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회 베푸는 위로
2016년 7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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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31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베푸는 위로’ 施す恵み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6월 24일, 영국에서는 역사적인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국의 유럽연합 EU에서 탈퇴할 것이냐 아니면 머물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국민투표가 행해진 것입니다. 이 선거에서 유권자의 72.2%가 투표를 했고 탈퇴하자는 의견이 51.9%를 기록함으로써 1973년에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한 이후 43년만에 유럽에서 벗어나는 이른바 탈유럽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번 선거 결과가 나오기 전에 세계적으로 보면, 이번 선거 결과를 유럽 잔류, 그러니까 영국이 유럽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하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만, 막상 이렇게 말하자면 <유럽탈퇴>라고 하는 결정이 나오니까, 이제 유럽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경제가 난리났습니다. 주식이 하락하고 환율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경제 전문가는 이후 향방을 분석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장 혼란에 빠진 나라는 바로 당사자인 영국입니다.
선거 결과가 나오니까 자신들 영국을 둘러싼 정세가 온통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갑니다. 주식은 떨어지고 영국화폐인 파운드도 폭락합니다.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영국에서 떠나려는 준비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입니다. 그래서 유럽탈퇴에 찬성표를 던졌던 일부 영국인들은 “What have we done?” 우리는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가! 하는 물음과 함께 재투표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를 위한 정부 청원이 밤낮으로 몰려들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언론에서 유럽탈퇴에 찬성을 했던 어떤 유권자의 기사를 올렸는데, 이 사람의 말에 의하면, 상황이 이 지경이 될 줄은 몰랐다, 별다른 생각 없이 찬성했다. 다시 돌이킬 수만 있다면 유럽탈퇴에 반대하겠다.
지난 6월 30일자 동아일보를 보니까 영국에서 최대규모의 자동차생산공장을 운영하던 닛산이 영국에서 철수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되면 순식간에 7000여명의 현지인이 실업자가 되고 만다고 합니다. 닛산 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30대 남성은 “지난 국민투표에서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후회를 하게 되고, 이들의 후회는 이제 유럽탈퇴를 주도한 정치인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이번 결정으로 온 나라가 완전히 쑥대밭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후에 영국이나 한국, 일본, 그리고 세계의 경제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경제전문가들도 분석이 엇갈리는 마당에, 전문가도 아닌 제가 감히 가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번 일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대수롭지 않은 판단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부자와 나사로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인지 아닌지는 언급이 없습니다만, 부자는 이름이 없고 거지는 ‘나사로’라고 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성경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어떤 분은 이 말씀 중에서 중심인물이 <거지 나사로>이고 부자는 그냥 엑스트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은데, 만약에 그렇게 성경을 이해하게 된다면, 단순히 부자는 천국에 가지 못하고,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바로 여기 등장하는 거지 나사로처럼 가난하게 살아야만 한다…고 하는 식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부자는 단순이 돈이 많았기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했던 것이에요? 만약에 이렇게 이해한다면 이는 대단히 잘못된 해석입니다. 여기서의 중심인물,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이 이름없는 <부자>라는 점을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이름이 없는데 왜 하필이면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라고 하는 거지 이름을 말씀하셨을까. 이 부분은 조금 뒤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절에 보니까 이 이름없는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고 합니다. 고은 베옷은 물론이지만 당시 자색, 그러니까 보라색 옷은 고급 옷의 상징이었습니다. 그처럼 이 부자는 고은 옷을 입고 매일같이 밤낮으로 호화롭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그 대문 앞에 버려진 채로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었다고 기록됩니다. 여기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 집에서 버려지는 쓰레기를 뒤지면서 그것을 먹고 살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2절 보겠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さて、この貧乏人は死んで、御使いたちによってアブラハムのふところに連れて行かれた。金持ちも死んで葬られた。

자, 이제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날마다 고급 옷을 입고 즐길 정도의 부자였는데 그 장례식은 얼마나 거창했겠습니까.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장례식은커녕 어쩌면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사람들이 몰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죽어간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기고, 부자는 불구덩이에 빠져서 너무나도 크나큰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부자가 본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23절~24절을 봅니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その金持ちは、ハデスで苦しみながら目を上げると、アブラハムが、はるかかなたに見えた。しかも、そのふところにラザロが見えた。彼は叫 んで言った。『父アブラハムさま。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ラザロが指先を水に浸して私の舌を冷 やすように、ラザロをよこしてください。私はこの炎の中で、苦しくてたまりません。』

그 불타는 지옥에서 시달리다가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니까, 다름아닌 그 자기 집앞에 있던 거지, 요즘말로 하자면 부랑자가 아브라함 품에 안겨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고 부자가 하는 말이 뭐라고 하지요? 이 부자의 말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바로 이 말 속에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가 들어있습니다.

24절에는,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彼は叫んで言った。『父アブラハムさま。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ラザロが指先を水に浸して私の舌を冷 やすように、ラザロをよこしてください。私はこの炎の中で、苦しくてたまりません。』

여기서 부자는 아브라함한테 뭐라고 했던가요? 아브라함 품에 안긴 거지를 보내달라고 했나요? 아니면 부랑자를 보내달라고 했나요. 아닙니다. 부자는 분명히 “나사로를 보내어”라고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이 부분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굳이 중심인물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사로>라는 이름을 붙이셨는지도 모릅니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이 부자는 <나사로>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 이 부자는 나사로를 보았을 때 그저 자기 집 앞에 가끔 왔다갔다 하는 부랑자 정도로만 알았던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에 누구한테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 막상 그렇다면 누구한테 도움을 주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길 가는 아무한테나 무턱대고 도움을 주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이 부자는 자신의 집앞에서 서성이는 부랑자가 있고, 그리고 그의 이름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20절~21절을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ところが、その門前にラザロという全身おできの貧乏人が寝ていて、金持ちの食卓から落ちる物で腹を満たしたいと思っていた。犬もやって来 ては、彼のおできをなめていた。

성경에 보면 그 나사로라고 하는 거지가 헌데 투성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온몸에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19절에 부자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나사로는 부자한테 먹을 것을 달라고 구걸하지는 않았지만, 부자는 나사로의 이름까지도 알 정도로 그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것을 먹으면서 좋은 집에서 호화롭게 살면서도, 나사로에게는 아무런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나사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에는 그 사람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점은, 나사로는 분명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고, 부자는 나사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사로는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계신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24절~25절을 다시 한 번 보면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彼は叫んで言った。『父アブラハムさま。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ラザロが指先を水に浸して私の舌を冷 やすように、ラザロをよこしてください。私はこの炎の中で、苦しくてたまりません。』アブラハムは言った。『子よ。思い出してみなさい。おまえは生きている間、良い物を受け、ラザロは生きている間、悪い物を受けていました。しかし、今ここで彼は慰められ、おまえは苦しみもだえているのです。

이 말씀을,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나사로가 이 땅에 살 때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위로를 받고, 부자는 잘 살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부자가 이런 말을 했을까요. 이제 체면도 자존심도 없습니다. 제발 나사로가 나한테 물을 손가락에 찍어서 달라고 해요……라는 것입니다.
이 부자는 살아있을 때, 이 땅에서 살아갈 때에 얼마든지 나사로를 위로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음식을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를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를 받게 해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옷 한 벌이라도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못해준다면 그를 위해서 기도라도 해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부자는 이 땅에 살아갈 때에 이와 같은 모든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자는 그 어떤 작은 위로도 이 나사로한테 베풀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그 무엇 하나 해준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느 딱 한 순간만 보고 지옥에 떨어뜨리실 정도로 매정하지는 않으십니다.

시편 145편 8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主は情け深く、あわれみ深く、怒るのにおそく、恵みに富んでおられます。

베드로후서 3장 9절에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主は、ある人たちがおそいと思っているように、その約束のことを遅らせておられるのではありません。かえって、あなたがたに対して忍耐深くあられるのであって、ひとりでも 滅びることを望まず、すべての人が悔い改めに進むことを望んでおられるのです。

우리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지 않았다면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 벌써 지옥불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제도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참으셨기 때문에 오늘도 이렇게 무사히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イエス・キリストは、きのうもきょうも、いつまでも、同じです。
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참으시고 계신 것처럼 과거에 이 부자한테도 참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장사되고는 지옥불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과연 부자는 자신이 죽은 다음에 그토록 극심한, 그처럼 극렬한 불구덩이에서 밤이나 낮이나 발버둥을 치면서 고통 당할 것을 알았을까요? 아니요. 몰랐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처럼 벌 받을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루하루 오래 참으시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계시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입니다.
지금 이 지옥불에 떨어진 이름없는 부자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한 번만, 나한테 단 한 번만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나는 그렇게 안 살겠습니다. 나사로 같은 사람을 위로하면서 살겠습니다. 나에게 단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작년 2015년 2월에 본 기사에 의하면 중국에서 재산이 7조원대나 되는 기업 회장이었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당시 경쟁 관계에 있는 8명을 살해하는 등 11개 혐의로 조직원 4명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제 그 사형이 집행되었다고 합니다.
집행되기 전에 그는,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노점이나 작은 가게를 차리고 가족을 돌보고 싶다. 내 야망이 너무 컸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형이 집행이 되기 직전에 집행관이 어깨에 손을 올려놓자 그 사람은 펑펑 울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다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욕심을 부리지 않고 가족을 돌보면서 착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해도 이미 그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나사로로 하여금 자신을 위로하게끔 해달라는 청을 거절했더니, 부자가 아브라함한테 다른 청을 합니다.

27절~28절에는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彼は言った。『父よ。ではお願いです。ラザロを私の父の家に送ってください。私には兄弟が五人ありますが、彼らまでこんな苦しみの場所に来 ることのないように、よく言い聞かせてください。』

지금 아직도 살아 있는 내 형제가 있는데, 거기 내가 가서 증언하겠다는 것입니다. 너희들 그렇게 살면 이렇게 나처럼 지옥에 와서 고생한다고, 그러니까 이웃한테 베풀고 위로하면서 살라고 증언하면 그들이 믿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단호합니다.

29절에서 31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しかしアブラハムは言った。『彼らには、モーセと預言者があります。その言うことを聞くべきです。』彼は言った。『いいえ、父アブラハム。もし、だれかが死んだ者の中から彼らのところに行ってやったら、彼らは悔い改めるに違いありません。』アブラハムは彼に言った。『もしモーセと預言者との教えに耳を傾けないのなら、たといだれかが死人の中から生き返っても、彼らは聞き入れはしない。』」

네가 거기 가서 말하지 않더라도 모세와 선지자가 이미 말을 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부자가 말합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만일 죽어서 고생하는 내가 직접 가서 말하면 그 사람들이 들을 거예요. 라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뭐라고 하죠?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아무리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네가 직접 가서 말을 한다고 해도 소용없다,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와 선지자의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입니다. 이미 성경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숨김없이 기록되었다. 그래도 안 믿는데 네가 가서 말 한다고 믿겠느냐,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데에 너무나도 인색해합니다. 그래도 생색은 내려고 해요. 하지만 성경은 도움을 안 주고 생색만 내는 것도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5절~17절에 보면,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もし、兄弟また姉妹のだれかが、着る物がなく、また、毎日の食べ物にもこと欠いているようなときに、あなたがたのうちだれかが、その人たちに、「安心して行きなさい。暖かになり、十分に食べなさい。」と言っても、もしからだに必要な物を与えないなら、何の役に 立つでしょう。それと同じように、信仰も、もし行ないがなかった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우리의 도움, 우리의 위로에는 그냥 말로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고, 이렇게 추우면 따뜻하게 옷을 입어야지, 이렇게 더우면 좀 시원하게 해야지, 그렇게 배고프면 뭐라도 먹어야지……아니, 그걸 누가 몰라요?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뒷짐 지고 서 있으면서 말로만 위로한다는 것은, 그것은 참된 위로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 사람한테 도움이 되는 위로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매우 부담스러워합니다. 아이구, 이제 누가 나한테 무슨 부탁을 하면 다 들어줘야겠네. 그거 안 들어주면 내가 벌 받을 거 아냐……누구는 이렇게 고민을 하고, 또 누구는, 아 그거 참 좋은 말이네. 이제 목사님이 저렇게 말했으니 교회사람들한테 부탁하면 지옥에 떨어질까봐 아무도 거절하지 않겠다…하고 누구는 씨익 웃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한테 도움을 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여건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 목사님이, 아니면 내 이웃이 예수님이신가요? 그렇다면 그 사람한테 기도하면 내 소원을 들어주시겠지요. 한국이나 미국에서 보면 꼭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해서, 여기저기 교회에 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돈 뜯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도와달라는 거예요. 안 도와주면 벌 받는다는 거예요. 하지만 저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에는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지요. 주님을 의지해야지요. 사람을 의지해서야 되겠어요?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아침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어제 하루를 참아주셨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부자는 자기가 위로를 베풀지 않는 것이 그렇게 심한 벌을 받을 줄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을 위해 위로를 해줄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을 줄 수 있습니다. 당장 입을 옷이 없다면 입을 옷을 줄 수도 있습니다. 나한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면 함께 기도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부자가 단 하루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나사로를 위해서 은혜를 베풀었다면 그토록 괴로운 지옥불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유럽에서 빠져나오겠다는 결정을 내린 영국에서는 재투표 논의가 벌써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이 유럽에서 나오는 것이 좋은지, 안 나오는 것이 좋은지, 그리고 재투표의 기회가 있는는 없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한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사형판결을 받은 중국 대기업 회장한테도 더 이상의 기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아직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정말 이 하루, 한 순간을, 우리 주님을 우리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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