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회 누구의 것입니까
2017년 4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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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마태복음 22장 15절~22절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누구의 것입니까’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에는 어려운 질문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아기한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는 질문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그런 질문을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자들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질문 내용을 짧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 가이사한테 세금을 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복음서에 보면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누구는 천국에 대해서 묻기도, 누구는 부활에 대해서 묻기도 했고, 또 누구는 마지막 날에 대해서 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질문을 보면, 그런 천국이나 부활이나 마지막 날에 대한 것에 비하면 지극히 단순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과 <세금>이다.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누가 우리에게,
“이보시오, 세금을 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두 말 할 것 없이 “당연히 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아니, 대답만이 아니라 세금은 내야지요. 물론 수입이 없다면 내고 싶어도 낼 수 없겠습니다만, 회사원으로 일하건 아니면 사업을 하건 간에 수입이 있다면 당연히 세금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나라가 정상적으로 운영이 되지, 세금이 없다면 그 나라는 파산하고 말겠지요. 그래서 한국이나 일본에 보면 국민의 의무 중에 반드시 이 <납세의 의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사업을 하면서 세금을 일부러 안내거나 하면 탈세가 되어서 처벌까지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2장 15절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해서 이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 서기관들은 어땠냐 하면, 자신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믿기 위해서, 또는 백성들을 하나님께 올바로 인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율법을 만들고 규칙을 만들고 교리들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는 이를 따르라고 짐을 지우면서도, 정작 자기들은 그 위에 군림하면서 온갖 권세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내 말을 따르라. 내가 만든 교리들에 순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 간다. 그러면서 백성들한테 겁을 줍니다.
마태복음 23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이것이 당시 그들의 실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 천국을 선포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여러 가지 기적들을 행하십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자기들보다도 예수님 말씀에 귀를 더 기울입니다. 예수님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불안해합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영향력이 커져만 가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비판하시니까, 이제 백성들까지도 자신들을 우습게 볼 것이요,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예, 바로 예수님을 어떻게든 책을 잡아서, 어떻게 해서든 잡아넣을 핑계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바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다면, 사실 좀 더 어려운 질문을 해야 할 것도 같은데, 왜 이런 쉬운 질문을 했을까요. 우리가 한국에 살고 있든 일본에 살고 있든, 아니면 다른 나라에 살고 있든지 간에, 세금을 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이게 어려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는 단순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님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대단히 민감한 질문입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국이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였지요. 과거 역사 속에서 강대국이 식민지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 장점은 많이 있습니다.
일단 식민지를 만들면 토지와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고, 군사적인 거점을 만들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금을 징수할 수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식민지에서 지배를 당하는 백성들은 지배를 하는 나라에게 세금을 내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본다면, 당연히 세금을 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만, 이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식민지 지배에 반대하고 있던 상당수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에 대해서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랄하고 무자비하게, 그것도 아주 많은 세금을 거둬가고 했으니까 당시 세리들이 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도 이처럼 로마에 순종하지 말고 이스라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상황에서, 만약에 예수님이 로마에 대해서 세금을 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들의 불만은 폭발하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 곁을 떠나거나, 아니면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금을 내지 말자고 해요? 만약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이는 반역죄가 됩니다. 예수님은 로마 정부에 대해 반역하자고 선동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체포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제시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일본에 의해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을 때, 당시 조선사람들한테 대단히 큰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공개적으로 일본정부에 대해 순종하자! 라고 하면 뭐라고 했겠어요?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친일파, 매국노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일본에 복종하지 말자고 해요? 만약에 그랬다가는 그 자리에서 일본 경찰들한테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거나 살해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가이사한테 세금을 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들은 기뻐했을 것이요,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예수님은 반역죄인으로서 로마에 의해 체포 당할 것이기 때문에 역시 그들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단순해 보이는 질문에는 이처럼 간교한 그들의 생각이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에 대한 답변 한 마디로 인하여 목숨이 왔다 갔다 할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이 악한 의도를 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런데 여기서 이 다음 말씀에 대해 공관복음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 장면은 이른바 공관복음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마가복음에는 12장 15절에,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라고 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20장 24절에,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앞서 살펴본 오늘 말씀 중인 마태복음 22장 19절에 보면,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이라고 기록합니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마가나 누가는 이 말씀의 포인트는 여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만, 마태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무엇보다도 마태의 전직이 다름 아닌 세리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들 수 있겠지요.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께서 세금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다른 제자들보다도 바로 이 부분을 더욱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나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자들의 질문은 단순히 돈에 대해서가 아니라, 세금 자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저 돈을 가져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뭐? 세금? 그래, 그럼 너희들이 바쳐야 할지 말지에 대해서 묻는 그 세금에 낼 돈 한 번 가져와봐.”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예수님과 그들의 대화를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20절~21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들이 가지고 온 이 동전의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그러니까 너희들은 이 동전에서 뭐가 보이느냐. 뭐가 적혀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말합니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야 가이사의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지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후 22절에 보면 이 말씀을 듣고 질문한 이들이 놀랍게 여겨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게 도대체 어떤 말씀이기에 그들이 놀랍게 여긴 것일까요.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한 목적은 진리를 알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답변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래? 너희는 이 동전에서 가이사를 봐? 그래. 이게 그럼 너희들은 가이사 거라고 생각하는 거네. 그렇다면 가이사에게 바쳐.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바쳐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즉, 로마를 두둔한 것도 아니면서도 반역을 한 것도 아닌 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더 이상 어떻게 물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참 놀랍긴 합니다만, 이 답변, 좀 부자연스럽지 않나요? 질문은 분명 <세금을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러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이사한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대해서 자연스러운 답변이라면,
“가이사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가이사한테 바치고, 그렇지 않으면 바치지 말아라”
라고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아니, 하나님한테 바치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는데, 왜 뜬금없이 하나님 말씀을 하세요? 이런 생각 혹시 들지 않으십니까.
그 정도는 당연히 예수님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을 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너무나도 놀라운 예수님의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말씀 서두에 식민지 백성들, 즉 지배를 당하는 백성들은 지배를 하는 나라에 대해서 세금을 내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지금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냐. 너는 지금 누구의 소유이냐? 가이사? 너희들이 말이야, 지금 모르고 있는 또 하나의 선택지가 있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야. 너희는 너희가 가이사의 소유라고 생각하니? 아니면 하나님 소유라고 생각하니? 너희가 너희 스스로의 주인을 가이사라고 생각하면 가이사한테 세금을 바쳐. 하지만, 너희 스스로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한테 바쳐”
라고 하신 것입니다. 서양만이 아니라 동양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완전히 승복했다는 근거는 뭐냐 하면 정해진 시기마다 꼬박꼬박 조공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들, 내가 너희들을 살려줄게. 하지만 그 대신 조공을 바쳐. 이것입니다. 조공이 무엇입니까. 예, 바로 세금입니다.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그 상대방을 주인으로 섬긴다는 뜻인 것입니다.
여러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학자나 문학을 하는 분들이 즐겨 다루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보문고에 들어가서 <나는 누구인가>라고 찍어보니까 무려 363권의 책이 검색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를 고민하고 연구하고 사색합니다만, 책을 읽는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나요? 그 책 속에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적혀 있나요?
나 자신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도 생각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저 같은 경우에는 제가 너무 비관적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제가 실수하고 못난 짓하고 그랬을 때만 생각납니다. 그러면서, 아이고……난 참 못 났구나……. 합니다.
나에 대해서 되돌아볼 때 이처럼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내가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살려고 하니까 이것도 하려고 해도 안 됐고, 저것도 하려 해도 안 됐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 번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 소유인가> <나는 누구 것인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에 보면 어린양 되신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찬양합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바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 자신의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한다고 답이 나옵니까? 안 나와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왜 답이 안 나와요? 예, 나 자신은 너무나도 부족하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것이고, 우리가 예수님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우리가 그냥 귀합니까? 우연히 어쩌다가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지으셨어요?
창세기 1장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을 버리고 배반하고 불순종하면서 죄를 거듭합니다. 그래도 우리들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으시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한 번 봅니다. 예를 들어서 청와대나 미국 백악관에는 대통령이 키우는 강아지가 있다고 하던데, 아마도 무척이나 애지중지 키우고 있겠지요. 얼마나 귀한 대우를 받겠습니까. 하지만 그 이유는 그 강아지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강아지의 주인이 바로 대통령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주인은 누구십니까. 우리 주인은 대통령 정도가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형상으로 만들어주셨는데, 우리가 그깟 강아지보다 못합니까? 그러니 아무리 우리 스스로가 능력이 없고 잘나지도 못했다고 하지만, 우리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아낌없이 주셨는데,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입니까.
학교나 직장에서 내가 나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표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예, 이름을 적어놓습니다. 성경에도 바로 그와 같은 장면이 등장합니다. 계시록에 보면 이름이 어디에 적히냐 하면 이마에 적힙니다.
마지막 날, 구원의 날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22장 3절~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요한계시록 14장 1절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이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것입니다. 집에 가서 거울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옆사람을 한 번 보세요. 이마에 이름이 적혀 있나요? 지금 우리 눈에는 안 보일지라도,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 모두에게는 이마에 이름이 적혀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름이 또 어디에 적혀 있습니까.
누가복음 10장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어린양의 생명책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예수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있는 어린양의 생명책에도 적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 것입니다. 이제 우리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이제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돈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금입니다. 세금은 돈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교보문고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검색을 해보니 363권이 나왔다고 했습니다만, <나는 누구 것인가>로 검색해보았더니 얼마나 나왔을까요? 10권이요? 5권이요? 0권이었습니다. 단 1권도 안 나왔습니다. 그러니 인생에 있어서 문제가 해결이 될 리가 있나요.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닌 <나는 누구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인은, 우리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그래야 모든 고민이 해결됩니다. 그래야 성령님께서 인도해주시는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심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내 능력이 아닌 주님의 능력으로, 성령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면서, 항상 승리하고, 우리의 주인 되신 주님께 기쁨과 감사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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