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회 믿음의 졸음운전
2018년 7월 15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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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1장 1절~4절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졸음운전” 信仰の居眠り運転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운전을 하면서 무서운 것 중의 하나가 이 졸음운전입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졸음운전이라는 것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졸음운전이라고 해도 어디서부터가 졸음운전인지에 대해서는 견해에 따라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제가 말씀 드리는 졸음운전은 <아~졸립다~>라고 하면서 졸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깜빡>하고 순간적으로나마 수면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혹시 졸음운전을 해보신 적이 있으시거나, 아니면 까딱 잘못했다가 졸음운전을 할 뻔한 적이 있으셨다면, 정말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실 수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 크나큰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졸음운전……저도 솔직히 말씀 드려서 해 본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아니고 예전에 미국에서 살고 있을 때에 해본 적이 있습니다. 아, 그거 정말 아찔합니다. 미국에서 한 고속도로를 밤에 달리고 있었는데, 정말 깜빡 졸고 보니까 차선이 두 개나 이동해 있었습니다.

정말 이건 진지하게 말씀 드립니다만, 피곤할 때는 무조건 휴게소에서 쉬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눈앞에 좋은 차가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요즘은 말씀을 전할 때마다 자동차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좋은 차가 한 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고 싶겠습니까. 가족들을 데리고 좋은 드라이브 코스를 쌩쌩 달리는 것, 그러면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설마 좋은 차가 생겼으니 도로 정체가 심한 곳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뭐, 꼭 좋은 차가 아니더라도 막히는 곳보다는 시원하게 뚫린 곳을 달리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말씀 드린 졸음운전, 어디서 하게 되나요? 꽉 막힌 곳에서 졸음운전을 해요? 아니요. 가속페달 밟았다가, 브레이크 밟았다가 하고 정신이 없는데 언제 졸음운전을 할 새가 있습니까.

아니면 문제가 많은 자동차를 몰면 졸음운전을 하나요? 얼마 전에 동경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만, 목적지까지 거의 다 가서 기어에 좀 문제가 생겼어요. 차가 잘 안 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어땠겠어요. 그 때까지 피곤해서 올락말락 하던 잠이 순식간에 확 달아나버립니다.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졸음운전은 차에 문제가 많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자동차 상태가 대단히 좋을 때 하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를 보면 고속도로를 달리더라도 적절하게 커브가 있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졸음운전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같은 경우, 특히 서부 쪽에 외곽에 나 있는 고속도로를 보면 정말 하염없이 일직선인 곳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주말이나 그렇지 않으면 차도 많지 않아요. 그러면 자동차들도 쌩쌩 달립니다.

그것도 그냥 달리는 것이 아니에요. 한국이나 일본에도 아마 그런 기능이 있는 차들이 있을 겁니다만, 가속페달을 계속 밟고 있으면 다리가 피곤하니까, 일정 정도 가속해서 락을 걸어놓습니다. 그러면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어도 브레이크를 밟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 속도로 달립니다. 멋지죠? 그렇게 해놓으면 참 다리가 편안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해놓고 깜빡 잠이 들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통 졸음운전이면 잠이 든 순간 페달을 밟는 힘도 빠집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감속도 되겠지요. 하지만 속도를 예를 들어서 100킬로면 100킬로로 딱 고정시켜놓은 상태에서 발을 떼고 있었는데, 깜빡 잠이 들어서 핸들이 다른 곳으로 꺾였어요. 하지만 속도가 고정이 되어 있으니까 그 속도 그대로 도로에서 벗어납니다. 그런 상태에서 달리다가 뭔가에 부딪히거나, 뒤집히거나 하면 이건 그대로 100프로 사망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경우에 졸음운전을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초보운전 때 졸음운전을 할 수 있을까요? 저도 기억납니다만, 맨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아니 어떻게 운전을 하는데 졸음이 올 수가 있을까 했어요. 그렇잖아요? 가속페달도 밟아야죠, 브레이크도 신경 써야죠. 앞에도 봐야죠. 사이드 미러, 백 미러를 살펴야죠……. 고속도로를 탔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봐야 하는 표지판이 왜 그렇게 많은지요. 출구가 가까워지면 차선도 바꿔야죠, 속도도 봐야지요, 그리고 또 경찰차가 어디서 오지나 않을까 하는 것도 봐야지요……. 이건 뭐 졸 새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운전에 익숙해지고 나면, 어떻습니까. 예, 언제 그랬냐는 듯이 피곤하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기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참 이상합니다. 우리가 졸음운전을 언제 하게 되냐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 면, 운전하기에 가장 나쁜 조건? 아니요, 운전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에 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길이 막힌 것도 아닙니다. 아주 뻥뻥 뚫렸어요. 그리고 귀찮게 오른쪽 왼쪽 커브도 없어요. 일직선 도로입니다. 자동차 컨디션도 대단히 좋아요. 쌩쌩 잘 나갑니다. 가속페달도 고정시킬 수 있는 기능도 있어요. 그리고 운전경력도 이제 초보가 아니에요.

바로 이렇게 완벽한 상황일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졸음운전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11장 1절부터 봅니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年が改まり、王たちが出陣するころ、ダビデは、ヨアブと自分の家来たちとイスラエルの全軍とを戦いに出した。彼らはアモン人を滅 ぼし、ラバを包囲した。しかしダビデはエルサレムにとどまっていた。

당시 다윗의 나이를 대략 50 정도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 날에는 오랜 세월 동안 사울에게 쫓겨가며 도망 다녔던 고달픈 시기를 보냈던 다윗, 그러나 그는 나이 서른에 왕이 되어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고 하니, 나이 50이라고 하면 이제 왕위에 오른 지도 2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의 권력은 확고부동했으며 누구도 그의 자리를 넘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휘하에는 유능한 장군들이 있었지요. 다윗과 그들은 그 동안 주변국들을 공략해서 이제는 이스라엘에 대해 직접적인 위협이 될만한 나라들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다윗은 국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대단히 안정적인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암몬군과의 전쟁을 보더라도 굳이 다윗이 출전하지 않고도 유능한 부하만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었습니다. 완전히 이긴 싸움이었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그렇게 생각을 했기 때문에 다윗은 전쟁에 나가지 않고 그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다음에 2절을 봅니다.

사무엘하 11장 2절입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ある夕暮れ時、ダビデは床から起き上がり、王宮の屋上を歩いていると、ひとりの女が、からだを洗っているのが屋上から見えた。その女は非常に美しかった。

이 기록에 의하면 다윗은 저녁 때에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었다고 합니다. 지금 시기가 어떤 상황입니까. 상대가 아무리 약소국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지금 전쟁은 전쟁입니다. 그리고 왕이라고 한다면 군대의 최고통수권자입니다. 전쟁 상황을 보고 받고, 이를 분석하고, 명령을 내리고 지휘를 해야 할 왕이, 밤새도록 무엇을 했는지 모르지만, 낮에는 계속 자다가 저녁 때 일어나서 왕궁을 산책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모습을 그의 어머니가 보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야 이 놈아. 지금 니 부하들은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데, 전쟁 작전을 세우지는 않고 실컷 퍼 자다가 이제 부시시 일어나서 어슬렁 어슬렁 걸어다녀?

뭐, 이렇게 혼을 내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혼이 날 일은 사실 그 뒤에 더 있죠?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이렇게 바깥쪽을 보니까 어떤 여인이 목욕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집 앞마당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위쪽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그 안이 보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더구나 왕궁이라고 하니 다른 일반 주택보다는 높았으리라 하는 점은 쉽게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바깥 쪽을 봤는데 어떤 여인이 목욕을 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렇다면 그런 모습이 보이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아이쿠. 이런……뭐 이러면서 고개를 돌려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딱한 우리의 다윗은 어땠습니까. 그 목욕하는 여인을 가만히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참 아름답네……뭐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범죄 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다음 구절을 봅니다.

사무엘하 11장 3절입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ダビデは人をやって、その女について調べたところ、「あれはヘテ人ウリヤの妻で、エリアムの娘バテ・シェバではありませんか」との報告を受けた。

이 말을 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다른 번역문을 보더라도 다 이런 식이에요. 그냥 “아, 저 여인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입니다”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는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헷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는 본래 이방인이라고 하는 것을 뜻합니다만 아마도 개종을 해서 이스라엘 군대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우리아는 군대에서 일반 사병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하 23장 39절에 의하면 헷 사람 우리아는 삼십 칠인 용사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 수가 80만에서 110만 정도라고 하는데, 이게 어느 정도인지 잘 감이 안 오시죠? 참고로 2017년 한국 군인의 수는 61만 8천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별을 단 장군들의 수는 400여명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62만명 정도 되는 한국 군에서 400여명 정도 안에 들어가도 대단히 높은 지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 군은 이보다도 더 많은 80만에서 110만의 병력 중에서 서열 37위 안에 들었다고 하면, 이는 대단히 높은 지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하면, 그 정도의 고위급 장군인 우리아였다고 한다면 당연히 다윗도 우리아를 알고 있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도 알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히 제 추측이 아닙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서 저기 목욕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뭐라고 했다구요? 예, “우리아의 아내입니다”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아니니이까”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아니, 지금 몰라서 물으세요? 저 여자가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라고 하는 건 왕도 알고 계시잖아요” 마치 이런 식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생각의 교차가 이루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지금 대통령이나 총리의 권력이 막강하다 하더라도 옛날 왕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론 이 점은 그 기준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만, 생각해보면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은 아무리 대통령이나 총리라고 하더라도 돈이나 여성에 대한 문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만, 옛날의 권력자라고 하면 얻을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돈과 여자……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무엘하 5장 13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두었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

ダビデはヘブロンから来て後、エルサレムで、さらにそばめたちと妻たちをめとった。ダビデにはさらに、息子、娘たちが生まれた。


그가 몇 명의 처첩을 두었는지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왕이었던 그가 단순히 처첩을 많이 두었다는 것만을 가지고 죄라고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의 경우에는 더 구체적인 숫자가 나오는데 열왕기상 11장 3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됩니다.

열왕기상 11장 3절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彼には七百人の王妃としての妻と、三百人のそばめがあった。その妻たちが彼の心を転じた。

그러니까 후궁과 첩을 합하면 천 명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만, 여기서도 솔로몬의 죄악을 단순히 후궁이나 첩을 많이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방 여인들이 가지고 있던 우상들을 솔로몬한테도 섬기게 했다는 것을 용납했다고 하는 점을 하나님께서는 문제시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밧세바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죠.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십계명 중에서 마지막 계명이 출애굽기 20장 17절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7절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あなたの隣人の家を欲しがってはならない。すなわち隣人の妻、あるいは、その男奴隷、女奴隷、牛、ろば、すべてあなたの隣人 のものを、欲しがってはならない。」

제왕이 아무리 많은 처첩을 두든 후궁을 두든 문제게 되지는 않았으나, 다른 사람의 아내를 탐한다는 것, 이것은 아무리 제왕이라 한다 하더라도 큰 죄였던 것이지요.


다윗의 그 부하는, 왕이 그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알아보라는 말을 했을 때, 이미 왕이 그 여인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겠지요.

왕은 암암리에 그 부하에게 “저 여인을 나한테 데려와”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하는 왕에게 말합니다.

“왕이시여.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이러시면 안 됩니다. 왕도 알다시피 저 여인은 우리아 장군의 아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한 번 유혹에 사로잡힌 다윗은 막무가내입니다. 결국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최측근인 우리아 장군의 아내를 빼앗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충신 우리아 장군을 전쟁터에서 일부러 죽도록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이 죄가 얼마나 큽니까.

결국 이 결과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첫 아이는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의 불행은 이어집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이 배 다른 누이동생 다말을 겁탈합니다. 이에 분을 품은 오라버니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지요. 그리고 나중에는 그 압살롬이 다윗을 향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는 불행이 이어져서, 다윗은 도망을 치게 됩니다. 그리고 끝내는 압살롬마저도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역사입니까.

잠언 7장 22절~23절에 보면 유혹에 끌려가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

彼はほふり場に引かれる牛のように、愚か者を懲らしめるための足かせのように、ただちに女につき従い、
ついには、矢が肝を射通し、鳥がわなに飛び込むように、自分のいのちがかかっているのを知らない。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맞는 자라고까지 하신 다윗도 이와 같은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믿음의 졸음운전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권력기반도 확고하고 돈과 명예도 넘쳐납니다. 누구도 자신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탄탄대로, 커브도 없는 일직선 도로에서 졸음운전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동차에 타고 있는데, 운전하는 사람이 존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흔들어 깨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길이 안 막히고 뻥뻥 뚫리기만 한다고 조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긴장된 상태라면 졸음이 안 오도록 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도 보세요. 나라가 평화롭고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없으면 누구나 다 조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해이해진다면 이는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라 하더라도 언제든지 졸음운전에 빠질 수가 있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고를 일으키기를 원하고 계신가요?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운전하고 있는데 깜빡깜빡 졸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실까요? 예, 흔들어 깨우십니다. 얘야, 어서 일어나! 빨리 일어나서 앞을 봐!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 이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때로는 우리에게 시련으로 닥쳐올 때도 있고, 또한 때로는 징계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8절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主はその愛する者を懲らしめ、受け入れるすべての子に、むちを加えられるからである。」
訓練と思って耐え忍びなさい。神はあなたがたを子として扱っておられるのです。父が懲らしめることをしない子がいるでしょうか。
もしあなたがたが、だれでも受ける懲らしめを受けていないとすれば、私生子であって、ほんとうの子ではないのです。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운전 하다가 졸고 있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흔드십니다. 깨우세요. 그러면 주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아차! 믿음 안에서 긴장이 풀려서 잘못하면 주님을 잊고 큰 사고를 일으킬 뻔했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여기겠지요.

하지만 무조건 주님께서 주시는 시련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아이 참, 하나님도. 아니, 왜 기분 좋게 자고 있는데 신경질 나게 깨우고 그래……. 이러면 어떻게 됩니까. 예. 큰 사고를 일으키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골로새서 4장 2절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目をさまして、感謝をもって、たゆみなく祈りなさい。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시련이 다가오고 있습니까. 삶이 힘드십니까. 어쩌면 지금 운전하면서 잠이 들려고 하는 나를 우리 주님께서 깨우시려고 하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앞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며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마귀 사탄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졸음운전에서 깨어나, 항상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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