの頭に照りつけたので、彼は衰え果て、自分の死を願って言った。「私は生きているより死んだほうがましだ。」

아마도 무더운 날이 아니었나 합니다. 요나가 초막을 지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지붕에 박넝쿨을 예비하시고 뜨거운 햇빛을 가리게 하시니까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쁘했대요.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셔서 그 박넝쿨을 갉아먹겠 하니까 그 박넝쿨이 시들었고, 또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이 뜨거운 바람을 불게 하셨다고 합니다. 요나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어제까지 뜨거운 햇쌀을 가려주었던 박넝쿨은 사라져서 햇살은 뜨겁고, 그것만이 아니라 후덥지근한 바람까지 불어옵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 요나가 뭐라고 합니까?

요나 4장 8절 후반부에 보니까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彼は衰え果て、自分の死を願って言った。「私は生きているより死んだほうがましだ。」

여러분, 성경을 보면 요나가 초막을 지을 때에는 박넝쿨이 없었어요. 거기에 초막을 지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박넝쿨을 주셨어요. 그랬더니 세상에, 크게 기뻐했대요. 그러니까 뭐예요? 박넝쿨이 없으면 죽는 곳에 초막을 지었나요? 아니요. 햇살이 강하지만 죽을 곳에 짓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선물로 박넝쿨을 주신 거예요. 그런데 그게 없어졌다고 이제 나 죽겠다고 하나님한테 성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드세요? 부활의 기쁨은 고사하고 목욕탕 물이 좀 더 뜨거웠으면 좋겠다, 물이 튀니까 옆에 앉은 사람이 빨리 좀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 홍목사나, 지붕에 박넝쿨이 원래는 없었는데 그거 하나 생겼다고 무척 좋아했었는데, 또 그게 없어졌다고 나 죽겠다면서 난리 치는 요나 선지자나...이런 모습을 보면 그래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저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정말 소중한 것을 잊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2006년에 7년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몇 푼 안 되는 돈만 가지고서 다시 서울로 돌아갔을 때 하숙생활을 시작했었습니다. 하지만 에어컨이 없었어요. 그래서 여름에는 정말 푹푹 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꽤 괜찮았습니다. 얼마 후 그 하숙집을 다시 짓는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나가게 되었어요. 그리고 간 곳이 고시원이었습니다. 보통 고시원이라고 하면 매우 좁습니다만 거기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가게 됐는데, 일반 고시원보다 조금 더 넓은 편이었어요. 에어컨도 공용이었는데, 바람이 들어오긴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창문이 없어요. 그게 참 아쉬웠습니다. 방은 그래도 하숙집보다 넓긴 해도 창문이 없으니까 답답했습니다. 그래도 거기에 1년 이상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돈을 모아서 이제 드디어 원룸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거긴 에어컨도 있고요, 큰 창문도 있었습니다. 저는 방에 창문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인지 몰랐습니다. 아직도 제가 기억에 남습니다만, 이사하는 첫날, 그 햇살이 들이치는 창문이 너무나 좋아요. 그리고 에어컨이 너무나 좋아요. 그래서 첫날에는 이불도 펴지도 않고 에어켠을 켜놓고 벽에 기댄 채로 황홀하게 잠을 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창문이 얼마나 좋았는지 거기서 사는 2년 동안 커튼을 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좋은 창문이 있는데 왜 커튼으로 가릴 필요가 있겠어요.
너무 좋아요. 수입도 늘어납니다. 생활도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조금 더 넓은 집으로 가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이사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안 좋아집니다. 수입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제 예금잔고가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게 됩니다. 하나님, 이게 웬 일입니까. 고민도 하고 기도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응답도 없고 막막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저를 버리신 건가요? 하나님이 요나한테 선물로 준 박넝쿨을 시들게 만들었던 것은 하나님이 요나를 버리셨기 때문인가요?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애굽에 팔린 것이 하나님이 요셉을 버렸기 때문인가요?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이끌어내신 것이 이스라엘 민족들을 버리셨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팔려감으로 인하여 약관 서른 살에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로 나옴으로 인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는 요셉이 장차 몇 년 뒤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리라 한 사실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장차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점령하게 된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부활의 기쁨? 그게 뭐지? 부활 같은 것은 됐으니까 지금 당장 돈 몇 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제가 그 마음을 모르겠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보시기에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이것저것 문제가 많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제가 원룸 방에 있는 창문 하나 가지고 2년 동안 기뻐서 커튼을 안 달고 살았는데, 지금 저희 가족이 살고 있는 이 곳에 창문이 몇 개 있는 줄 아세요? 세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무척이나 많습니다.
그 뿐인가요? 제가 동경에서 저희 가족이 살 때에는 참 집이 좁았습니다. 일본에서 사는 12년 동안 제가 문을 닫고 들어갈 개인방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하면, 집안에 가족이 어디 있는지 찾느라고 전화를 걸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가 안정이 되면 여기 교회에 있는 방들은 구역사무실로도 쓰이고 주일학교나 성가대 연습실로 쓰거나 하겠고, 저희 가족은 나가서 살게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토록 넓은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희 가족이 언제 그런 기도를 해본적이 있나요? 이런 넓은 집을 달라고 한 적이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 언제는 정말 응답을 안 하실 때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넉넉하게 채워주시면 좋으련만 안 주세요.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난해서 안 주세요? 아니요. 온 천하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무엇이 부족해서 안 주시겠어요. 그러나 때가 차서 하나님이 주실때에는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7장 9절~11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あなたがたも、自分の子がパンを下さいと言うときに、だれが石を与えるでしょう。
また、子が魚を下さいと言うのに、だれが蛇を与えるでしょう。
してみると、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は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には良い物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とすれば、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が、どうして、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下さらないことがありましょう。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가장 큰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16절에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モーセが荒野で蛇を上げたように、人の子もまた上げ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れは、信じる者がみな、人の子にあって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す。」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ひとり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사람은 죄악 속에서 허덕이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고 자신의 죄 때문에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고 죄악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지만,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실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언제 우리가 예수님을 달라고 구했었나요? 언제 우리 죄를 씻기 위해서 하나님한테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달라고 기도했었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몰랐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죄 속에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냥 대충 절기를 지키고, 짐승으로 제사나 지내면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가장 아끼는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는데, 사랑하는 우리를 죄 속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를 건져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나무에 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있을 때를 생각해봅니다. 지나고 보면 그 때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사소한 것에 목숨걸고 화도 내고 성질도 부리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대충대충 살자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그때그때 고민해야 할 것은 있죠. 하지만 세상 일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있으면서 그렇게 작은 일에 일희일비 하든 안 하든 지금 생각해보면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큰 것으로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시편 103편 1절에서 5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わがたましいよ。主(しゅ)をほめたたえよ。私(わたし)のうちにあるすべてのものよ。聖(せい)なる御名(みな)をほめたたえよ。
わがたましいよ。主をほめたたえよ。主の良くしてくださったことを何一つ忘れるな。
主は、あなたのすべての咎を赦し、あなたのすべての病をいやし、
あなたのいのちを穴から贖(あがな)い、あなたに、恵みとあわれみとの冠(かんむり)をかぶらせ、
あなたの一生を良いもので満たされる。あなたの若さは、わしのように、新しくなる。

하나님께서 주신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부활한 후의 일을 생각해봅니다. 지금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아, 정말 지금 당장 돈 백만원이 있었으면 좋겠다. 돈 천만원이 있었으면 좋겠다. 저 꼴보기 싫은 인간은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좀더 넓은 집으로 이사가고 싶다. 아, 내가 열 살만 젊었으면 좋겠다, 목욕탕에서 내 옆에 앉은 사람이 빨리 나갔으면 좋겠다……뭐 그런 여러가지 소망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활의 기쁨을 알고난 다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선물은 우리가 받기에도 너무나도 감사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장차 받게 될 선물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선물들입니다. 우리한테 그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고, 부활까지도 주셨는데 무엇을 못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유가 적절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를 들어 세발 자전거를 타는 사람과 대형승용차를 타는 사람의 그릇이 같아서야 되겠어요? 대형승용차를 탄 내가 빨간 신호등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세발 자전거가 나를 추월해 갑니다. 그럼 내가 그걸 보고 자존심 상해야겠어요? 저걸 그냥 확 추월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어야겠습니까? 사람이 체통을 지켜야죠. 그럴 때는 그저 허허…… 하고 넘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형승용차라 하더라도 무슨 BMW나 벤츠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최고급 대형승용차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도착지에는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뒤에 따라오는 세발 자전거가 추월한다고 자존심이 상하거나, 빵빵 거린다고 신경질을 내서 되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는 들리지 않고 손에는 잡히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고,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우리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우리 청춘이 독수리 같이 새롭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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