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회 오만과 구원
2016년 7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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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6장 1절~7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만과 구원’ 傲慢と救い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지역을 강타한 지진은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도합 2만명이라는 끔찍한 재앙이 되고, 이는 후에 동일본대지진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어서, 가옥이 무너지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일본 전국에 흩어져서, 여전히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낯설고 물설은 타지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지난달 말 현재 일본 정부 발표에 의하면 아직도 15만 5천명에 다다른다고 합니다. 그와 같은 끔찍한 재난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일본인들의 질서의식입니다. 지진 발생 직후, 생필품은 고사하고 식량과 식수조차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그 상황에서 다른 나라였다면 폭력사태가 일어나거나 하면서 혼란스러워졌을 텐데도 일본인들은 강한 인내심을 갖고 줄을 서고 질서를 지키는 모습이 세계언론을 통해 전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달 6월 26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렀습니다. 일본 후쿠히 현 후쿠이 시에 있는 한 여고에서 10년 전부터 “사랑의 우산”이라는 활동을 해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게 뭔가 하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7년 여름에 갑자기 내린 비 때문에 우산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서 흠뻑 비를 맞은 어떤 나이 드신 분의 모습을 본 이 여고에 다니는 학생이 아이디어를 내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이 학교 학생회가 주도해서, 그 인근 역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우산을 놓자. 그렇게 해서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면 그 우산을 이용하도록 하고, 그리고 다음 날에 그 우산을 제자 리에 돌려놓게 하자. 이런 취지로 초기에 200개의 우산을 가져다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개월이 지났습니다. 우산을 가져다놓은 그 자리, 200개의 우산 중에 몇 프로나 돌아왔을까요?
앞서 본 일본사람들의 질서의식으로 미루어본다면 200자루 중에서 한 달 동안에 글쎄요. 안 돌아온 우산이 기껏해봐야 5개? 10개? 정도라고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남아있는 우산이 20자루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90프로인 180자루는 누군가가 가져간 채 안 돌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학생들의 심정은 어땠겠습니까.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외부 자선단체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부족한 우산을 보충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우산 색깔도 눈에 띄는 색, 빨강, 노랑, 초록 등으로 하고, 그리고 각 우산에는 돌려놓을 장소가 적힌 메모도 달아놓고, 그뿐만이 아니라 우산을 돌려놓아 달라고 하는 포스터도 붙여놓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반환율은 전혀 오르지 않았고 결국 10년이 되는 올해를 끝으로 이 “사랑의 우산” 운동을 종료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 동안 보충한 우산은 총 1100자루. 마지막 60자루를 보충하는 이 학교 학생 말에 의하면 “이미 포기했습니다. 우산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사람은 성선설보다 성악설이 맞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학생이 말한 성선설, 성악설. 본래의 의미는 좀 다르지만, 요즘 쉽게 쓰이는 의미를 본다면, 사람은 태어나면서 선한 것인가, 아니면 태어나면서 악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만, 이 학생은 아마도 “사람이란 그 본성이 본래 나쁜 것 같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 성경을 봅니다. 창세기 6장의 첫 부분을 보면 두 번의 반전이 나옵니다.
먼저 처음에는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한 후에 딸들이 낳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아들들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 말씀만을 보면 이상하지 않을 것도 같은데, 그 다음 구절에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반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4절부터 시작해서 네피림이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네피림이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거인족이다, 용사다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해설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강한 사람, 힘이 센 사람을 뜻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이 딸들과 결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그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낳은 자식들은 용사였고,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이 기록 역시 대단히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만 5절에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主は、地上に人の悪が増大し、その心に計ることがみな、いつも悪いことだけに傾くのをご覧になった。

이것이 바로 두 번째의 반전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당연한 것 같고 잘 된것 같이 보이는데도 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안좋게 생각하셨을까요.

먼저 첫번째 반전의 근거가 된 구절인 2절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神の子らは、人の娘たちが、いかにも美しいのを見て、その中から好きな者を選んで、自分たちの妻とした。

이 기록에는 <하나님의 아들들> 그리고 <사람의 딸들>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신학자들은 이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이고 사람의 딸들이 무엇이고 하면서 이 또한 여러가지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합니다만, 이 구절, 그리고 이후에 나오는 문맥으로 보았을 때 이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 그리고 <사람에 속한 사람>이라고 이해해야지만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렇다면 처음부터 하나님한테 속한 사람이 따로 있고, 사람에 속한 사람이 따로 있다…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만 상대하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한테만 복음을 전하면 되고, 사람에 속한 사람은 완전히 무시해도 된다…는 황당한 결론에 이르고 맙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을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하나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과 <사람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들고 인종차별이다 남녀차별이다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즉, 그러니까 이 2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람의 생각들 중에서 아름답게 보이는 생각, 좋아보이는 생각들을 취해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인종차별도 아니고 남녀차별도 아닌, 영적인 믿음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인간적이고 물질적인 사고방직이 침입해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4절에 보면, 이처럼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갔던> 사람들이, 사람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타협하고 혼합되면서, 그 결과 나온 인물들이 용사이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돈을 많이 벌어보려고 밤이나 낮이나 죽도록 일을 한 결과 돈을 많이 벌었다… 이것이 기적이에요? 아니면 당연해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밤이나 낮이나 죽도록 공부한 결과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이것이 기적이에요? 아니면 당연해요? 이 두 가지 모두 기적이 아니라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 아름답고 좋아보이는 방법대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 아름답고 좋아보이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것이 기적이에요? 아니면 당연해요? 예, 이것 또한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의 방법을 버리고 인간적인 방법을 택한 결과 인간이 보기에는 용사이자 인간 세상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삶을 택한 사람들을 보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셨겠습니까. 당연히 선하게 생각하실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5절 말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主は、地上に人の悪が増大し、その心に計ることがみな、いつも悪いことだけに傾くのをご覧になった。

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을 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わたしの思いは、あなたがたの思いと異なり、わたしの道は、あなたがたの道と異なるからだ。

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만 몇 년 전에 북한의 김정일이 죽었을 때 그 누운 모습이 공개되었습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도 죽어서 그 유리관 속에 누워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든 저의 생각은 “쯧쯧. 저렇게 갈 것을…”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자신들의 국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여도 이를 묵살하고 군사력에 돈을 들였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죽인 결과 인간적으로 본다면 세계 최대 강국인 미국조차도 북한을 건드리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대해서 진정으로 그의 삶을 축복되고 값진 인생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무리 북한 고위직 인사라 하더라도 진심으로 그를 존경하고 따랐던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저질렀던 그 일을 그대로 지금 김정은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알고, 시키지도 않은 롯을 데리고 집을 나옵니다. 이 롯은 사람의 생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아브라함은 사람의 생각으로 롯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하나요?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말합니다. 아무래도 네가 나를 떠나야겠다. 네가 먼저 길을 택하라, 나는 네가 택한 길과 다른 길을 택할 것이다. 믿음의 길, 하나님의 길은 언제나 항상 사람의 생각과 결별하고 난 다음부터 시작합니다.
그 말을 듣고 롯이 길을 택할 때의 모습이 창세기 13장에 나옵니다. 10절~11절을 보면요,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ロトが目を上げて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見渡すと、主がソドムとゴモラを滅 ぼされる以前であったので、その地はツォアルのほうに至るまで、主の園のように、またエジプトの地のように、どこもよく潤っていた。それで、ロトはその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選び 取り、その後、東のほうに移動した。こうして彼らは互いに別れた。


롯이 눈을 들어 보니까 소돔 쪽이 아주 풍요로워보였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보니까요? 그렇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니까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눈이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보이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간 곳이 어디였습니까. 바로 죄악의 도시, 타락의 도시 소돔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눈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우리가 이제 길을 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모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을 들어야 합니까. 아니면 눈을 감아야 합니까. 조금 더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롯처럼 눈을 들어야 합니까, 아니면 감아야 합니까.
내 눈으로 보고 내가 판단하겠다는 것은 이것은 오만입니다. 하나님 됐어요.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나요? 아니요,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언제 역사하시나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역사하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야 하겠습니까. 눈을 들어야 합니까 감아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눈을 감아야 합니다. 눈을 감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항복선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항복선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고 하는 내 철저한 믿음의 선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아니, 자신의 앞날을 판단한다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판단해야지, 눈을 감는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 하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十字架のことばは、滅びに至る人々には愚かであっても、救いを受ける私たちには、神の力です。

네 눈을 의지하지 말고, 네 생각을 의지하지 말고, 나를 의지하라, 내 생각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눈을 감는 순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눈을 감았을 때 시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나 눈을 감으면 기도가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의지하는 것,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우리가 우리 생각으로 눈을 뜨면 오만이요, 눈을 감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구원입니다. 오만과 구원, 어느 쪽이 좋습니까. 인간적인 귀로 들어보면 오만! 구원! 당연히 오만!이 낫죠. 에게…9원? 10원도 아닌 9원을 어따 쓰게?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금 드린 말씀은 말장난이지만 진정한 오만과 구원은 말장난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좌우하는 큰 갈림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만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요, 구원이 생명으로 가는 길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돌이켜보면 사람이 왜 타락하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3장 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3장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そこで女が見ると、その木は、まことに食べるのに良く、目に慕わしく、賢くするというその木はいかにも好ましかった。それで女はその実を取 って食べ、いっしょにいた夫にも与えたので、夫も食べた。

하나님이 분명히 금했던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임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그 나무를 인간의 눈으로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생각은 분명히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생각은 그게 좋아보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셨다고 기록합니까.

오늘 본문 6절에,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それで主は、地上に人を造ったことを悔やみ、心を痛められた。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할 망정 하나님을 한탄하시게 만들고 근심하시게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로마서 8장 5절~6절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に従う者は肉的なことをもっぱら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ひたすら考えます。肉の思いは死であり、御霊 による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성경에는 벌써 답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그럴 때 인간은 판단합니다. 인간적인 눈을 뜨고 인간적인 머리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땠습니까. 하와로 말미암아 전인류는 타락하고 롯은 소돔으로 갔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정말 그런 나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우산 이야기를 보고 인터넷에서 찾아보았습니다만, 다른 곳에서도 그와 같은 활동을 하는 곳이 많았습니다. 다만 그 지역에서는 그렇게 아쉬운 결과가 나왔다는 것일 뿐이죠. 다른 지역에는 지금도 잘 되고 있는 곳도 있다고 하는 걸을 보면, 이 일본의 공공질서에 대한 의식이 높은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그 여고생의 말처럼 인간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악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요?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A라고 하는 길은 안락의 길, 풍요의 길입니다. 집도 크고 돈도 많고 삶이 넉넉한 길입니다. 한편 또 하나의 길 B라는 길은 불안하고 막막합니다. 그런데 A의 길은 인간의 길이요, 사망의 길이고, B는 하나님의 길이요, 믿음의 길이요, 복음의 길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길, 믿음의 길, 복음의 길을 택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앞길을 선택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눈을 떠야 합니까, 감아야 합니까. 잊지 마십시오. 눈을 뜨면 오만이요, 눈을 감으면 구원입니다. 눈을 뜨면 인간의 생각이요 눈을 감으면 하나님 생각입니다. 우리는 눈을 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길을 가는데, 운전하는데 눈을 감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가는 큰 일납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에 그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눈을 뜨고 내 생각 사람의 생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 철저하게 하나님께 항복선언을 하고 전적으로 하나님 생각에 온전히 맡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지고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내 힘대로 하다가 내 능력대로 하다가 다 망하고 다 털리고 그 다음에서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생각으로 나아가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그럼으로 인하여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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