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회 축복의 씨앗
2018년 6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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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편 126편 5절~6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축복의 씨앗” 喜びの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인물 중에는 잇큐상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승려였는데, 머리가 대단히 좋아서, 이 어린 잇큐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더러는 이 사람이 그저 상상 속의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신 것 같습니다만, 아니요. 15세기 경에 쿄토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실존인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이 이 잇큐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기 집 가보로 삼고 싶으니까, 좋은 글을 하나 좀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청을 흔쾌히 수락한 잇큐. 즉석에서 붓으로 쓱쓱 써 내려갔는데, 그 글이 참 묘합니다. 내용이 뭐냐 하면,

“부모가 죽고, 자식이 죽고, 손주가 죽는다”

이걸 보고 그 부탁한 사람은 기겁을 합니다. 아니 무슨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서 좋은 말을 써주면 가보로 삼으려고 했건만, 이건 무슨 죽는다는 얘기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잇큐를 보고 따졌답니다.

아니, 좋은 말을 써달라고 했는데, 부모가 죽고, 자식이 죽고 손주가 죽어? 무슨 이런 재수없는 소리를 써놨냐고 화를 내면서 찢어버리려고 하자, 잇큐가 빙그레 웃으면서 이랬다고 합니다.

“이 보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손주가 죽고, 그 다음에 자식이 죽고, 그 다음에 부모가 죽으면 좋겠다는 겐가”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참 오묘한 말인 것 같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다 죽는데, 그 순서가 부모가 먼저 죽고, 그 다음에 자식이 죽고, 그 다음에 손주가 죽고 그래야 정상이고 복된 것이지, 부모와 자식이 아직 살아 있는데 손주가 먼저 죽고, 그 다음에 자식이 죽고, 마지막에 부모가 죽는다고 한다면 이는 불행도 이런 불행이 없는 것이겠지요.

이 이야기를 잇큐가 했다는 설도 있고, 센가이라는 사람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처럼 비슷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순서에 따라서 의미가 대단히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있어서는 순서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는 혼자서 힘들어 하는 일도 적지 않게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집에서 공부를 하려고 하면 왠지 청소를 하고 싶어져요. 시험기간만 되면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책이 읽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이게 사람 심리라는 게 참 이상하기도 합니다.

음식을 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죠. 요리라고 하기에는 좀 거창하지만, 라면을 만들 때에 본다면 이것도 순서와 차례가 있습니다. 일단 물을 넣은 다음에 끓기 시작했을 때 라면을 넣어야지, 물과 라면을 먼저 넣고 끓이면 나중에는 면이 퉁퉁 불어버리고 맙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도 문제를 한 가지 내겠습니다. 기쁨과 축복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어느 쪽이 먼저일까요. 조금 더 알기 쉽게 말씀 드리자면 기뻐하면 축복이 온다……가 맞을까요, 아니면 축복이 오면 기뻐한다……가 맞을까요.

가끔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목에 힘을 좀 줍니다. 자기가 교회에 좀 오래 다녔다, 직분을 받았다 하면 그게 목에 힘을 줄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잘난 척을 하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만,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잘 모를 때도 적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기뻐하면 축복이 오나요? 아니면 축복이 오면 기뻐하나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축복이 오고 좋은 일도 일어나고 해야지 기뻐하는 것 아닌가요? 아직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기뻐하기부터 하라는 건 이상한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속담은 무엇입니까.

복이 오면 웃어요? 아니면 웃으면 복이 와요?

예, 세상에 있는 속담에 보면 복이 온 다음에 웃는 게 아니라,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우울해지고 고개를 숙이고, 표정이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단단히 결심을 하고 어디로 가요? 예, 기도원으로 갑니다. 그리고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해요. 그런데 응답이 없으면 어떻게 해요? 아, 정말 답답해합니다.

주여~ 주여~ 응답하소서~ 불로~ 불로~ 불로~

저도 가끔 기도원에 가서 그런 모습을 보면요, 그런 분이 옆에 있으면 정말 참 안쓰럽습니다. 제가 기도원에 그리 많이 가본 편은 아닙니다만, 기도원에 가 보면, 정말 기쁨이 없습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슨 죄를 짓고 끌려온 사람들 같습니다. 금식을 해도 기도를 해도 예배를 드려도 얼굴에 기쁨이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축복이 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아는 분이 있었습니다만, 이 분 아버님이 탤런트, 중견 배우세요. 저도 성함을 듣고는 몰랐는데 얼굴을 보니까 알겠더라구요. 이 아버님은 상당히 젊었을 때부터 배우를 해오셨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 아버님이 어느 날 자기한테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는 겁니다.

이상하게 자기가 마음이 기쁘고 좋을 때에는 배역이 좋은 게 들어온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 마음 상태가 좀 안 좋아요. 집안에 우울한 일이 있거나 근심 걱정거리가 있어요. 그러면 이상하게 무슨 살인범, 전과자, 사기꾼……이런 배역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마 자기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들 눈에는 자신의 지금 상태가 어떤지 보여서 그런가보다……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주변 사람들보다 덜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보십니다. 얘가 지금 축복을 받을 만한지 아닌지를 살펴보십니다.

아니, 좀 좋은 배역도 주고, 주인공 자리도 주고 그래야 표정도 좀 펴지고 그러지, 좋은 일도 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어? 사람 생각으로는 이럴 수 있죠. 하지만 현실에서는 뭐예요? 좋은 일이 들어오고 난 다음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니까 좋은 일들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상대방을 위해서요? 아니요. 우리, 나 자신을 위해서 상대방을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니가 애써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정말 나쁜 사람이면 내가 벌을 줄게. 너는 그냥 용서해. 그게 너를 위한 거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은 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항상 기뻐하라”

いつも喜んでいなさい。

빌립보서 2장 18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あなたがたも同じように喜んでください。私といっしょに喜んでください。

빌립보서 4장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いつも主にあって喜びなさい。もう一度言います。喜びなさい。

이 외에도 성경은 여기저기서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마음이 슬프고 근심 걱정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억지로 표정관리 하라는 건가요?

그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위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뻐해야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쁨이 무엇이길래 축복을 주신다는 것일까요. 누구는 이러실지도 모르겠지요.

“좋은 일도 없는데 기뻐한다면 그게 정상적인 것이냐.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 아니냐.”

여러분께서도 혹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답을 풀 힌트가 바로 오늘 말씀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26편 5절~6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涙とともに種を蒔く者は、喜び叫びながら刈り取ろう。種入れをかかえ、泣きながら出て行く者は、束をかかえ、喜び叫びながら帰って来る。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70년이 지난 후에 귀환을 하게 되는데 그 때의 모습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제 포로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그리고 서러운 타향살이를 마치고 내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아 꿈에도 그리던 내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면 뭘 합니까. 나라의 땅은 온통 황무지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배가 고픈데 먹을 게 없어서, 당장 나무에 난 열매를 따서 먹어도 모자랄 판에, 벌판에는 아무 것도 없고 이제 자기들 손으로 하나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니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입니까.


그래서 여기 보면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다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구절을, 그냥 아, 지금 힘들어도 고생을 하면 나중에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식의 세상적인 무슨 윤리책에 나올 법한 내용으로 이해를 한다면, 이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지요.

우리가 자세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합니다. 여러분 혹시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리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 사람 지금 억지로 종살이를 하면서 씨를 뿌리고 있는 것일까요? 난 일을 하기 싫은데 주인이 하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인가요?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기뻐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그냥 아무 일도 없는데도 히죽히죽 웃고 있는 사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좋아하실까요? 만약에 우리 주위에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히죽히죽 웃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예, 잘 보살펴 드려야 합니다. 혹시 어딘가 몸이 불편한 분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이건 농담이 아니라 진담입니다. 어쩌면 적절한 치료가 필요한 분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런 분들에게 축복을 주신다는 것인가요? 항상 기뻐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기뻐한다는 건 뭐예요? 그래. 웃는 것, 그럼 시도 때도 없이 히죽히죽 실실 웃는 것?

여러분, 믿음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은 그러라는 게 아닙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마음에는 감사가 넘칩니다. 희망이 넘칩니다. 감사와 희망은 절망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좌절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신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믿음이 넘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기쁨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이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합니까. 그렇습니다. 행동을 합니다.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기뻐했더니 축복을 받았더라……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わたしの父は今に至るまで働いておられます。ですからわたしも働いているのです。」

여호와 하나님도 예수님도, 귀찮은 일은 사람들한테 시키면서, 본인들은 가만히 앉아 계신,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실천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과 일을 해야지요. 하나님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 그냥 가만히 앉아서 히죽히죽 웃고 있을 시간이 있습니까.

마음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가나안 땅 정복을 앞두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 1장 9절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わたしはあなたに命じたではないか。強くあれ。雄 々(おお)しくあれ。恐れてはならない。おののい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神、主が、あなたの行く所どこにでも、あなたとともにあるからである。」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가만히 앉아서 축복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힘써 싸웠습니다. 모세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린다고 합니다. 지금 내가 배고프다고 내 손 안에 있는 씨를 먹어버리면, 지금 그 순간은 배가 조금 부를지 모르지만, 이제 그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제 고국으로 돌아간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렸습니다. 무엇을 뿌렸을까요. 물론 곡식이었겠지요. 하지만 농사에 대해서 조금 지식이 있는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논이나 밭이라고 아무데나 무조건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자란다는 보장이 있나요? 아니요. 계속 가꾸어 주어야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뿌린 그 땅은 무려 70년 동안이나 방치되었던 땅이었습니다. 몇 번 간다고 해서 몇 개월 후에 수확할 수 있다고 하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이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마치게 하고 다시 이스라엘 돌려보내셨다. 그렇다면 우리를 굶어 죽이기 위해서 보내셨을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래. 싹이 나고 수확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이제 씨를 뿌려야 해.


이사야 43장 19절~20절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見よ。わたしは新しい事をする。今、もうそれが起ころうとしている。あなたがたは、それを知らないのか。確かに、わたしは荒野に道を、荒地に川を設ける。
野の獣、ジャッカルや、だちょうも、わたしをあがめる。わたしが荒野に水をわき出させ、荒地に川を流し、わたしの民、わたしの選んだ者に飲ませるからだ。

광야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순종하는 사람, 이것이 바로 기쁨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기쁨이 있다고 해서 항상 웃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 왜 눈물을 흘리겠습니까. 그것은 내 생각대로 안 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포로로 잡혀가는 일은 없어야 하잖아요. 포로로 잡혀갔다고 해도 얼른 풀어주어야 하잖아요. 70년이 뭐예요? 70년이. 그리고 풀어주어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했다면 옥토를 주어야 하잖아요? 온 땅이 황무지가 되고 말았어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참 눈물 밖에 안 나와요.

하지만 뭐예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쁨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쁨이 있는 사람은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과거에 포로로 끌려갔었으면 어때요? 지금 눈앞이 황무지면 어때요? 지금 씨를 뿌려서 그 열매를 30배 60배 100배로 거둘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쁨을 바라보고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심어야 할까요.

갈라디아서 6장 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自分の肉のために蒔く者は、肉から滅びを刈り取り、御霊のために蒔く者は、御霊から永遠のいのちを刈り取るのです。

우리가 우리 욕심을 따라 심기만 한다면 썩어질 것밖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말이 너무 어려우신가요?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기쁨을 심어야 합니다. 그래야 축복이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축복은 권리가 아닙니다. 의무입니다.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 먼저 기뻐합시다. 일단 기뻐합시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실 것이기 때문에 기뻐합시다.
하나님께서 광야에 길을 내주실 것이기 때문에 기뻐합시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기뻐합시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쁨은 단순한 감정표현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이제 기쁨이라고 하는 축복의 씨앗, 기쁨이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주님 앞에 드림으로 말미암아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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