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회 참된 친구
2018년 6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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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참된 친구” まことの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전에 하버드대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マイケル・サンデル)이라는 사람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쓰고 이에 대한 강의를 통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책을 구입하지는 않고, 그저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강연 모습을 몇 번 보았을 뿐이었습니다만, 솔직히 저는 그다지 감명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좀 헷갈릴지는 모르지만 정의라는 말의 정의. 정의라는 말에 대한 참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정의>라고 하는 말의 뜻을 찾아보니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진리>는 무엇이고 <도리>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또 찾아보니까, <진리>는 참된 이치, 참된 도리……라고 나와 있고, <도리>는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 길>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正義:正しい道義。人が従うべき正しい道理。 人の道にかなっていて正しいこと。
道理:物事の正しいすじみち。また、人として行うべき正しい道。

글쎄요. 머리가 좋고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은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게는 무슨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의>라고 하는 단어가 너무나도 막연해서 그 의미를 찾아보니, 그 뜻에 대한 설명도 역시 막연한 단어로만 되어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예전에 제가 한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어떤 사회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계 국가 분포를 분석하는 데에 있어서 그 나라의 인구를 기준으로 하면, 그 지역에 따라 여러 현상을 분석할 수 있고 예측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정의>라는 애매모호한 말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말이 필요할까 하는 고민을 해보았을 때, 저는 바로 <이익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이익>이라고 하는 말을 기준으로 설명하면 의외로 많은 막연한 부분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범죄가 발생을 합니다. 조금 무서운 이야기를 하자면 살인사건이 일어났어요. 어떤 사람이 살해 당했습니다. 그런데 범인을 알 수 없어요. 그럴 때 단서가 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그 주변인물입니다. 그 사람의 주변인물들 중에서 그 피해자가 살해 당함으로 인해서 가장 이익이 되는 사람, 이 사람이 범인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지요.

이는 테러 같은 사건에서도 통합니다. 어디서 어떤 테러 사건이 발생했어요. 그런데 누가 저질렀는지 밝혀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를 알아낼 단서가 바로 이 테러사건이 일어남으로 인해서 가장 이익이 되는 사람이나 집단이 어디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나아가서 <정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 절대적인 정의가 있을까요?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까 북한에서는 한국 드라마를 보았다는 것으로 처형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요. 얼마 전에 북미회담이 열린 싱가포르에는 형벌 중에 태형이 있다고 합니다. 태형, 그러니까 채찍으로 사람을 때리는 형벌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정의에 부합하느냐 하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자유의 나라라고 하는 미국은 어떻습니까.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총기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까다로운 규제를 받아야 합니다만, 미국 헌법에서는 국민이 무기를 휴대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국민들이 무기를 소유한다는 것을 부당하다고 하면 미국은 정의가 보장되지 않은 사회라는 말이 되고 맙니다. 물론 총기규제에 대한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에는 정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럼 국민이 무기를 소유한다는 것을 당연한 권리라 규정하고, 이것이 정의라고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나 일본도 똑같이 무기를 갖는 것이 정의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 하면 미국은 국민이 무기를 소유하는 것을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국민들의 무기 소지가 <정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국민들이 무기를 소유하는 것을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의>가 아닌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무슨 절대적인 정의라고 하는 척도를 갖다 대는 것은 오히려 올바른 <정의>가 무엇인가 하는 내용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는 지방선거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어느 쪽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말씀을 드리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만, 저는 정치에 있어서는 정답이란 없으며 오로지 이익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A당과 B당이 있으면 어느 한 쪽이 정답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맞는 쪽을 선택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정치인이 이런 말을 했다지요? 정치인이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중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정치인이다. 물론 소신 있는 정치인이 있긴 하겠습니다만, 선거전에 입후보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당선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해줄 것 같은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이나, 아니면 그 사람이 소속된 정당을 보고 판단하게 되는 것인데, 여기에는 어디에도 절대적인 정답이 있을 수는 없고, 다만 유권자들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익>이라고 말로만 하면 이는 무슨 이기적인 것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익>이라는 관점을 본다면 대단히 심플하면서도 서로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척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정의>를 규정한다면, <정의>라고 하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개인이나 해당 공동체에 있어서 <이익>이 되는 개념 또는 행위가 바로 <정의>다 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이익>에 대한 인식이 같아야지만 한다는 말이 됩니다. 어떤 한 행위가 누구한테는 이익이 되는데 누구한테는 손해가 되요. 이렇게 되면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한 회사에서 A부서에서 어떤 일을 했는데, 이 일이 A부서에는 이익이 되지만 B부서에는 손해가 되는 일이에요. 그러면 이 두 부서는 한 회사에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공동체라고 해서 무슨 거창한 단체나 회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께서는 주변에 진정한 친구가 있으신가요? 어떤 사람이 진정한 친구가 되겠습니까. 얼굴이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 머리가 좋은 사람? 아니면 돈 많은 사람?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면 자신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자신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이익에 대한 조건이 같아야 합니다. 아무리 잘 생기고 예쁘고 머리가 좋고 돈 많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이익을 누릴 때에 상대방도 함께 이익을 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무리 좋은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익을 보는데 상대방이 손해를 봐요. 아니면 상대방이 이익을 보는데 내가 손해를 봐요. 이렇게 된다면 이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 안에서 누구와 친구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과 친구가 되셔야 합니다. 진정한 친구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바로 이익에 대한 조건이 같아야지만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과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죠. 예수님께 이익이 되는 조건과 나에게 이익이 되는 조건이 같아야지만 예수님과 나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도, 아무리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흘려 주셨을 정도로 사랑해주신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나에게는 이익이 안 된다거나, 또는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예수님께 있어서는 이익이 안 된다거나 하면 예수님과 진정한 친구 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는 말씀이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ガラテヤ人への手紙 1章 10節
《 いま私は人に取 り入ろ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いや。神に、でしょう。あるいはまた、人の歓心を買おうと努めているのでしょうか。もし私がいまなお人の歓心を買おうとするようなら、私はキリストのしもべとは言えません。》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사람들>이 항상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곧 우리의 이웃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간혹 성경에서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반대 되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비와 비슷한 개념이 바로 <세상>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과 <세상>이라고 하면 이는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오늘 이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6절부터 10절까지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6절~10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私は、キリストの恵みをもってあなたがたを召してくださったその方を、あなたがたがそんなにも急に見捨てて、ほかの福音に移って行くのに驚いています。
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に福音があるの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をかき乱す者たちがいて、キリストの福音を変えてしまおうとしているだけです。
しかし、私たちであろうと、天の御使いであろうと、もし私たちが宣べ伝え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るなら、その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私たちが前に言ったように、今もう一度私 は言います。もしだれかが、あなたがたの受け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ているなら、その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いま私は人に取 り入ろ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いや。神に、でしょう。あるいはまた、人の歓心を買おうと努めているのでしょうか。もし私がいまなお人の歓心を買おうとするようなら、私はキリストのしもべとは言えません。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아~ 여러분, 예수만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갑니다~ 교회에만 나오세요~ 그러면 천국 갑니다~

이런 말을 하면 좋아하겠지요. 하지만 이런 말씀은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わたし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みな天の御国に入るのではなく、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みこころを行う者が入るのです。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마가복음 9장 47절~48절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もし、あなたの目があなたのつまずきを引き起こすのなら、それをえぐり出しなさい。片目で神の国に入るほうが、両目 そろっていてゲヘナに投げ入れられるよりは、あなたにとってよいことです。そこでは、彼らを食ううじは、尽きることがなく、火は消えることがありません。

이런 말씀은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그러면 이런 말씀을 전하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바울도 아마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지금 한 사람이라도 전도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서 해도 모자랄 판에 듣기 거북한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입니다.

いま私は人に取り入ろ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いや。神に、でしょう。

口語訳:今わたしは、人に喜ばれようとしているのか、それとも、神に喜ばれようとしているのか。

이 부분을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적고 있어요.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현대인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씀 드리자면 이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 마음에 들게 해야겠습니까. 아니면 사람들 마음, 세상 사람들 마음에 들게 해야겠습니까……하는 것이지요. 내가 하나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 눈치를 보게 되다면 나는 이미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5절을 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わたしはもはや、あなたがたをしもべとは呼びません。しもべは主人のすることを知らないからで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友と呼びました。なぜなら父から聞いたことをみな、あなたがたに知らせたからです。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제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친구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익에 대한 조건이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이익이 되는 일이 곧 우리에게 이익이 되고,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곧 예수님께 이익이 될 때 예수님과 우리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우리는 영원한 친구로만 있게 되나요?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절~8절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私たちは喜び楽しみ、神をほめたたえよう。小羊の婚姻の時が来 て、花嫁はその用意ができたのだから。花嫁は、光り輝く、きよい麻布の衣を着ることを許された。その麻布とは、聖徒たちの正しい行いである。」

이제 마지막 날에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로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혼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それゆえ男はその父母を離れ、妻と結び合い、ふたりは一体となるのである。

남자와 여자가 그 때까지 부모라고 하는 영향력 밑에 있다가, 거기서부터 떠나서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 바로 혼인입니다. 혼인에 이르기까지는 그 기간은 <친구>로 있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친구 관계로 있으면서 과연 서로에 있어서 이익의 조건이 맞는지를 살피는 기간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결혼을 했는데, 알고 보니 남편과 부인이 각각 서로에게 있어서 이익의 조건이 다르다면 이 얼마나 큰 문제이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이는 한 몸을 이룬다고는 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까지 서로를 살피고 이익의 조건이 맞는지 안 맞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를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씀 드립니다만, 이익이다 아니다라고 해서 무슨 돈이나 재산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일에 대해서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상대방은 기쁨이 아닌 슬픔이나 고통을 느껴요. 뭐 좀 유치한 예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쪽은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다른 한쪽은 영화를 보는 것을 아주 힘들어 합니다. 한쪽은 유원지에 놀러 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다른 한쪽은 그게 너무나도 고달프다고 해보세요. 이렇게 되면 서로 맞기가 힘들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시간. 이는 어쩌면 예수님과 연예하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이익이 되는 것을 기뻐하는지 아니면 안 기뻐하는지를 살피시고 계십니다.

뭐, 그래요. 세상에 살아가면서 연예를 하다 보면, 잘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헤어질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어때요? 속된 말로 남자나 여자가 어디 한 둘입니까.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우리와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그렇죠. 절대로 헤어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로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익의 조건과 나에 대한 이익의 조건을 똑같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주일에 함께 예수님이 머리 되신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 이익이 되는 일과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일인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일, 사람의 방식, 세상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는 일,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あなたがたは、自分に関する限り、すべての人と平和を保ちなさい。

그래, 내 성격 같아서는 너 같은 놈은 꼴도 보기 싫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내가 너와 화해하고 화목하게 지내겠다……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하나님 이익의 조건에 맞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좋게 하시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좋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삶을 보내시겠습니까. 사람들 마음에 드는 삶을 보내시겠습니까.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삶,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이것이야말로 둘도 없는 정의이자 둘도 없는 진리인 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남은 삶 동안, 우리 주님과 진정한 친구가 되어, 함께 걸으며 함께 살아가면서, 마지막 날에 마침내 우리 주님과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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