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우리의 소망
2016년 4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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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의 소망’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봉독해드린 말씀인 이사야서 53장 5절 말씀. 기억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지난 고난주간 때의 말씀 중 일부입니다. 그 때는 53장 3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만, 오늘은 특별히 이 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오늘은 원래 다른 말씀으로 준비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제가 생각했던 말씀이 아닌 바로 이 말씀이 자꾸 와닿습니다. 설교 말씀의 출발점이 자꾸 이 말씀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비록 몇 주 전에 살펴본 말씀이긴 합니다만 오늘은 이 5절 말씀을 집중적으로 살펴볼까 합니다. 사실 성경말씀이 그렇습니다. 다른 책도 그렇겠습니다만, 특히 성경말씀은 똑같은 구절이라도 읽을 때마다 다른 감동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한 번 이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말로는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나, 또는 지금은 소망이 있다고 믿지만, 어떨 때는 소망이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거나 하지 않습니까. 아, 나 정말 소망이 없어. 희망도 없어. 오직 절망 뿐이야.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이렇게도 일이 안 풀릴 수가 있어? 아이구 내 팔자야.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길래. 혹시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알베르 카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이기도 하고 철학자이며, 44세라는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대단한 사람이죠. 이 사람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방인’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뫼르소라고 하는 사형수입니다만, 그는 이 작품을 통해서 그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사형수라고 합니다. 그 말은 꽤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사형수나 사형수가 아닌 사람이나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래, 빨리 죽거나 늦게 죽거나 모든 사람은 다 사형수이다…….꽤 멋진 말 같지 않나요? 역시 노벨 문학상 수상자 답다, 뭐 그러면서 말이에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사형수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인터넷에서 보았습니다.
우리는 사형수입니까? 만약에 사형수가 아닌 사람들이 자신들보고 “우리도 모두 사형수다”라고 한다는 사실을 진짜 지금 철장 안에 갇힌 사형수가 들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글쎄요. 아마도 비웃지나 않았을까 합니다. “웃기고 있네. 니네들이 뭘 안다고.” 그러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형수와 우리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모두 사형수다”라고 일반 사람들이 말하면 왜 진짜 사형수들은 비웃을까요.
먼저 사형수들은 일반 죄수들과는 다릅니다. 먼저 수감되는 장소인데, 교도소와 구치소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도소는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수감되는 곳이고, 구치소는 형이 확정되지 않은 사람이 수감됩니다. 그러니까 구속이 됐지만 아직 수사가 진행중이거나 재판이 진행중이어서 형이 확정되지 않은 사람은 교도소가 아닌 구치소에 수감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형수는 어디에 수감되냐 하는 게 문제인데, 얼핏 생각해보면 사형 판결이 확정되었으니까 교도소에 수감될 것처럼 생각되는데, 사실은 교도소가 아니라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와 함께 구치소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징역형이 확정되고 교도소에 있는 사람, 예를 들어서 징역 1년이라고 한다면 1년 동안 징역생활을 하면서 죄값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교도소에 있는 것인데, 사형수는 교도소에 가서 아무리 일을 해봤자 죄값이 치러지지는 아니라, 죄값을 치르는 방법이 오직 사형집행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방송에서 일본 교도관 출신인 분이 나와서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그 때까지 제가 알고 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많아서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모든 수감자들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사형수들은 교도관들의 발자국 소리에 매우 예민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자국소리만 들으면 누구누구의 발자국 소리인지 정확하게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생소한 발자국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조금 인원이 많다. 그리고 그 발자국 소리가 어느 사형수가 수감된 방 앞에 멈춰섰다. 그러면 그건 100% 그날 집행된다는 것입니다. 방문을 잠군 열쇠가 철컹하고 열리고, 교도관이 여럿이 방안에 들어오면 벌써 눈치를 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묻는다고 합니다. “집행입니까.” 그러면 교도관은 “응, 그래, 자, 빨리, 준비해.”라고 합니다. 이렇게 여럿이 가는 이유는 형 집행 사실을 알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사형수들은 일반 사람들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뿐 아니라 교도소에 수감되어서 징역을 살고 있는 죄수들과도 다릅니다. 그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징역 몇 년이라고 한다면 그 기간만 채우면 밖에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지내면 그 형기의 1/3를 지낸 후 가석방 대상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징역 5년이라고 한다면 교도소에서 착실하게 생활해서 모범수가 되면, 잘하면 2년 정도로 나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희망입니까. 하지만 사형수한테는 희망이 없습니다. 오로지 그분들 앞에는 사형집행일만 있을 뿐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자신한테 닥쳐올 그 날이 언제인지 알 수도 없고, 그저 하루하루 불안 가운데에서 떨면서 5년을, 10년을 지내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자기 스스로를 사형수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일반 사람들도 그러한테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사형수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사형수의 특징은 희망이 없습니다. 구치소에서 높은 담벼락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이 바로 사형수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희망이 없습니까?
또 어떤 종교인은 이와 비슷한 취지로 우리 모두가 예비 불치병 환자라고 합니다. 이유는 역시 우리 모두가 죽을 때 언젠가는 질병으로 죽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도 역시 멋지다고 생각이 되시나요? 그럴듯 하다고 생각되시나요? 여러분, 환자가 본인을 아니면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것을 보셨나요? 환자라고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만약에 자신이 환자라고 한다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이고, 돌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자기가 무슨 예비 불치병 환자라고요? 그렇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 죽는 날만 기다리는, 저 담벼락 너머에 있는 사형수와 같이 소망도 희망도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32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そこでイエスは、その信じたユダヤ人たちに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ことばにとどまるなら、あなたがたはほんとうにわたしの弟子です。
そして、あなたがたは真理を知り、真理はあなたがたを自由にします。」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キリストは、自由を得させるために、私たちを解放してくださいました。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しっかり立って、またと奴隷 のくびきを負わせられないようにしなさい。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움을 누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많은 사람을 돌보고 희망을 주어야 하는데, 그런 것을 다 팽계치고 아~나는 사형수네, 나는 불치병 환자네~ 하고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そむきの罪のために刺し通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彼の打ち傷によって、私たちはいやされた。

예수님께서 가시관에 찔리고, 가시돋힌 채찍에 찔리고, 십자가에서 손과 발을 못에 박히고, 그것도 모자라서 십자가 위에서 옆구리까지 창으로 찔리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때문이요? 아니요,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예수님 죄악 때문이요? 아니요,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독생자 외아들 예수님께서 모든 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를 받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는 말씀을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우리 한 번 유심히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을 두 가지로 압축하면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우리가 징계라고 하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학생 같으면 정학, 퇴학, 직장인 같으면 휴직, 퇴직, 감봉, 강등, 해임, 파면이라는 식으로 물질적,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그리고 채찍에 맞으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말할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나요? 고통을 겪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징계에 해당하는 물질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고통, 그리고 채찍에 해당하는 육체적인 고통, 그것 외의 고통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고통은 모두 이 범위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뭐라고 기록하십니까.

우리가 평화를 누립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이미 징계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이미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머물러 있어서 되겠습니까.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권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나음을 받아야 하는 것 또한 권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나 이웃이 곤경에 쳐해있을 때 여러분이 노력해서 그 문제를 해결해주었습니다. 아니면 여러분의 자녀나 이웃이 질병을 앓고 있는데 여러분이 어렵게 약을 구해주었거나, 아니면 여러분이 어렵게 치료비를 마련해준 덕분에 질병이 나았어요. 그런데도 여전히 그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차 있고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한다면 여러분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바로 그럴 때 우리는 그 자녀나 이웃이 어떻기를 바라겠습니까. 기뻐하기를 바라겠죠. 감사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18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いつも喜んでいなさい。絶えず祈りなさい。すべての事について、感謝しなさい。これが、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あなたがたに望んでおられることです。

에베소서 5장 20절~21절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いつでも、すべてのことについて、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父なる神に感謝しなさい。キリストを恐れ尊んで、互いに従いなさい。

빌립보서 2장 18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あなたがたも同じように喜んでください。私といっしょに喜んでください。


빌립보서 4장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いつも主にあって喜びなさい。もう一度言います。喜びなさい。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권리가 아닙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더러 괜히 기뻐하라고 하시나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2천년 전에 우리를 대신해서, 나를 대신해서 내가 받을 징계를 받으시고 내가 받을 채찍을 받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받을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고난을 모두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아직도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야 하는 것입니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아마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이고, 홍 목사. 기뻐한다고 지금 내 문제가 해결 돼? 기뻐한다고 병이 나? 기뻐한다고 빚이 해결 돼?”
제가 그 심정을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히브리서를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が、礎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世界中 でこの御名のほかには、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としては、どのような名も、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히브리서 12장 2절~3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イエ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 びのゆえに、はずかし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御座の右に着座されました。
あなたがたは、罪人たちのこのような反抗を忍ばれた方のことを考えなさい。それは、あなたがたの心が元気を失い、疲れ果ててしまわないためです。

우리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이름,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이름인 예수를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광야에서 불뱀한테 물려서 허덕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봅니다.

민수기 21장 8절~9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すると、主はモーセに仰せられた。「あなたは燃える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つけよ。すべてかまれた者は、それを仰ぎ見れば、生きる。」
モーセは一つの青銅の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つけた。もし蛇が人をかんでも、その者が青銅の蛇を仰ぎ見ると、生きた。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15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モーセが荒野で蛇を上げたように、人の子もまた上げ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は、信じる者がみな、人の子にあって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す。」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문제를 이미 해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통에 시름하고 고난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아이고 죽겠네…아이고 내 팔자야…이러고만 있는다면 문제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를 위해서 모든 고통과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평화로 이어지는 길, 나음으로 가는 길을 누군가가 막아선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죠? 그렇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이미 내가 치러야 할 고통, 고난, 문제, 어려움, 이는 모두 예수님이 해결해주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유일한 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를 받음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음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나음을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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