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회 오직 말씀으로
2017년 6월 11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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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역대하 34장 14절~21절
"무리가 여호와의 전에 헌금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매 사반이 책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가서 복명하여 이르되 왕께서 종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종들이 다 준행하였나이다 또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돈을 쏟아서 감독자들과 일꾼들에게 주었나이다 하고 서기관 사반이 또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 앞에서 그것을 읽으매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 왕이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의 아들 압돈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가서 나와 및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들을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 하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직 말씀으로”ただ御言葉のみ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때는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단되었던 시기, 남쪽 유다 아몬 왕 때에는 온 나라가 우상숭배에 뒤덮여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의 모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역대하 33장 21절~23절
“아몬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 년 동안 다스리며 그의 아버지 므낫세의 행함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아몬이 그의 아버지 므낫세가 만든 아로새긴 모든 우상에게 제사하여 섬겼으며 이 아몬이 그의 아버지 므낫세가 스스로 겸손함 같이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겸손하지 아니하고 더욱 범죄하더니”

アモンは二十二歳 で王となり、エルサレムで二年間、王であった。彼は、その父マナセが行なったように、主の目の前に悪を行なった。彼は、その父マナセが造ったすべての刻んだ像にいけにえをささげ、これに仕えた。彼はその父マナセがへりくだったようには、主の前にへりくだらず、かえって、彼アモンは罪過を大きくした。

성경에 보면 그 나라가 문제에 뒤덮이고 혼란이 생기는 시점을 보면 항상 그 원인을 “우상숭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몬 왕 때의 남쪽 유다는 바로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나라가 혼란 속에 빠집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 구절을 봅니다.

역대하 33장 24절~25절
“그의 신하가 반역하여 왕을 궁중에서 죽이매 백성들이 아몬 왕을 반역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의 아들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라”

彼の家来たちは彼に謀反を起こし、その宮殿の中で彼を殺した。しかし、民衆はアモン王に謀反を起こした者をみな打ち殺した。民衆はアモンの子ヨシヤを代わりに王とした。

라고 기록합니다. 왕의 신하가 반역해서 왕을 암살했더니, 백성들이 그 반역자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는 것인데, 이처럼 짧게 두 구절로 되어 있습니다만, 이것만 보아도 당시 나라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혼란을 상징이라도 하듯이, 아몬 왕의 아들 요시야가 왕이 됩니다만, 역대하 34장 1절에 의하면, 그가 왕위에 오를 때 그의 나이 불과 여덟 살이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 여덟살짜리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되면 왕은 그저 허수아비가 되고 그 밑에 있는 신하들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해서 주무르는 것이 일반적이었겠지요.

하지만 이 요시야 왕은 남달랐습니다.

역대하 34장 2절~7절을 잠시 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아직도 어렸을 때 곧 왕위에 있은 지 팔 년에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고 제십이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하게 하여 그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v제거하여 버리매 무리가 왕 앞에서 바알의 제단들을 헐었으며 왕이 또 그 제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들을 찍고 또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제사장들의 뼈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였으며 또
v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시므온과 납달리까지 사면 황폐한 성읍들에도 그렇게 행하여 제단들을 허물며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며 온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태양상을 찍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彼は主の目にかなうことを行なって、先祖ダビデの道に歩み、右にも左にもそれなかった。彼の治世の第八年 に、彼はまだ若かったが、その先祖ダビデの神に求め始め、第十二年 に、ユダとエルサレムをきよめ始めて、高き所、アシェラ像、刻んだ像、および、鋳物(いもの)の像を除いた。人々は彼の面前で、バアルの祭壇を取 りこわした。彼は、その上にあった香(こう)の台を切り倒し、アシェラ像と刻んだ像と鋳物(いもの)の像を打ちこわし、粉々に砕いて、これらのいけにえをささげた者たちの墓の上にまき散らした。彼は、祭司たちの骨を彼らの祭壇の上で焼いて、ユダとエルサレムをきよめた。彼は、マナセ、エフライム、シメオン、さらにはナフタリの町々でも、至る所で、彼らの剣を用いて同様にした。イスラエルの全地で、祭壇を 取りこわし、アシェラ像と刻んだ像を粉々に砕き、すべての香の台を切り倒してから、彼はエルサレムに帰った。


왕위에 있은 지 팔 년이라고 하면, 그의 나이 불과 16살 때입니다. 그 때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고, 왕위에 오른 지 이십 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28살 때에 모든 우상을 그것도 아주 완전히 제거해버렸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요시야 왕 18년에 여호와의 성전 보수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그 성전에 감추어져 있던 모세의 율법책이 발견됩니다. 그래서 그 율법책을 서기관 사반이 왕 앞에서 낭독하는데,

오늘 본문 중 1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
王は律法のことばを聞いたとき、自分の衣を裂いた。

당시에 옷을 찢는다는 행위는, 너무나도 놀라고, 가슴 아파하고, 두려워하고, 애통해할 때에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요시야 왕은 모세의 율법책 내용을 듣고 자기 옷을 찢었을까요. 이에 대해 한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는 사반이 읽어준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요시야 왕이 극한 슬픔과 공포를 느꼈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율법의 내용을 듣고 요시야는 자신과 백성들의 형편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회개하는 자가 일반적으로 취하는 행동 양태, 즉 자신의 옷을 찢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율법서 내용을 보니까, 지금 자신들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말씀,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요시야 왕은 너무나도 큰 놀라움과 슬픔과 공포를 느끼면서 가슴을 치는 심정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거 16세기 당시 교회의 부패상황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고, 그저 권력과 재물을 탐하는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속에는 온갖 불의와 부정과 불법과 부패와 죄악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때 1517년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혁명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바로 그 종교혁명 당시 주창된 다섯 가지 표어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교회 주보 표지에도 있는 것처럼 다섯 가지 솔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솔라……라고 하는 것은 라틴어로 <오직>이라는 뜻인데,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주님만으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입니다.

종교혁명 당신 등장한 이 표어를 보면 당시 가톨릭 교회 상황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즉, 주님의 은혜에서 벗어났고, 믿음에서 벗어났고, 주님이 아닌 세상적인 것에 집착했으며,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 문제가 많았지요.

그 중에서 여기서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오직 말씀으로’입니다. 라틴어로는 Sola Scriptura……라고 해서 이를 직역하면 <오직 성경>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판단 기준은, 내 상식이나 내 교양이나 내 경험이 아닌, 오직 주님의 말씀이라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주님의 말씀이 바로 다름 아닌 성경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분명히 과거 16세기 당시, 성경에서 벗어나고 말씀에서 벗어난 가톨릭을 비판하면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기치 아래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거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개신교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는 기독교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개신교……라고 해서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을, 본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믿음의 상태로 되찾아온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분명히 그와 같은 취지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특히 우리 한국사람들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과거를 되돌아보면 우리나라의 믿음이 보통 믿음인가요? 1907년에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한 부흥운동은 그새 전국으로 퍼져갔고, 나아가 역사적인 평양 대부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 불씨는 지독하고 참혹했던 일제시대에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잿더미 속에서 우리 민족은 신앙을 지켜왔고, 1973년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여의도에서 전도집회를 열 때에는 무려 51만 6천명이 몰려왔었다고 합니다. 성가대만 하더라도 6천 여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한국의 기독교는 급성장을 합니다. 신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당시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개발도상국이었으나, 바야흐로 1980년대 9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적인 교회와 세계적인 목회자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영적대부흥 시대가 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국내만이 아니라 외국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나라 순위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라고 하니, 이 작은 나라에서 그렇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하지만 이제 지금 한국 교회, 또는 한국인 교회의 현주소는 어떻습니까. 나날이 쇠퇴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도 수는 줄어만 갑니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에서는 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교회 건물 매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전도는커녕, 교회 가고 싶어도 교회 다니는 사람 꼴 보기 싫어서 안 간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 원인을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이해할 때에는 세 가지 측면을 유의해가면서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직접적인 이해, 둘째는 비유적인 이해, 그리고 셋째는 문화적인 이해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ひとり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셨냐 하면 하나님의 독생자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어린양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이것은 비유도 아니고 문화적인 것도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성경에 적힌 그대로 이해하고 아멘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구절은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18장 12절~13절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あなたがたはどう思いますか。もし、だれかが百匹の羊を持っていて、そのうちの一匹が迷い出たとしたら、その人は九十九匹を山に残して、迷った一匹 を捜しに出かけないでしょうか。そして、もし、いたとなれば、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その人は迷わなかった九十九匹 の羊以上にこの一匹を喜ぶのです。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아니, 생각해보세요. 양 아흔 아홉 마리가 중요해요? 아니면 한 마리가 중요해요? 이건 뭐 생각할 필요도 없이 아흔 아홉 마리가 중요하죠. 하지만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버려두고,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직접적인 이해라기보다는 비유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누구에요? 예,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봅니다. 누가복음 14장 16절~20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
v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するとイエスはこう言われた。「ある人が盛大な宴会を催し、大ぜいの人を招いた。宴会の時刻になったのでしもべをやり、招いておいた人々に、『さあ、おいでください。もうすっかり、用意ができましたから。』と言わせた。ところが、みな同じように断わり始めた。最初の人はこう言った。『畑を買ったので、どうしても見に出か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すみませんが、お断わりさせていただきます。』もうひとりはこう言った。『五くびきの牛を買ったので、それをためしに行くところです。すみませんが、お断わりさせていただきます。』また、別の人はこう言った。『結婚したので、行くことができません。』


우리가 밖에 나가서 전도를 해보시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번 주 일요일에 우리 같이 교회에 나가요. 그러면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아, 이번 주 일요일에는 이런 일이 있다, 저런 일이 있다 하는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이고 뭐고 나는 내 일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잔치를 거절합니다.

예수님은 어땠습니까. 예수님이 한가하신 분이십니까? 2천년 전에 마침 잠깐 시간이 나셔서 이 땅에 오셨나요? 아니지요. 하지만 아무런 핑계도 없이, 아무런 변명도 없이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나를 찾으려 오셨습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나를 도우려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와주셨던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이외 같은 말씀은 직접적인 이해가 아니라 비유적인 말씀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문화적인 이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4절~35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教会では、妻たちは黙っていなさい。彼らは語ることを許されていません。律法 も言うように、服従しなさい。もし何かを学びたければ、家で自分の夫に尋ねなさい。教会で語ることは、妻にとってはふさわしくないことです。

디모데전서 2장 11절~12절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第一テモテへの手紙
女は、静かにして、よく従う心をもって教えを受けなさい。私は、女が教えたり男を支配したりすることを許しません。ただ、静かにしていなさい。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지금도 일부 교단에서는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안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자가 꼭 목사를 안 하면 되는 건가요? 그러면 주일학교 교사도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렇다면, 그럼 이 분들의 시각에서는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는 교단은 이단이겠네요?


이와 같은 구절은 그 당시의 문화로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는요, 이스라엘에서의 여성 인권은 지극히 열악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시초라고도 일컬어지는 로마에서도 여성에게는 시민권이 없었습니다. 당시 여성에게는 교육의 의무도 권리도 없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여성의 참정권이지만, 역사적으로 본다면 불과 100년 정도밖에 안 된 제도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여성들이 교회나 믿음, 그리고 신앙 등에 대해서 교육을 받을 수도 없었으니 알래야 알 수도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고 간섭하게 된다면 오히려 혼란만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본다면, 남녀를 불문하고 예를 들어서 예배나 교회 운영에 대해서 아무런 신학적 지식이 없는 대도 예배는 이렇게 해라, 교회 운영은 저렇게 해라, 설교는 이래라 저래라 하고 간섭을 한다는 행위를 경계하는 말씀으로 이해를 해야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서 여성을 차별하게 된다면, 이는 엉뚱한 해석을 낳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는 이 외에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평신도 때 어떤 권사님한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머리를 좀 기르고 다녔습니다만, 그런 저를 보고, 머리를 깎으래요. 그래서, 그런 말이 성경에 있나요? 라고 농담삼아 말했더니만, 이 분이 정색을 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찾아보니까, 아 글쎄, 성경에 있더라구요?

고린도전서 11장 14절,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自然自体が、あなたがたにこう教えていないでしょうか。男が長い髪をしていたら、それは男として恥ずかしいことであり、

아이고, 그래서 이거 예수님을 믿으면 남자는 머리를 짧게 깎아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성경의 조금 앞을 살펴보니까 이런 구절이 있더라구요?

고린도전서 11장 5절,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しかし、女が、祈りや預言をするとき、頭にかぶり物を着けていなかったら、自分の頭をはずかしめることになります。それは髪をそっているのと全く同じことだからです。

이 구절이 있기 때문에 가톨릭 성당에서는 여성분들이 기도를 할 때 이른바 미사포를 머리에 씁니다만, 그렇다면 제게 성경구절을 근거로 머리를 깎으라고 하신 그 권사님은 기도할 때 미사포를 쓰시는지 봤더니, 이 분은 가톨릭이 아니라 기독교 권사님이시거든요. 당연히 아무 것도 쓰지 않으십니다. 그럼 이건 어떻게 된 거예요?

이것도 역시 당시 문화적인 측면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사회에서 남성의 정장차림이라고 하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게 뭐겠습니까? 바로 양복, 구두, 넥타이겠지요. 물론 요즘은 여름에 에너지절약 차원에서 넥타이를 안 매고 근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정장>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넥타이, 양복, 구두입니다.


그와 같은 관행으로 여자가 머리에 쓰는 것은 당시 문화적으로 정숙한 여인의 차림새로서 예를 갖추라는 것이고, 여인과 같은 겉모습을 멀리하는 의미에서 남성에게는 머리를 깎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 부분 역시 문화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 입맛에 맞춰서 자기 멋대로 성경을 이해하게 된다면 이는 앞서 본 권사님 말씀처럼 어이없는 해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좀 마음이 상하실지도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앙 경력이 어느 정도 되는 분이라면 교회에 들어서서 주보를 펼쳐 들고, 그날 성경말씀이 <말라기 3장 8절>이나 <3장 10절>이라고 하면 벌써 얼굴부터 찌푸립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건 바로 그 구절이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マラキ書
말라기 3장 8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人は神のものを盗むことができようか。ところが、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ものを盗んでいる。しかも、あなたがたは言う。『どのようにして、私たちはあなたのものを盗んだでしょうか。』それは、十分の一と 奉納物によってである。

말라기 3장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十分の一をことごとく、宝物倉(ほうもつぐら)に携 えて来て、わたしの家の食物とせよ。こうしてわたしをためしてみよ。――万軍の主は仰せられる。――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天の窓を開き、あふれるばかりの祝福をあなたがたに注ぐかどうかをためしてみよ。


하지만 이 말씀을 하면 성도님들은 어떻게 해요? “아이구, 저 목사님 또 돈 얘기한다”라고 하지요. 누가 그래요? 예, 바로 저 같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십일조, 그러니까 자신의 수입 중에서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은 구약에서만 있었던 거야. 예수님은 그런 말씀 안 하셨어. 누구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사실인가요?

마태복음 23장 23절에는 예수님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말씀에 보면 <이것>이 뭐고 <저것>이 뭐고 그래서 헷갈리시나요? 그러실까봐 공동번역본과 현대인의 성경 번역본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먼저 공동번역본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현대인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 위선자들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율법 가운데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믿음은 저버렸다. 그러나 십일조도 바치고 이것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십일조를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돈이 좀 필요해서요? 생각해보십시오. 온 천하 만물이 다 주님의 것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한테 돈을 내라고 하세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あなたの宝のあるところに、あなたの心もあるからです。

이처럼 돈이 필요해서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돈이 많은 사람만이 드리는 것이 아니에요. 수입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10분의 1을 주님께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요즘 목사님들 중에는 이 십일조 말씀을 설교에서 잘 안 하신다고 해요. 왜요? 성도님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성도님들의 눈치가 보여서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예, 부흥회 때 외부 목사님들이 오시면, 그 때 이 말씀하기를 부탁한다고 해요.

하지만 여러분,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있는 것처럼 해도 죄이지만, 성경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전하지 않는 것도 역시 죄인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한테 마치 벼룩의 간을 빼먹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대로 우리가 축복을 받는 방법을, 축복 받는 비결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좀 민감한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한국이나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동성애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는데, 동성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에 보면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타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두 사자가 등장합니다. 마침 롯이 그들을 보고 자기 집에 초청을 합니다. 그들이 그 집에 들어가자 일이 벌어집니다.

창세기19장 4절~5절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彼らが床(とこ)につかないうちに、町の者たち、ソドムの人々が、若い者から年寄りまで、すべての人が、町の隅々から来て、その家を取 り囲んだ。そしてロトに向かって叫んで言った。「今夜お前のところにやって来た男たちはどこにいるのか。ここに連れ出せ。彼らをよく知りたいのだ。」

여기서 “상관한다”는 말은 요즘 말로 하자면, 성관계를 의미합니다. 즉, 남자들이 몰려와서 지금 온 두 남자들을 끌어내라, 우리들이 집단으로 성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온 단어가 있는데, 영어로 sodomy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동성애 같은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뜻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신약에도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6절~27절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こういうわけで、神は彼らを恥ずべき情欲に引き渡されました。すなわち、女は自然の用を不自然なものに代え、同じように、男も、女の自然な用を捨てて男どうしで情欲に燃え、男が男と恥ずべきことを行なうようになり、こうしてその誤りに対する当然の報いを自分の身に受けているのです。

이처럼 동성애는 타락의 상징이요, 죄악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에는 어디에도 비유적이거나 문화적인 측면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죠.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동성애를 인정해야 한다, 동성끼리의 결혼을 인정해야 한다고 외친다 한들, 성경에 이처럼 옳지 않다고 적혀 있는데, 제가 많이 부족하기는 하나 그래도 목사라고 하는 제가, 어떻게 성경 말씀을 저버리고 동성애를 옳다고, 동성애를 지지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교회에서는 동성애자에게 목사 안수까지 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동성애자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동성애자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복음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예를 들어서 품행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품행이 올바르지 않아야 합니까? 더 나아가서, 범죄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범죄를 저질러야 합니까. 마약 중독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마약 중독자가 되어야 합니까. 이처럼 말씀을 왜곡하는 가르침이 이 세상에 얼마나 넘쳐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동성애자를 차별하자고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사랑으로 그분들을 보듬고 기도를 해주고, 주님의 말씀과 올바른 믿음을 심어주고, 믿음 안에서 그 마음이 치유 받도록 보살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요즘 이 시대에 기독교의 위기는, 교인들이 말씀을 멀리하고 말씀을 왜곡하는 것에서도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시간 관계상 몇 가지만 요약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 외에도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바로 정통 교단이 그렇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가지고 그것도 교리라고 내세우는 이단들한테 공격을 받고는 어이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오직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올바로 지키고 따르는, 그리하여 우리 삶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하나도 빠짐 없이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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