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회 잘 믿으려면(2)
2018년 5월 27일 설교

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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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잘 믿으려면(2)” よく信じるためには(2)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으려면 무엇보다 회개를 잘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똑 같은 죄인이었으나 회개를 제대로 못한 사울과 회개를 기가 막히게 잘한 다윗을 비교해서, 그들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 회개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또 다른 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한 말로 해본다면 <이웃을 사랑하자>이겠지요? 자,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가 무엇을 떠올립니까.

마태복음 22장 35절~40절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そして、彼らのうちのひとりの律法の専門家が、イエスをためそうとして、尋ねた。
「先生。律法の中で、たいせつな戒めはどれですか。」
そこで、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心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知力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せよ。』
これがたいせつ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あなた自身のように愛せよ』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たいせつです。
律法全体と預言者とが、この二つの戒め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 말씀에 대해서 아직도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 중요한 것,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보다 조금 덜 중요한 것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9절에 보면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하는 말씀은, 그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라고 하셨는데,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도 첫째 계명처럼 큰 계명,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만큼 중요한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반드시 사랑해야 하고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웃 사랑도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문제를 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사랑을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 그러면 이웃 사랑을 위해서는 〇〇가 필요하다. 자, 여기에 어떤 단어를 넣는 것이 적합할 것 같습니까.

물론 여러 답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어쩌면 “용서”라는 단어를 생각하신 분들이 많지 않을까 합니다. 용서.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22절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そのとき、ペテロがみもとに来て言った。「主よ。兄弟が私に対して罪を犯した場合、何度まで赦すべきでしょうか。七度まででしょうか。」
イエスは言われた。「七度まで、などとはわたしは言いません。七度を七十倍するまでと言います。

마태복음 6장 14절~15절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もし人の罪を赦すなら、あなたがたの天の父もあなたがたを赦してくださいます。
しかし、人を赦さないなら、あなたがたの父もあなたがたの罪をお赦しになりません。

누가복음 6장 37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自分もさばかれません。人を罪に定め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自分も罪に定められません。赦しなさい。そうすれば、自分も赦されます。

이처럼 성경에는 <용서>라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 사랑을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 이웃 사랑을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다.>

이걸로 만족한가요? 이렇게 적어놓으면 그럴 듯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그럴 듯한 것, 이는 때로는 대단히 위험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사회에 있어서도 이처럼 그럴 듯해 보이는 논리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한 회사에서 어느 날 김대리가 부장님한테 하루 쉬겠다고 휴가원을 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부장님이 대뜸 이런 말을 하더래요.

"이봐, 김대리. 1년은 365일이지? 하루는 24시간이고. 그 중 자네 근무시간은 8시간이지?
하루의 3분의 1을 근무하니까, 결국 1년에 자네가 일하는 날은 122일 밖에 안 된다는 얘기야. 그 122일 중에서 52일의 일요일이 있고, 반만 일하는 토요일을 26일로 치면 겨우 44일이 남아.
그걸 자네가 다 일하나? 밥 먹는 시간에 화장실 왔다 갔다 하는 시간에 담배 피우는 시간까지 합치면 하루에 최소한 3시간은 빠진다구. 그걸 다 빼면 자네가 일하는 시간은 27일 이라는 소리지.
게다가 자네 여름휴가는 열흘이지? 그럼 27일에서 열흘을 빼면 17일이 남는군. 그 중에서 신정, 구정, 한글날, 근로자의 날, 어린이 날, 석가탄신일, 현충일, 제헌절, 광복절, 추석, 크리스마스, 그리고 회사 창립기념일까지 하면 휴일이 총 16일이야.
결국 자네가 제대로 일하는 날은 1년에 딱 하루라 이거야. 그런데 그 하루마저 휴가원을 내면, 아예 놀고 먹겠다는 건가? 자네도 입이 있으면 대답 좀 해보게."

이렇게 부장님이 다그치더랍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김대리. 물러서지 않습니다. 김대리는 대단히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부장님께 하소연을 했습니다.

"부장님, 전 너무 피곤해요. 왜 그런지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나라의 4,500만 인구 중에 2,500만은 노인이나 실업자 아니면 퇴직자들이에요. 그럼 남은 인구는 2,000만명입니다. 그 중에서 1,600만은 학생이거나 어린이들이죠. 그럼 400만이 남습니다. 현재 100만 명이 국방을 위해 군대에 있거나 공익 근무 중이고, 100만 명은 국가공무원입니다. 그럼 200만이 남는 거죠? 또 180만명이 정치를 하거나 지자체 공무원들이니 남는 건 20만명, 그 중에 18만8,000명이 병원에 누워 있으니 겨우 1만2,000명이 남죠. 그리고 그 1만 2000명 중에서 1만1,998명은 지금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으니 결국 대한민국에는 지금 두 명이 남아서 화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부장님과 저예요! 그런데 부장님은 매일 제가 올린 보고서에 결재만 하고 있으니 실제로 일하는 사람은 이 대한민국에서 오직 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가 얼마나 피곤한지 아시겠죠.”


여러분 어떠세요? 이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도 그럴 것 같지 않으세요? 물론 김대리가 1년에 단 하루밖에 일을 안 한다는 말이나, 대한민국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김대리 하나라는 말은 모두가 다 거짓이죠. 제가 드린 이 말씀 중에는 분명히 오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내용 중에서 어디가 오류였는지는 시간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만, 이처럼 겉모습이 그럴 듯해 보이는 논리는 간혹 사실과 거리가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 이웃 사랑을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다.>

이것으로 충분합니까. 만약에 아직까지도 충분하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렇다면 이렇게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あなたがたは、 すべての人と平和を保ちなさい。>라고 합니다만, 그렇다면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면 모든 사람과 화목할 수 있다는 것인가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좋은 소리를 많이 할까요, 안 좋은 소리를 많이 할까요. 잘 모르세요? 들어본 적 없어서 모르겠어요?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예수 믿는 사람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좋은 소리를 많이 한다면 기독교가 지금처럼 줄어들겠어요? 나가서 열심히 전도하고 그럴 필요가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인데, 그럼 나도 믿어볼까? 그렇지 않겠어요? 하지만 실상은 어떻습니까. 예, 기독교 인구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다 깍쟁이래요. 이기적이래요. 그 원인이야 여러 가지 있겠습니다만, 어쩌면 그 중에는 “이웃을 용서해주면 이웃과 화목해질 수 있다”고 믿는 이 허황된 믿음이 일조하고 있지 않나 합니다.

그럼 용서가 아니라면 뭘 하면 되나. 더 이상 질질 끌지 않겠습니다. 부탁입니다. 제발 사과 좀 제대로 하면서 삽시다.

용서와 사과. 똑같은가요? 아니요.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그렇죠. 용서는 나에게 잘못이 없고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을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용서이고, 사과는 상대방에게 잘못이 없고 나한테 잘못이 있을 때 내가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번 냉정하게 생각해보죠.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다른 사람이 나한테 잘못한 게 많아요? 아니면 내가 다른 사람한테 잘못한 게 많아요? 어떠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이 나한테 잘못한 게 많은 것 같아요?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기적이다, 깍쟁이다 하는 말을 듣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말씀을 잠시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2장 5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12장 58절~59절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あなたを告訴する者といっしょに役人の前に行くときは、途中でも、熱心に彼と和解するよう努めなさい。そうでないと、その人はあなたを裁判官のもとにひっぱって行きます。裁判官は執行人に引き渡し、執行人は 牢に投げ込んでしまいます。
あなたに言います。最後の一レプタを支払うまでは、そこから決して出られないのです。」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떠신가요? 적어도 세상적으로 보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서 친구나 아니면 사업상 거래처와 다툼이 붙었어요. 그래서 얘기를 아무리 해도 안 되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뭐 어쩌고 어째? 좋아.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 우리 법정에서 보자! 아니,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뭐가 무서워? 정 그러면 법적으로 판가름을 내보자!


글쎄요. 이게 좀 더 사나이 답지 않으세요?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래. 니가 맞겠지. 하지만 만의 하나. 니가 지면 어떡할 거야. 그걸 생각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참 겁쟁이 같습니다. 내가 잘 못한 게 없는데 뭐가 문제야? 한 번 붙자고 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다가 너 까딱 잘못하면 큰 일 난다. 그러면 너 어쩔거냐. 그걸 걱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뭐라세요? 예, 화해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화해할 수 있을까요. 용서하면 화해할 수 있을까요? 물론 상대방이 잘못했다면 용서를 해주는 것으로 인해서 화목할 수 있겠습니다만, 내가 잘못해 놓고도 그럴 수가 있을까요? 내가 잘못해놓고 상대방한테 내가 너를 용서해주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면 내가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가요?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아니야. 니가 혹시 잘못한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너 자꾸 너만 잘했고 남들만 잘못했다고 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내가 잘한 것 같더라도, 혹시 또 모르니까 다투지 말고 차라리 상대방과 화해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상대방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잘한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기에 99%는 내가 잘한 것 같아. 하지만 1%는 내가 잘못한 게 있을지도 몰라.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그 1%로 인해서 사과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해의 비결인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교회 다니시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과 사람에게 하는 사과를 종종 혼돈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어떤 영화……를 제가 보지는 못했고 그냥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요약만 봤기 때문에 정확한지는 자신이 없습니다만, 그 영화 중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는 거예요. 어느 젊은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살해 당했는데, 나중에 어느 교회에 가보니까 그 죽인 범인이 교회 앞에서 간증을 하더래요.

그런데 그 간증 내용을 보니까, 자기는 교도소에서 있을 때 주님을 만났고, 주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니까 예수님이 자기 죄를 다 사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강단 앞에서 두 손을 번쩍 들고, 저는 이제 모든 죄를 다 사함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목격한 그 부모는 통곡을 하면서 그 교회를 나왔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겠어요? 정작 피해를 당한 자신들한테는 아무런 말도 없이, 자기는 교도소에서 주님께 회개했으니까 자신의 죄는 모두 해결되었다? 그러면 이제 된 건가요? 이건 화해도 아니고 화목도 아닙니다.

요즘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종종 사과를 해야 하는 마당에 어떤 단어를 쓰나요? 예, <유감>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그런데 이게 사과의 뜻이 있는 말인가요?

이 유감이라는 말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

広辞苑
思い通りにいかず心残りなこと。残念、気の毒

라고 되어 있어서, 이는 엄밀히 따지자면 사과하는 데에 쓰이기에는 적합하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서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말만 들으면, 피해를 당한 쪽 사람의 말인지, 피해를 가한 쪽 사람의 말인지를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왜 이런 유감인지 뭔지 하는 모호한 말을 사용하는 것일까요? 이유야 간단하죠. 자존심 상한다 이거예요. 내가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내가 사과를 한다 하더라도, 내 자존심만은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본래 사과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사과라고 하는 것은 본래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과를 하면서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겠다? 이건 물건을 사면서 돈을 안 내겠다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과를 한다면서 유감인지 뭔지 애매모호한 말로, 무슨 고개를 숙이는데 연막을 쳐서 고개를 숙인 게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모르게 하는 식으로 하는, 이걸 사과라고 해요. 이렇게 사과를 제대로 하지 못하니 어떻게 이웃과 화목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화해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회사에서 내가 만약에 지각을 했어요. 아니면 내 실수로 업무에 차질을 빚게 됐어요. 또는 내 실수로 회사나 거래처에 손해를 끼치게 됐어요. 그래서 사장님이 막 화를 냅니다. 이봐, 홍성필씨,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하고 지금 난리가 아닙니다.

그럴 때 그 자리에서 제가 “아, 사장님, 이번 일에 대해서는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라고 말해요? 그러면 뭐라 그러겠어요? “아니, 도대체 사과를 어디 그따우로 하냐고 혼이 더 나지 않겠어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웃과 화해하기 위해서, 이웃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물론 봉사도 중요하고 전도도 중요하겠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사과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만, 사과라고 하는 것은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사과를 제대로 하기만 하면 이것이 곧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이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이웃과의 화해를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실까요. 단순하게 질문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이랑, 이웃과 화해하는 것, 어느 쪽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까. 흥미로운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24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だから、祭壇の上に供え物をささ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もし兄弟に恨まれていることをそこで思い出したなら、
供え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いたままにして、出て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来て、その供え物をささげなさい。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 그리고 이웃과 화해하는 것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실 것도 같은데,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는 일보다 먼저 이웃과 다툼이 있거든 화해하고 나서 그 후에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보다 못한 것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과 화목하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해? 그건 참된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입니다. 지금은 좋은 일은커녕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모든 일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기쁘고 놀라운 일로 갚아주실 것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필수요건입니다.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이웃이 우리에게 잘해주었을 때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웃을 사랑해야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 사랑만큼 주님이 바라시는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좀 소박한 질문을 해볼까요? 우리는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요. 물론 여기에는 신학적인 답, 성경적인 답도 있겠습니다만, 한 마디로 말씀 드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의 지름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씀이 되겠지요.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만큼 중요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한 번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이웃 중에 좀 서먹서먹해진 분이 계신가요? 이번 기회에 한 번 다가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건네보세요.

저기…미안해……내가 좀 잘못한 게 있는 것 같은데 사과할게……

부끄러우신가요? 수치스러우신가요? 자존심 상하나요? 하지만 이 한 마디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나큰 축복이 쏟아질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합시다.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섬깁시다. 성령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모합시다. 이것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이웃한테 제대로 된 회개와 제대로 된 사과로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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