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회 목적이 있는 삶이란
2018년 6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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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목적이 있는 삶이란” 目的がある人生とは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있어서 보다 더 값지고, 보다 더 알차고, 보다 더 희망차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명확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 목적이 없다면, 이는 줄 끊어진 연이요, 돛대 없는 배요, 핸들 없는 자동차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명확한 목적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이런 내용의 설교말씀이었다면 제목을 <목적이 있는 삶>이라고 붙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 제목에는 굳이 마지막에 <…이란>을 붙여보았습니다.

여러분, 제가 앞서 말씀 드렸던 내용에 이상한 점이 있었을까요? 우리가 보다 값지고 알차고 희망찬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이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줄 믿습니다. 솔직히 이런 말은 어제 오늘 들은 말이 아니지요? 어렸을 때부터 학교 수업, 바른생활이나 도덕, 국민윤리 같은 과목에서 익히 들어왔던 내용입니다. 또는 공부 많이 하신 강사님들이 청소년들을 위한 강연이다, 뭐 이런 시간에 제법 할만한 내용이기도 하겠지요. 이는 절대 나쁜 말은 아닙니다. 지극히 타당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혹시 자녀가 있으신 분들이라면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런 말씀,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목적의식이 뚜렷해야 해……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자, 그렇다면 또 하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에게 있어서 성공적인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을 생각해 본다면, 아무래도 성경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이는 그야말로 성공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혹시 반대하시는 분 계십니까?


일단 여기까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 삶에서 분명한 목적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 삶은 성경적으로 살아야 한다. 맞나요?

자,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문제를 드리겠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많은 등장인물들 중에서 목적이 있는 삶을 살았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것도 특별히 어렸을 때부터 분명한 목적의식을 설정해 놓고, 그대로 살아갔던 사람을 세 명만 꼽으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요?

세 명이 아니라면 두 사람? 아니, 한 사람 정도는 꼽을 수가 있을까요?

아브라함이요? 아브라함은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었나요? 아브라함은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서 가나안 땅으로 갔었습니까?

창세기 12장 1절~3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主はアブラムに仰せら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生まれ故郷、あなたの父の家を出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しよう。あなたの名は祝福となる。
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わたしは祝福し、あなたをのろう者をわたしはのろう。地上のすべての民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은 시기가 언제예요? 아브라함이 아직 청년이었을 때였나요?

다음 구절, 창세기 12장 4절 후반부에 보면,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アブラムがハランを出たときは、七十五歳であった。

라고 기록합니다.

즉, 그의 인생은 청년은 고사하고 그의 나이 75세 때에 비로소 인생의 목적을 가졌다는 것이지요. 인생의 목적? 그게 무슨 구체적이었어요? 그냥 어딘지도 모르는 땅, 하나님이 그저 가라고 하는 땅을 향해서 가라고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뚜렷한 목적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대단히 불안한 인생의 목적, 그것도 이제 인생 황혼기에 갖기에는 너무나도 불안한 목적의식이었습니다.

모세는요? 그는 마흔 살까지는 애굽 왕실에서 자랐습니다만, 나이 마흔에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서는 광야에서 소리소문 없이, 그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3장 10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今、行け。わたしはあなたをパロのもとに遣わそう。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人をエジプトから連れ出せ。」

당시 모세의 나이가 몇 살이었습니까.

예, 성경에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그와 그의 형인 아론이 바로 왕 앞에 섰을 때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7장 7절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彼らがパロに語ったとき、モーセは八十歳、アロンは八十三歳であった。


모세도 그가 언제 핍박 받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내겠다고 자신의 인생목표를 정한 적이 있었나요? 아니요.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75세 때, 모세는 그의 나이 80세 때 비로소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나 모세의 인생이 실패작이었다. 모자란 인생이었다, 라고 할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아니요. 모자라기는커녕 엄청나게 성공적인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너무 나이 든 사람 이야기만 했나요? 그렇다면 젊은이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 그리고 이새의 아들 다윗. 이들은 모두 그의 나이 서른에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요셉은 당시 최고 선진국이었던 애굽의 총리가 되어 실질적으로 지배를 하게 되며, 다윗도 그의 나이 서른에 온 이스라엘과 유대의 왕이 됩니다.

그러면 요셉이 언제 애굽 총리가 되겠다는 인생의 목적을 가진 적이 있나요? 다윗이 언제 온 이스라엘과 유다 왕이 되겠다고 한 적이 있나요? 아니요. 그렇다면 그들은 목적이 없는 삶을 살았던 것인가요? 그 결과 값지지도 못하고 알차지도 못하고 성공적이지도 못한 삶을 살았나요? 아니요. 오히려 누구보다도 값지고 알차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앞선 질문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부터 뚜렷한 목적을 갖고 목적이 있는 삶을 살아야지만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우리는,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경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젊었을 때부터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그대로 성공적으로 살아갔던 사람이 없어요.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수수께끼, 어쩌면 앞뒤가 말이 안 맞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이 말씀에 대해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께 이 수수께끼를 풀어드리려고 합니다.


문장에는 주어나 동사, 목적어 등이 있습니다만,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 하면 아무래도 이 <주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쎄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요? 예를 들어서 <의무교육>이라는 말씀은 모두 아실 것입니다.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습니다만, 의무교육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자, 그렇다면 <의무교육>이라는 말, 이 <의무교육>이라고 하는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요? 왜 <의무교육>이라고 했을까요.

이 의무교육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반드시 받아야 할 의무가 있는 교육.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최소한 중학교까지는 졸업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하는 교육이다……혹시 제 말이 틀렸다고 하는 분 계신가요?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습니다만, 이 말은 분명히 잘못된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법 제8조에 보면 초등학교 6년의 의무교육에 대한 규정이 있습니다만 이 조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教育基本法
第五条 国民は、その保護する子に、別に法律で定めるところにより、普通教育を受けさせる義務を負う。

교육법 제8조,
모든 국민은 6년의 초등교육을 받을……의무가 있다? 아니요.

대한민국 교육법 제8조에는 “모든 국민은 6년의 초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음? 그럼 의무가 아니잖아요? 그럼 의무는 없는 건가요? 아니요. 다음 조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교육법 제8조는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국가와 지방공공단체는 전항의 초등교육을 위하여 필요한 학교를 설치경영하여야 하며 학령아동의 친권자 또는 후견인은 그 보호하는 아동에게 초등교육을 받게 할 의무가 있다.”

누구에게 의무가 있어요? 예, 의무는 아동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동의 친권자 또는 후견인이 아동에게 교육을 받도록 해줄 의무, 교육을 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동한테 교육을 받을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동한테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고, 아동의 보호자한테 그 아동이 교육을 받도록 해줄 의무가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의무교육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의무교육에서 <의무>의 주어는 아동이나 학생이 아닌 쉽게 말해서 그 학생의 <부모>한테 있는 것이지, 아동이나 학생은 교육을 받을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어가 바뀜으로 인해서 그 법조문의 해석, 나아가 그 나라가 교육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아브라함이나 모세, 요셉이나 다윗의 인생은 어떻게 해서 스스로 목적을 갖고 그대로 살아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목적을 갖는 주어>에 그 핵심이 있습니다.

즉, 이 세상 사람들은 <누가 내 인생의 목적을 가질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나>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겠지만, 아브라함이나 모세, 요셉이나 다윗은 본인들의 인생에 있어서 그 목적을 바로 다름아닌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10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信仰によって、アブラハムは、相続財産として受け取るべき地に出て行けとの召しを受けたとき、これに従い、どこに行くのかを知らないで、出て行きました。
信仰によって、彼は約束された地に他国人のようにして住み、同じ約束をともに相続するイサクやヤコブとともに天幕生活をしました。
彼は、堅い基礎の上に建てられた都を待ち望んでいたからです。その都を設計し建設されたのは神です。

아브라함은 자기 스스로가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목적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이것을 바로 성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형제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간 마당에 자기한테 무슨 권한이 있어서 자신의 삶을 계획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계획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창세기 39장 3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彼の主人は、主が彼とともにおられ、主が彼のすることすべてを成功させてくださるのを見た。

창세기 39장 23절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監獄の長は、ヨセフの手に任せたことについては何も干渉しなかった。それは主が彼とともにおられ、彼が何をしても、主がそれを成功させてくださったからである。

요셉이 자신의 삶에 대한 계획과 목적을 모두 하나님께 맡겨버렸더니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이 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노력했다는 구절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을 읽어보면 다윗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묻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께 모두 맡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나이 서른에 왕위에 오르고는 40년 동안이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 삶에 대해서 목적을 갖고 계획을 세운다>라는 말에 있어서 주어는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세우는 계획은 허망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계획은 확실하고 성공적인 계획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정한 목적이 있는 삶이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비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 목적을 맡겼습니다. 계획도 맡겼습니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실망하지 말기, 좌절하지 말기, 절망하지 말기, 포기하지 말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일이 좀 안 풀리거나 하면 쉽게 답답해하고 근심 걱정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그러지요.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제 지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다니고 있는 회사는 이름도 널리 알려진, 꽤 큰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회사에서 1년짜리 계약직 사원을 서너 명 정도 뽑기로 했었대요. 그래서 회사에서 공고를 냈는데, 그런데 세상에, 지원자가 몇 백 명이 몰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 중에는 유명 대학의 대학원 석사 박사까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멋도 모르고, 그렇게 스팩 좋은 사람들이 모였다니 잘 됐네요. 그럼 그런 사람들을 뽑았냐고 물어봤더니만, 그 분 하는 말이,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뽑냐는 거예요.

그래서 왜냐고 제가 물어봤더니만, 앞서 말한 대로 계약기간은 1년뿐이고 업무 내용도 단순업무보조 같은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월급도 높지 않죠. 그렇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취업준비중인 전문대졸업생 정도를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유명 대학의 대학원 석사나 박사들을 뽑아버리면, 결국 너무나도 단순한 업무 때문에 얼마 못 있고 그만둬버린다는 거죠.

그 말을 들어보니 정말 그럴 것 같았습니다. 유명 대학 그것도 석사나 박사까지 공부한 사람을 앉혀놓고 기껏 시킨다는 것이 단순한 업무보조이고, 그것도 기껏해야 1년짜리 계약직인데, 아무리 취업난이라고 해서 지원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오래 버티기는 힘들지 않을까 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결국 그 유명대학 석사 박사 출신들은 떨어졌다는 이야기인데, 당연히 떨어뜨린 이유에 대해서까지 회사에서는 설명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 정말 세상 살기 힘들구나. 내가 그렇게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해서 힘들게 유명대학 석사나 박사가 되었지만, 그깟 1년짜리 계약직도 떨어지는구나……이렇게 실망하고 좌절했다면 이게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사실은 그게 아닌데, 그 정도 스펙이라면 1년짜리 계약직이 아니라 정규직이나, 아니면 자기 회사보다도 더 좋은 곳에 지원해야 마땅할 것 갈아서, 너무나도 능력이 뛰어나서 떨어뜨린 것인데, 오히려 이것으로 인해서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고 세상을 한탄했다면, 이는 전혀 앞뒤가 안 맞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어릴 때에 생각하기를, 아, 나는 커서 군마에 가서 살 거야……이렇게 생각해서 지금 군마에서 살고 계신 분 계십니까. 그런 분은 아마도 안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왜 군마에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다 보니 일이 꼬이고 인생이 안 풀리고 어쩌고 어쩌다 보니 이곳 군마까지 오게 되셨습니까.

혹시 그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내가 지금 군마에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이러면서 사람들은 쉽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 부족한 우리 사람들의 생각일 뿐인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아무리 값어치가 없어 보이는 물건도 누군가가 그것을 100만원에 샀다면 그것은 100만원의 가치가 생기는 것입니다. 바로 어제 뉴스를 보니까 일본 시부야에서 피카소 그림의 경매가 있었는데, 피카소 그림 한 장이 10억엔에 낙찰되었다고 합니다. 만약에 제게 10억엔이 있었다면, 저라면 그 그림은 안 샀을 거예요. 하지만 10억엔에 팔렸으니, 아무리 제게는 대단하지 않은 그림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 그림의 가치는 이제 10억엔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죄 많고 부족한 우리의 가치는 얼마입니까. 우리의 가치,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을 봅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て言った。「あなたは、巻き物を受け取 って、その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ほふられて、その血により、あらゆる部族、国語、民族、国民の中から、神のために人々を贖(あがな)い、私たちの神のために、この人々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上を治め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보혈로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는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주님의 보혈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이 나를,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어요? 그렇다면 실망하십시오.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좌절하십시오. 절망하십시오. 예수님께서 포기하셨다면 우리도 포기하십시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의 보혈은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족한 우리에게 예수님의 보혈, 예수님의 생명과 동등할 정도로 높은 가치를 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버리시겠습니까. 우리를 어떻게 포기하시겠습니까.

잠언 16장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人は心に自分の道を思い巡らす。しかし、その人の歩みを確かなものにするのは主である。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이루실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랍고 축복된 계획이 있으십니다. 지금 힘들더라도 실망하지 맙시다. 좌절하지 맙시다. 절망하지 맙시다. 포기하지 맙시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깁시다.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예수님께 맡깁시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서, 하나님이 우리 삶과 목적의 주어가 되셔서 우리 삶을 계획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우리의 삶을 주님께 맡기고 우리의 계획과 목적을 주님 손에 맡기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성공으로 가는 삶, 승리하는 삶을 얻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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